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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보루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는 정작 보루라고 하는 용어에 대한 고민이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보루성이라고 불렀다가, 후에 보루와 성이라는 개념의 모호함 때문에 보루라고 일원적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아직도 종종 보루성이라는 표현을 볼 수가 있다. 암튼 필자 역시 논문을 쓰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하고 논지를 전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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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록에서 ‘보루’의 용례를 찾아보면『삼국사기』에서 ‘壘’라는 용례가 8건1), ‘保’라는 용례가 1건 확인되며2),『三國遺事』에서도 ‘壘’의 용례가 1건 확인되는데3) 10건의 용례 중 고구려에 해당하는 경우는 총 5건이다. 이때 ‘深溝高壘’라는 표현이 관용 어구처럼 사용되는 것으로 봐서 ‘깊이 판 도랑과 높이 쌓은 적대’가 하나의 짝을 이루어 방어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문헌에서 확인되는 ‘壘’는 일단 ‘높이 솟은 형태의 방어시설’로 봐야 적합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주변에 참호시설을 동반한 형태’의 소규모 관방시설로 볼 수 있겠다.
1)『三國史記』卷1 「新羅本紀」 第1 <婆娑尼師今>, “八年, 秋七月 … 威不足畏, 宜繕葺城壘, 以待侵軼.”
『三國史記』卷7 「新羅本紀」 第7 <文武王(下)>, “十一年, 九月 …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侵帶方.”
『三國史記』卷11 「新羅本紀」 第11 <眞聖王>, “三年 … 令奇望賊壘, 畏不能進 ….”
『三國史記』卷16 「高句麗本紀」 第4 <新大王>, “八年, 冬十一月 …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
『三國史記』卷20 「高句麗本紀」 第8 <嬰陽王>, “二十四年, 春正月, … 積如丘山, 營壘帳幕 ….”
『三國史記』卷21 「高句麗本紀」 第9 <寶藏王(上)>, “四年, 五月 … 不若深溝高壘, 以待車駕之至.”
『三國史記』卷21 「高句麗本紀」 第9 <寶藏王(上)>, “四年 …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
『三國史記』卷45 「列傳」 第5 <明臨荅夫>, “明臨荅夫, 高句麗人也 …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
2)『三國史記』卷42 「列傳」 第2 <金庾信(中)>,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기본적으로 ‘壘’와 기능상 큰 차이는 없는 관방시설이라고 추정되지만, 글자가 다르고 용례가 유일하기 때문에 형태나 규모 면에서 양자가 서로 다른 관방시설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3)『三國遺事』卷2 「紀異」 第2 <後百濟甄萱>, “長興三年 … 未及營壘, 將軍黔弼以勁騎擊之 ….”
본고에서는 ‘營壘’를 따로 해석했지만, 한 단어로 해석해도 전체적인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후『高麗史節要』를 보면 고려시대에도 ‘壘’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4), 이러한 양상은『조선왕조실록』에서도 계속적으로 확인된다5). 단, 고종 32년(1895) 군부 관제를 반포하는 기사에 ‘保壘’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어6) 이채롭다. 그밖에 조선시대 ‘堡’의 형태를 엿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정약용이 1812년 저술한『民堡議』와 신관호가 1867년 저술한『民堡輯說』을 꼽을 수 있다7). 여기에 의하면 ‘담장(성벽)을 두르고 적대를 갖춘 소규모 산성을 民堡’라고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高麗史節要』卷6 「宣宗思孝大王」, “辛未 八年, 宋 元祐 六年, 遼 大安 七年(1091) 九月 … 都兵馬使奏, 安邊都護府境內, 霜陰縣, 最爲邊地要害, 乞築城壘, 以防外寇, 從之.”
5)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검색 결과(2009. 9. 15일 기준).
‘壘’ 41건, ‘保’ 5건, ‘堡’ 37건, ‘石堡’ 2건 등이 검색되었다. 한편 ‘疊’으로 검색된 경우가 3건 있었지만 전체적인 문맥상 ‘壘 ’의 誤記로 판단할 수 있겠다.
6)『朝鮮王朝實錄』 「高宗」 卷33, “32年(1895), 一, 要塞, 保壘, 砲臺에 關한 事項.”
7)『民堡議』 「堡垣之制」, “尹耕堡約曰, 圍垣旣立, 則敵臺宜講也.”
두 책 모두 조선의 국방제도를 ‘전 국민 총력안보 태세’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신관호의『民堡輯說』은 당시 식자들 간에 논의되고 있던 민보설을 수집한 것으로서『民堡議』와 내용상 동일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보루라는 용어는 잘 쓰이지 않아『宋史』에서 2건8),『金史』에서 1건9),『續資治通鑑長編』에서 2건 만이 확인되며10), 대부분 ‘壘’라는 단어가 단독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1). 일본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인데『日本書紀』,『續日本記』,『日本後紀』,『續日本後紀』,『日本文徳天皇実録』,『日本三代実録』 등 일본 六國史를 살펴봐도『일본서기』에서 ‘壘’의 용례만이 일부 확인될 뿐이다12).
8)『宋史』 巻349 「列傳」 第108 <劉昌祚>, “… 七百里堡壘疏宻 ….”
『宋史』 卷455 「列傳」 第214 <華岳>, “… 不脩堡壘不設吾雖帶 ….”
