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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시>, 2013년 여름호
현대시의 반전 의식
―『시와시』 제15호 머리말을 대신하여
맹문재
1.
이기호의 소설 「이정(而丁)」은 남북 분단의 상황에 놓인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에 투신한 당사자는 물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연좌제(緣坐制)가 바로 그 중의 한 가지이다. 주지하다시피 연좌제란 범죄인과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 제도로 근대 형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시대에 반역죄를 범한 자인 경우 친족, 외족, 처족 등 3족을 연계해 처벌한 경우가 그 단적인 예이다.
연좌제의 폐해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했다. 그렇지만 한국 전쟁과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사상범이나 월북 인사 및 부역자 등의 친족에게 관행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사상범이나 월북 인사의 가족이나 친족은 공무원의 임용에 불이익을 받았고 해외여행이나 출장 등에 제한을 받았다. 이와 같은 관행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기본권이나 형법의 자기 책임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그리하여 1980년 헌법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제12조 3항)라고 연좌제 폐지를 공식적으로 규정했고, 현행 헌법 제13조 3항에서도 규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연좌제의 관행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정」은 한 가족의 사례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정은 박헌영이 인민의 고무래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즉 농민과 노동자 계급의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지은 호이다. 주지하다시피 박헌영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해방 뒤에는 남로당을 창당하여 이끌었던 인물이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남한에서 정치 활동을 펼치기가 어려워지자 월북한 뒤 북한의 건국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렇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뒤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희생당하고 말았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패배에 따른 민중들의 불만과 정치적 부담을 전가하기 위해 박헌형을 미국이 고용한 스파이라는 혐의를 덮어씌워 처형한 것이다.
작품에서 박헌영 학교로 불리는 강동정치학원 출신들이 남한에 침투했다가 2주 만에 경찰들에 체포되고 만다. 한 명의 배신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밀고자가 바로 이정의 아버지인 최근식이다. 최근식은 체포된 동료들이 전향을 거부하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것과 달리 비해 전향해서 결혼까지 한다. 그리고 박헌영이 처형당한 다음해에 딸을 낳는데, 박헌영의 호를 따서 딸의 이름을 이정이라고 짓는다. 그렇지만 최근식은 전향에 따른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내다가 이정이 여섯 살 때 세상을 뜬다. 그의 아내도 얼마 있지 않아 세상을 뜬다. 그리하여 이정은 자신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자라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농촌진흥청에 근무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딸과 아들 수환을 낳는다. 그렇지만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말아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아온다. 그녀가 왜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했는지는 작품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연좌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유추된다. 즉 남편은 장인이 비록 전향했지만 박헌영을 따르는 공산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딸의 이름을 이정이라 지은 사실 등으로 봐서 자신의 공무원 생활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연좌제의 관행으로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아들 수환은 대학 진학과 동시에 알오티씨(ROTC) 지원서를 내겠다고 이정에게 말한다. 장기 복무 지원을 하면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환은 아버지 없이 자라났지만 원망하는 마음을 내비친 적이 없을 정도로 반듯한 아들이었다. 이정은 아들의 말을 들었을 때 박헌영의 호와 자신의 이름이 같은 것으로 인해 혹 장래에 지장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어 개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행정적인 일을 아들에게 부탁한다. 수환은 개명하는 사유, 즉 무엇 때문에 이름을 바꾸려고 하는가를 적다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개명 절차는 간단하지만 법원의 허가를 받으려면 사유를 써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한자의 뜻풀이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무거운 바……’/‘과거의 역사적 인물의 호와 동일한 이름으로 인하여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오해를……’/‘부친의 정치적 색채가 지나치게 드러난 이름으로 인해……’.” 그러다가 자연스레 외할아버지의 존재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수환은 외할아버지가 강동정치학원생이었던 사실을 알아낸다. 또 평생을 장기수로 보내오다가 출옥한 김명국이라는 노인의 수기를 읽은 후 그와 자주 통화하면서 과거의 일들과 아픔을 알게 된다. 수환은 어머니의 이름을 김명국 노인에게 알려주면서 자신의 어머니 역시 연좌제로 고통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김명국 노인은 자신이 겪은 고통에 비해서는 가당치도 않다고 화를 낸다. 심지어 이정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며 꼭 개명하라고 한다. 수환은 전향한 외할아버지의 과거를 알고 나서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한과 공장으로 찾아간다. 그렇지만 만나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으로 돌아오는데, 그만 교통사고를 당한다.
