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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제 18일차 아침 일찍 Villadengos del Paramo를 출발 Astorga로 향했다. Hospital de Orbigo근처 바(bar)에서 한국인 부부 두 쌍을 만났다. 이들은 순례도중 우연히 만났다고 하며 한 쌍은 4월11일 또 다른 부부는 4월14일에 불란서 SJPP를 출발 했다고 한다. 부부 한 쌍은 수서성당 소속의 신자였다. 그들로부터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기운을 얻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Astorga도착 직전 약간 경사진 언덕을 넘어서며 휴대 하던 물을 다 마셔 버려 목이 말랐다. 언덕을 올라 조금 걸으니 허허벌판에 현지인이 움막을 치고 순례자에게 음료수와 간식을 제공하는 간이 휴게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배낭을 내려놓고 포도 주스를 마시고 헌금을 하는 동안 그는 내 배낭에 달린 물병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식수를 가득 채워주었다. 이것이 내가 길 위에서 받은 일곱 번 째 선물이다.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어 민속소품을 하나 건네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해갈을 하고 나니 발 걸음이 한결 빨라졌다.
Astorga입구에서 구름다리를 올라 가 뒤를 돌아 보니 순례 길에서 여러 번 스쳐간 아일랜드 출신John Dundon이 보였다. 고함을 질러 인사를 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려 Astorga 시내 입구 호텔카페로 가 커피를 마시며 순례근황과 서로 잘 아는 다른 순례자들 특히 한국 학생 보민양 의 최근 소식을 물어보았다. John이 Astorga에 머물겠다고 해서 그와 열흘 후쯤 산티아고 에 있는 알베르게 Seminario Menor Belvis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일에 경우 못 만나면 관리인에게 메시지라도 남겨놓기로 하고 헤어졌다. 순례 길을 지나면서 안톤 가우디가 설계한 주교관이 보여 사진을 찍고 부근에 있는 11세기에서 13세게에 축조한 로마네스크식 성당을 방문했으나 문이 잠겨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다.
Astorga교외를 빠져 나가는데 도로변에 Residence St. Francisco Assisi라는 간판이 보여 호기심이 발동하여 사무실로 들어가 불란서 수녀님을 만났다. 나는 여기가 St. Francisco Assisi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물었으나 수녀님은 전혀 알아 듣지 못하고 나를 시설내부에 있는 경당으로 안내 했다. 거기서 잠시 묵상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나를 맞아 주었다. 이 직원을 통하여 여기는 아씨시 성인의 복지 재단이 운영하는 노인요양원이라고 사실을 알고 난 후 궁금증이 풀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때 시간으로 봐서 Astorga에서 9.5km 떨어진 Santa Catalina de Somoza에 머물러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내가 막상 그곳에 도착하자 내 몸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이 멈출 줄 몰랐다. . Granon에서 Mr. Evans가 적어준 Rabanal del Camino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하루 밤을 자야 하겠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거기다 Astorga 다음 마을인 Murias de Rechivaldo를 지나면서 알젠틴에서 온 남녀 젊은이를 만나 이야기 상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이 El Ganso에서 머물기로 결정하여 나는 석양에 인적이 없는 시골길 7km를 혼자 걷는 고독한 순례자가 되었다.
Rabanal del Calmino에 들어가기 직전 음침한 짙은 숲 속 노변 길을 걸을 때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이 외진 곳에서 내가 사람이나 짐승의 공격을 받으면 고립무원이 되기 때문이다. 해는 지고 Rabanal del Calmino는 시야에 들어 오지 않고 나그네의 시름은 깊어 갔다. 고작 안전대책으로 생각한 것이 목에 걸고 있는 나이롱 천 지갑을 배낭 속에 감추는 미봉 책이 고작 이었다. 그리고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숲 속 갓길을 빠져 나갔다. 공포의 20여분을 긴장 속에 넘기니 산책 나온 마을 사람인지 순례 객인지 반대편에서 걷는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여 그제야 마을이 가까워 졌음을 알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안내 판을 보고는 영국 야고보 협회에서 관리하는 알베르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마을 중앙 통 성당 옆에 있는 깨끗해 보이는 돌집으로 된 알베르게를 찾아 갔다. 사실 Granon에서 Mr. Evans씨가 준 메모에는 영국 야고보 성심회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라고 만 했지 정확한 알베르게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이미 completo(만실)이라는 표시가 문밖에 걸려 있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 여기가 Evans씨가 말한 영국 야고보 성심회에서 관리하는 알베르게 인지 확인 할 겸 닫힌 문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신은 영국에서 온 자원 봉사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 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여기가 Evans씨가 말한 알베르게 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내가 남자 봉사자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안에서 일하던 여자 봉사자가 나와 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태연하게 오늘 저녁 쉬고 갈 빈자리를 하나 구할 수 없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여자 봉사자가 여기는 만실 이고 원하면 다른 알베르게를 알아 봐 줄 수 있다면서 나의 동의를 구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나의 초췌한 모습을 감지한 여자봉사자가 오늘 도대체 몇km를 걸었는지 물어 왔다. 내가 그냥 47km쯤(여행 안내서에 의하면 정확히 49.2km 를 걸었음)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소리를 듣고 여자 봉사자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Maggie라는 이름의 이여자 봉사자는 남편과 함께 영국에서 와 일주일 기간으로 봉사 중이었음) 가 태도를 일변하여 오늘 그 먼 길을 걸었으면 당신은 환자나 다름없다고 말하면서 등록하는 테이블로 나를 안내했다.