김명국 노인은 수환에게 심한 말을 한 후 사과를 하려고 전화를 했다가 수환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를 오고간다는 이정의 말을 듣고 찾아온다. 그리고 수환에게 용서를 빌며 반성한다.
딸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면, 어쩌면 그 친구가 더 괴로워했던 것인지도 모르겠고…… 스스로를 더 괴롭게 만들겠다는 의지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때 그 모든 것이 다 못마땅했소. 어디서 감히…… 어디서 감히……. 그런 말들만 계속 맴돌았소. 그래서 수환 학생이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이력 때문에 고통 받았다. 이혼도 당하고 평생을 혼자 사셨다’라고 말했을 때, 그만 잔인하게도……. (중략)
‘그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일 거다. 자세히 알아봐라, 네 어머니가 이혼한 것 그것 때문이 아닐 게다. 연좌제 때문이라니, 함부로 그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네 가족만은 그것을 다 피해 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네 외할아버지의 의지였으니까’라고 말해 버렸소. 내가 그렇게… 그렇게 말해 버렸고…… 그게 우리의 마지막 통화였소…….
이처럼 김명국 노인은 배신자로 낙인찍었던 최근식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딸의 이름을 이정이라고 지은 사실을 두고 감히 박헌영 선생의 호를 쓸 수 있는가 하며 분노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치적 신조를 지키려고 한 행동으로 이해한 것이다. 또한 최근식이 전향을 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고통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겼던 마음을 돌려 비록 전향을 했다고 하더라도 고통을 당했을 것이고 또 불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지켜온 이데올로기만을 내세우고 그 외의 것은 경멸해 동료의 삶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마저 내쳤다고 후회하면서 반성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정」은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여전히 연좌제로 인해 피해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는데, 한국 전쟁과 분단의 폐해가 이토록 큰 것이다.
2
어느덧 한국 전쟁이 휴전된 지 60년이 되었다. 인간의 세계로 치면 자신이 태어난 해로 돌아온 환갑에 해당하므로 큰상을 차리고 수연(壽宴)을 열어야 할 정도로 의미가 큰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전쟁이 정전(停戰)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분단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환갑의 세월이 흘렀지만 천명에 따른 통일의 길이 마련되지 않고 있을 뿐더러 기약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느덧 같은 민족이기에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정서적 당위성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남북 분단의 세월이 긴 만큼 이데올로기의 격차가 심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시인들이 남북 분단을 극복하려고 부르는 노래는 힘이 없다. 시인의 의지가 약하다거나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남북 분단을 극복할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분단 극복에 필요한 이데올로기의 완화가 진행되지 않고 분단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정치 체제가 들어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연좌제 같은 낙인찍기가 여전히 적용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예컨대 정전(停戰) 60여 년이 지난 세월에도 여전히 자신들과 생각과 이념이 다른 타자들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렇지 않는 자들을 ‘선’으로 규정하는 이른바 ‘낙인찍기’가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독선적인 여론과 상투화된 담론을 통해 걸핏하면 ‘종북’이니 ‘수꼴’이니 하는 행태들은 고작해야 이데올로기적 기의에 포획되어 있는 자들의 파편화된 담론들일 뿐이다.
―임동확, 「이데올로기라는 유령과 한반도에서 살아내기」 부분
위의 글에서 진단하고 있듯이 한국 전쟁이 휴전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낙인찍기가 횡행하고 있다. 자신의 이념과 다른 대상들은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독선적인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지없이 종북주의자나 빨갱이라는 혐의를 덮어씌운다. 자기 성찰이나 포용력 없이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세로는 남북 분단을 극복할 수 없다. 역사의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남북 간의 화해나 공존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대결보다는 상호 존중으로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남과 북의 이질성을 인정하면서 작은 일들에 얽매여 비방하기보다는 공존의 길을 마련하는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다. 더 이상 낙인찍기가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닫힌 세계 인식으로는 남북 분단을 극복할 수 없고,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낙인찍기가 너무 심했고, 지금도 그 유습이 심각하다. 가령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가를, 환경오염을 막으려는 환경운동가를, 그리고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를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그와 같은 세력들이 우리 사회의 여론을 움직이고 결정을 지배하고 있기에 분단 극복은 요원하다. 강정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주 해군 기지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제주 해군 기지 사업은 서귀포시의 강정마을에 정부가 주도하는 신항만 건설 사업이다. 전투함과 크루주선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항만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이 사업은 1993년 처음 제기되었는데, 우리의 수출입 물량 대부분이 제주 남방 해역을 지나기 때문에 안전의 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처음의 예정지는 화순항이었는데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의 반대로 무산되어 2007년 강정마을로 다시 정해졌다. 그렇지만 강정마을 역시 주민들과 환경운동가들의 반대로 심한 마찰을 빚고 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천연보호 구역으로 지정한 지역이고 국내 유일의 바위 습지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어서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고 주장한다. 또한 제주 해군 기지 사업이 미국을 대신해 중국과 맞서는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해군 기지 건설의 백지화를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는데, 정부는 좀 더 분명하게 사업 전반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낙인찍기로 무시하며 강행하고 있기에 김경훈은 「제주 4․3과 강정」에서 집중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정부는 제주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며,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다.
국내외 군사력에 의해 끊임없이 고초를 겪고 희생 당해왔던 제주도가 새로운 평화의 진원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무장 평화의 섬을 향한 노력은 제주에 해군기지 건설이 추진되면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륙과 해양의 교차점에 위치한 제주도가 두 세력 간의 각축장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두 세력 간의 완충지로 평화의 전진기지가 되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의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그것은, 제주도에 군대나 군사기지도 없는, 전쟁이나 폭력이 없는 평화의 섬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난개발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여 자연보존과 환경보호를 이뤄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생명에 대한 테러를 반대하여, 소중한 생명의 자생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외세나 그 어떤 세력들의 간섭도 미치지 못하는 영세 중립의 자주적 공동체를 이뤄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제주도 비무장 평화의 섬이 갖는 본질이다.
―「제주도 비무장 평화의 섬」 선언문 부분
위의 선언문은 2013년 3월 1일 ‘제주도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발표한 것이다. 김경훈은 2005년 정부가 제주 4․3항쟁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키려는 차원에서, 그리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려는 차원에서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것을 상기키고 있다. 제주가 군사력에 의해 고통을 겪어왔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평화의 진원지로 부상한 것을 상기시키며 현재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해군 기지 사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4․3항쟁의 정신이 구현되어야 할 곳에 해군 기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평화를 깨트리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세력의 각축장이 되는 위험을 초래하는 면이 있다. 그리하여 평화의 위험을 걱정하는 강정마을 주민들과 평화운동가 등이 설계의 하자와 허위 시뮬레이션 등을 문제 삼고 철저한 검증은 물론 공사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념이 다른 사람들은 이와 같은 요구를 낙인찍기로 무시한다. 제주 해군 기지 건설은 반드시 필요한 국책 사업이고, 이 사업에 반대하는 것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몰아세운다. 그들은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면 북한을 제압할 수 있는 군사력을 절대적으로 확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한미동맹을 굳건히 해야만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응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제주 4․3항쟁을 반란자들의 폭동으로 몰아붙인 낙인을 해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찍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낙인찍기가 멈추지 않는 한 화해며 상생이며 평화며 인권은 실현되기가 어렵다.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 문제를 논의를 거치지 않고 이념의 문제로 몰아붙여 해결하려는 태도는 곤란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낙인찍기는 국내의 상황에만 적용되지 않고 이라크전쟁에서도 확인된다. 그와 같은 면은 이라크전쟁에 뛰어들어 75일 동안이나 평화나눔 활동을 펼쳤던 박노해의 「파병은 ‘오, 피스 코리아’의 치욕」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라크전쟁은 2003년 3월 20일부터 4월 14일까지 미국과 영국 등이 침략한 전쟁이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사건 이후 북한을 비롯해 이라크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를 제거해 자국민을 보호하고 세계의 평화에 기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침공했다. 그렇지만 수천만 명에 이르는 참전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고 부상을 당해 세계 곳곳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전쟁의 실질적인 목적이 이라크 국민들의 자유보다 미국의 원유 확보와 중동 지역의 친미 구축에 있다는 이유로 비난이 거셌다. 박노해는 그와 같은 현장에서 몸소 반전운동을 펼친 것이다.