Maggie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공동 숙소는 만실 이 지만 환자가 잘 방 하나는 비상용으로 비워 두는데 오늘은 내가 그렇게 먼 길을 걸었으니 환자나 다름없어 환자 방 입실을 허락한다고 말했다. . 환자용으로 남겨 논 방은 Salon & Biblioteca(살롱 겸 도서관)이라고 표시된 내실이었다. 그 방에는 침대가 두 개 있었는데 그날 환자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순례 길에서 모처럼 독방을 차지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조금 있으니 자원봉사자 Maggie가 따뜻한 홍차를 가져다 주면서 설탕을 몇 스푼 넣느냐고 물어 내가 무조건 많이 넣어 달라고 했더니 당신은 지금 충분히 그럴 필요가 있다면서 웃었다. 그때 상황으로 봐서 사실 내게 는 홍차가 아니고 설탕 물 이 더 필요했다.
현지에서는 이 알베르게를 Gaucelmo라고 부르는데 Gaucelmo는 11세기 초엽 은수자로 이곳에서 수도자 생활을 하며 순례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악천 후 시에는 험한 길을 동반 안내하며 헌신적으로 순례자를 돌본 수도자라고 한다. 그날 내게 배정된 환자 방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저녁 9시경이었고 소등 시간 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아 간단한 세탁과 샤워 그리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잘 밤에 홍차를 마신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오늘 나를 환자 취급하면서 따뜻한 홍차까지 대접한 Maggie는 나에게는 천사처럼 보였다. Maggie 는 마치 Evans씨의 소개로 내가 특별히 여기까지 찾아온 사연을 잘 아는 것처럼 나를 환자로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 하여 나에게 편히 쉴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중세 때 험한 산속에서 의지 할 곳 없는 순례자들에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준 은수자 Gaucelmo의 손길을 Maggie의 마음 씀씀이를 통하여 느낄 수 있었다.
까미노 순례 길에서 한 단계는 보통 20-25km를 걷는 하루 일정을 말한다. 불란서 길의 경우 불란서 SJPP에서 Santiago까지 걷는데 통상 40일 내외를 잡는다. 오늘 나는 49km를 걸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일정계획으로 보면 두 단계를 하루에 걸은 셈이다. Maggi가 나를 환자 취급한 것은 이런 통찰력이 작용 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아침 아침 8시에 일요 미사가 있다 해서 식당에서 빵 한쪽만 먹고 급히 떠날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 Maggi가 가다 먹으라고 샌드위치를 싸 주었다. 이것이 내가 길 위에서 받은 여덟 번째 선물이다. Maggi부부와 사진을 찍고 E-mail 주소를 받아 적고 내가 어제 저녁 경험한 일과 이 알베르게에서 느낀 고마운 마음을 방명록에 남겼다.
그리고 8시에 미사를 보려 숙소 바로 옆에 있는 성당에 갔으나 성당 안에 아무도 없었다. 불 꺼진 성당 안에 나를 찾으려 온 Maggi와 함께 밖으로 나와 부근 카페 주인에게 다른 성당의 미사 시간을 알아 봤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일요일 아침 미사를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끝까지 친절을 베푼 Maggi에게 골목 어귀에서 작별인사를 헸더니 Maggi가 멀리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순례 길에서 몸을 잘 돌보라고 충고 해주었다.
이번 순례 길에서 제일 높은 이라고 산 (Irago Mountains, 해발 1504m, 피레네 산맥 준령 Col de Lepoeder 1410m 보다 높음) 초입에 있는 이곳 산골마을의 역사를 살펴보면 12세기부터 템풀 기사단(knights Templar)이 주둔 하면서 폰세바든(Foncebadon)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이슬람세력과 산적들로부터 보호 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뎀풀 기사단은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을 해방 시킨 후 기독교인들의 예루살림 성지순례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서유럽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에 나섰고 이들은 도중에 강도와 산적으로부터 약탈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119년 처음으로 9명의 불란서 기사들이 베네딕토 규칙에 따른 정결, 가난, 순명의 삶을 맹세하고 예루살렘에 주둔하면서 순례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들의 최초 주둔 본부가 템풀산(Temple Mount)부근에 있었기 기 때문에 사람들이 템풀 기사단(knights Templar 또는 Knights of the Temple)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다.