전쟁은 모든 인간을 미치게 만듭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병사들은 더 광기 어린 폭력과 잔인성에 자신을 맡깁니다. 광기는 광기를 부르고, 그 폭력의 기운은 한 세대를 넘어서 인간성에 끈질긴 영향을 미칩니다. 힘이 곧 여론이고 무장력이 곧 정의라면,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삶의 원칙을 가르친다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바그다드를 처참하게 파괴한 미사일과 전투기들이 곧이어 한반도를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정부는 북한 핵의 평화적 해결을 약속 받는 대신 이라크전을 지지하는 부도덕한 거래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부시의 전쟁을 지지하는 아시아 3개 나라 가운데 하나, 전 세계 30여 개 나라 가운데 하나가 KOREA입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남의 피눈물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군대가 이라크전에 참전한다면 한반도 전쟁 위험이 닥쳤을 때 어떻게 국제 사회에 평화를 호소하고, 그 누가 앞장서서 ‘KOREA WAR Ⅱ’를 막아주겠습니까.
나는 이라크전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못난 내 나라의 현실이 슬프고 부끄럽습니다.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이라크인들과 고통을 함께 하며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한국인들의 진정한 마음은 이렇게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나누는 것임을 조용히 보여주고 싶습니다.
― 박노해, 「파병은 ‘오, 피스 코리아’의 치욕」 부분
위의 글에서 보듯이 박노해는 한국 정부가 이라크전쟁에 참가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라크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부는 일본 등과 함께 가장 앞서 파병을 약속했다.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국내에서 널리 일어났고 평화운동가들이 이라크에 들어가 반전 운동까지 펼쳤는데,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분단 국가의 상황에 놓인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향후 관계를 외면할 수 없어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참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미국을 반대하는 목소리라고 낙인찍기를 가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의 평화를 외치면서 스스로 평화를 저버리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어느덧 이라크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압도적인 전략으로 조기 승리를 장담했다. 실제로 전쟁은 26일 만에 종료되었고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도 체포되었다. 전쟁이 미국의 의도대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은 지속되어 8년 9개월이 지난 2011년 12월 15일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종결을 선언할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14만 명에 이르는 참전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전쟁에 들인 비용이 2조 달러를 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연이는 테러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결국 미국 국민들 60%가 가치 없는 전쟁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이라크전쟁은 실패한 것이다.
이라크전쟁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만약 미국이 이라크 침략에 쓴 돈을 국민들을 위해 사용했다면 더 많은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닫힌 이데올로기로 전쟁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있다. 가령 북한의 핵 위협을 제압하려면 압도적인 무기로 선제 공격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종북좌파로 낙인찍기를 가한다. 실로 위험한 모습이 아닐 수 없는데,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베트남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전쟁은 끝났고, 두 나라는 수교를 맺었으며,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시민단체 등의 노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계가 개선되고 있지만, 우리 작가들이 이 전쟁에 대해 물어야 하는 질문은 중단될 수 없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만 하는 것이 문학의 유구한 수행적 역할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전쟁을 겪은 두 나라 작가들이 일상적인 차원이든 비일상적인 차원이든 간에 지속적으로 상상력의 연대를 이루어야 함은 당연하다.
―고영직, 「시인은 국익을 말하지 않는다」 부분
시인은 국익을 말하지 않고 또 말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국익을 위해 자유와 평화를 희생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은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할 가치를 노래하는 존재이다. 만약 시인이 국익만을 노래해야 하는 사회라면 불행한 국가이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역사가 있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서 민간인을 학살한 우리의 만행을 규탄하지 않은 것이 그 예이다. 규탄하지 않은 것은 물론 침묵한 것도 그 모습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독립과 자유를 위해 항전한 베트남 민족의 위대성을 배워야 할 것이다.
베트남은 B.C 2,879년 반 랑국[文郞國]이라는 독립 왕국으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식민지의 경험 또한 오래되었다. 214년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침략을 시작으로 천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13세기에는 몽골로부터 세 차례의 침략을 받았으며, 1862년부터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1940년부터는 일본의 지배를 또한 받았다. 일본은 베트남을 중국의 장개석 정권을 타도하고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위한 군사적 전초 기지로 삼았다. 1945년 일본이 패하자 같은 해 9월 2월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은 호치민(胡志明)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1946년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겪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그렇지만 같은 해 7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분할되었다. 그 후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의 친공산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미국의 개입을 가져온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곧 베트남 전쟁)을 겪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프랑스의 식민지 건설에 대한 베트남 민중들의 항전이라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 민중들의 항전이었다. 1973년 미국이 철수하면서 휴전되었고, 1976년 북베트남의 주도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되었다.
미국조차 베트남전쟁에서 패한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베트남은 강한 민족이다. 온갖 외부의 침략에도 굴복하지 않고 불굴의 민족성으로 항전해 민족의 해방을 이루었다. 1998년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에 참여한 것에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동남아의 한 관광지 내지 시장으로 인식할 뿐 진정한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단순히 경제 수준이 우리보다 낮기 때문이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미국의 관점으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 간의 간극이 큰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역사적 전망으로 가지고 낙인찍기에 대항하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3.
김광렬의 시론인 「느낀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느낀다는 것은, 즉 사물이나 상황을 인식한다는 것은 부단하게 노력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느낀다는 것은 문제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문제의식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일상에 묻히고 만다. 일상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서 일상만을 가치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그러므로 시인은 일상을 넘어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고민하고 올바르게 판단하고 그리고 행동해야 되는 것이다. 김광렬 시인이 제주 4․3항쟁이나 강정마을 해군 기지 사업이나 난개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그 모습이다.
분화구 위로 한 떨기 수국처럼 낮달이 파리하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기 웬 낮달 하나 떠 있군,
하는 정도로 무심히 흘려버린다
내가 감히 밟고 선 오름 저 아래 동굴에서
죽은 사람들이 발견된 적이 있다
몇 구의 해골과 허연 손톱과 찌그러진 그릇과 사금파리와
두려워서 도저히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 캄캄한 마음과
그런 것들이
삼십 년 아픔의 시간을 보내다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공포로 떨던 시간만큼 원한의 시간도 길 것이다
수심 머금은 낮달이 소리 죽여 운다
― 김광렬, 「다랑쉬오름에서」 전문
다랑쉬오름[月郞峰〕은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라는 산간 지역에 있는 산봉우리인데, 1992년 그곳에 있는 한 동굴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11구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4․3항쟁 당시 동굴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동굴 속에 주민들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 토벌대는 밖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응하지 않자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고 불을 피워 연기를 불어넣고 동굴 입구를 봉쇄해버린 것이다.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된 4․3항쟁의 실체 앞에서 시인이 지녀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억울하게 죽은 그들을 모른 채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김광렬 시인이 말했듯이 “어떤 울림이 나를 지배하는지 모르지만 제주 사람이라면, 더 나아가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역사의 상흔이 주는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 강정마을에서 시행되고 있는 해군 기지 건설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어느덧 강정마을은 해군 기지를 찬성하는 주민들과 반대하는 주민들로 나뉘어져 있다. 서로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주민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오히려 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한 외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제주에 군사 기지가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고 있고 또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다. 모두 4․3항쟁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전쟁의 위협이나 정치적 보복으로 주민들을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남북 분단에 기인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 분단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반전의식이 필요하다. 전쟁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므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다. 전쟁이 내세우는 명분은 허위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쟁이나 이라크전쟁 등은 물론이고 한국전쟁에서 그것은 여실하게 확인된다. 이데올로기로 편을 갈라서는 결코 우리의 분단을 극복할 수 없다. 남북 분단 자체가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말리크 대사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데서 밝혀졌듯이 소련을 위시해 미국과 중국 등 세계적인 전략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그와 같은 차원에서 작동될 것이므로, 우리 스스로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맹문재 | 본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