12세기 들어와서 이들 템풀 기사단이 곳곳에서 회교도들과 성전을 펼쳐 템풀 기사단은 중세 십자군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하여 템풀 기사단은 도처의 왕족과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물질적인 후원을 받았다. 13세기 중엽에 들어 20,000명의 템풀 기사단이 서유럽 각지에서 활약했다. 스페인에서도 아랍인들과 국토회복전쟁당시 템풀 기사단이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 제도 탈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막강한 부와 정치적인 힘이 세속적인 권력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중 이들 기사단이 예수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모독했다는 나쁜 소문이 돌면서 1307년에 불란서에서 그 다음해에는 스페인에서 연속적으로 일대 검거칙령이 내렸고 급기야는 교황청에서 1312년에 템풀 기사단의 승인을 취소 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전설에 따르면 라바날(Rabanal)에서 돌을 집어다 이라고산 정상(1504m)에 있는 La Cruz de Hierro (Iron Cross, 철 십자가)돌 무덤에 내려 놓으면 죄를 용서 받는 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순례를 출발 하기 전 살 던 곳에서 돌을 주머니 속에 넣고 만지면서 순례를 하다 Irago산 정상에 있는 철 십자가 돌 무덤에 버리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는 Rabanal del Camino에서 작은 돌을 하나 집어다 철 십자가 돌무덤에 아무 생각 없이 던졌다. 로마 때 이자리에 십자로의 신인 머큐리 제단이 있었는데 그 이후 은수자 가우셀모가 이곳에 십자가를 세웠다고 한다.
철 십자가를 지나 한 참 내려오니 Manjarin이라는 동네가 나왔다. Manjarin의 작은 쉼터 앞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나무로 만든 이정표가 순례자의 눈길을 끌었다. 산티아고 222km, 예루살렘 5000km, 로마 2475km등으로 방향과 거리를 알리고 있었다.
Ponferrada 시립 알베르게에 오후 5시30분경에 도착하여 빨래와 샤워를 했다. 그리고 수퍼에서 내일 먹을 간식을 산후 8시에 San Nicolas de Flue경당에서 저녁 미사에 참석했다. 신부님이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순례자 몇몇 사람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순례자의 국적을 대충 확인했다.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해서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것이 머리에 남았던지 나중에 주님의 기도를 여러 나라 순례자들에게 자기나라 말로 하도록 시킬 때 불란서, 이태리, 아이랜드에 이어 한국어는 나를 지명하여 낭송토록 했다.
순례 20 일은 흐리고 비가 내렸다. 아침 7시 40분에 Ponferrada알베르게를 출발했다. 순례길 따라 Ponferrada를 빠져나가면서 거대 한 성을 지나가게 된다. 이성은 중세의 성으로 990년대 아랍의 지도자 알 만수르 장군에 의하여 폐허가 된 것을 레온의 페르난도 II세가 1178년 템풀 기사단에 증정하여 템풀 기사단이 1218년부터 1282까지 축조하였다. 이성은 1312년 교황청에 의해 템풀 기사단의 승인이 취소 될 때까지 템풀 기사단이 소유했다. 이 성의 주 탑에는 템풀 기사단의 라틴어 모토가 적혀 있다. 즉 만약 주님이 이 도시를 지켜 주시지 않으면 도시를 경계하는 사람들의 경계는 헛된 경계가 될 것이다 라는 내용의 모토이다.
이 구간 순례 길에서 많은 순례자들과 만나 그들의 순례길 사연을 들었다. 바르세로나에 사는 중년의 스페인 부부는 카미노 순례 구간을 4 등분하여 걷는 계획을 세운 후 금년이 레온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마지막 구간을 걷는 해라고 강조하면서 4년차계획에 결실을 앞둔 금년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카나다 벤쿠바에서 온 노부부는 하루 20km를 기준으로 일정을 진행 중이라며 순례가 끝나고 모나코에 있는 친지의 가족 결혼식에 참석 할 예정이라고 말하면서 여유를 보였다. 또 다른 카나다인 부부를 만났는데 부인은 카미노를 6번 걸었고 남편은 다섯 번을 걸었다면서도 기회를 봐서 다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지 않는 진정한 카미노 순례 동기는 과연 무엇 일가?
순례 20일차 길 위에서 바이런(Byron)의 시를 떠올리며 나의 내면에는 과연 어떤 조용한 변화가 태동하고 있는지 묵상해 본다.
던져진 나의 상태를 싫어하게 하고
내 소중히 사랑한 것에서 날 떠나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미움이 아니다
천한 야심이 세운 명예를 잃었음도 아니다.
내 만나고 듣고 본 것 모든 것에서
솟아난 권태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인도 나를 즐겁게 하지 않는다
그대 눈도 나를 매혹하지 못하리라
옛날 히브리 방랑자가 품었다던
쉴새 없이 닥쳐오는 우울이다.
무덤 뒤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덤 이편에서도 안식을 바랄 수 없는 우울이다.
아무리 방황한들 자기 자신에서 달아날 수 있으랴?
아득히 아득히 먼 곳으로 도망쳐도
아직 놓치지 않고 나를 쫓아오는 것은
삶의 어두운 그림자, 생각이라는 악귀.
바이런 시 순례(황동규 옮김)중 이너즈에게(To Inez) 서 발췌
순례20일차 묵상: 아무리 풍찬 노숙(風餐露宿)을 하며 멀-리 그리고 또 더 멀-리 도망쳐도
귀밑에 새치만 늘어 날뿐 아직은 내밀한 삶의 깊은 고뇌 속에서 벗어 날 수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