9)『金史』 卷108 「列傳」 第46 <胥鼎>, “… 其地遠甚, 中間堡壘相望, 如欲分屯 ….”
10)『續資治通鑑長編』 卷203 <英宗>, “… 使各繕堡壘人置器甲 ….”
『續資治通鑑長編』 卷327 <神宗>, “… 築堡壘自可止用廂軍 ….”
11) 조선시대에는 ‘壘’와 ‘堡壘’가 혼용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보루의 용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고려시대까지 해당하는 ‘중국 24사’ 내의 ‘壘’ 용례를 살펴보면『史記』에서 30건,『漢書』에서 51건,『後漢書』에서 54건,『晉書』에서 115건,『南齊書』에서 43건,『梁書』에서 63건,『陳書』에서 10건,『魏書』에서 94건,『北齊書』에서 7건,『周書』에서 14건,『南史』에서 81건,『北史』에서 54건,『隋書』에서 20건,『舊唐書』에서 133건,『新唐書』에서 136건,『舊五代史』에서 176건,『新五代史』에서 30건,『宋史』에서 446건,『遼史』에서 20건,『金史』에서 61건,『明史』에서 172건이 검색되어 ‘堡壘’라는 단어보다 ‘壘’라는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宋史』 卷191 「兵志」 第144 <兵五>, “… 堡塞西門列陳待之全不敢動璡等乃入城庚午全晨率步騎五千餘攻堡塞西門 ….” 등에서 ‘堡塞’라는 단어도 확인이 되고 있는데 보루와 비슷한 의미의 용어라고 생각한다.
12)『日本書紀』 巻20 「敏達天皇」, “十二年(582), … 毎於要害之所. 堅築壘塞矣.”
『日本書紀』 巻23 「舒明天皇」, “九年(637), … 還爲蝦夷見敗而走入壘.”
일본사서의 경우, ‘壘’의 용례가 적고 ‘保’, ‘堡’의 용례가 없는 대신에 상대적으로 ‘塞’의 용례가 많은데 이는 한국과 일본 관방시설의 차이 때문인지, 한자 사용에 있어 선호도가 다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즉, 보루라는 용어는 고대 한 · 중 · 일에서 흔히 쓰는 용어가 아니라 최소한 13세기 이후에나 가끔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과거에 사용했던 ‘壘’, ‘保’, ‘堡’ 등의 소규모 관방시설이 오늘날의 ‘堡壘’와 동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보루의 사전적 정의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13)이며, 보루와 의미가 상통하는 영어 단어인 ‘fort’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거대한 군사기지를 의미하는 ‘fortress’보다 규모가 작은 군사기지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4). 한편, 현대 군사용어로서의 ‘fort’는 ‘전략 혹은 작전상 중요한 지점에 적의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영구적인 제반 방어 시설로서 구축된 전략적 요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오늘날 보루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15).
1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search/List_dic.jsp) 검색 결과(2009. 9. 14일 기준).
14) 위키백과(http://en.wikipedia.org/wiki/Fort) 검색 결과(2009. 9. 14일 기준).
‘Many military installations are known as forts, although they are not always fortified. Larger forts may class as fortresses, smaller ones formerly often bore the name of fortalices. The word fortification can also refer to the practice of improving an area's defense with defensive works. City walls are fortifications but not necessarily called fortresses.’
15) 대한민국합동참모본부(http://www.jcs.mil.kr/main.html) 검색 결과(2009. 9. 14일 기준).
현대적 보루의 개념을 고구려의 소규모 관방시설에 그대로 대입시키기는 부적합함을 알 수 있다. 실제 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한강유역의 고구려 관방시설들은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일반 성곽도시처럼 영구적인 목적으로 축조되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선조가 일본군은 잠깐 거처하는 곳에도 반드시 목책을 세우는 것에 반해 조선 장수들은 가시나무로 ‘壘’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했다는 기록이나16), 조선 선조 32년(1599) 魯認이『錦溪日記』에서 일본군이 흙으로 단기간에 축조했던 임시 군사시설인 ‘土壘’를 언급한 것을 보면17) 과거의 소규모 관방시설에는 임시적인 방어시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20세기 초에 간행된 정약용의『茶山詩文集』을 보면 보루는 ‘鎭’, ‘堡’와 같은 의미로 쓰이며 ‘領’보다는 하위개념으로서 변방에 설치했던 작은 군사시설임을 알 수 있다18).
16)『朝鮮王朝實錄』 「宣祖」 卷56, “… 聞諸將以枯棘爲壘云, 豈可如是而禦侮乎? 倭賊, 則雖一夜過去之處, 必設木柵云.”
17)『錦溪日記』 「宣祖 三十二年」 <五月>, “二十日 … 但彼賊所長, 非但鳥銃槍劍. 雖行師野營蒼黃臨戰之時, 必集土壘於瞬息然後接戰, 故倭陣未易攻破. 蓋彼賊長□□得壘法之妙矣.”
18)『茶山詩文集』 卷8 「對策」 <地理策>, “… 今也不然小鎭殘堡所領民兵, 不滿百戶者有之 … 臣謂邊堡, 或合而爲一, 或統而置領,, 以强其勢 ….”
조선시대 변방의 보루에는 적어도 民兵 백여호(약 500명) 이상이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고대사회부터 통용되던 소규모 관방시설들은 ‘변방의 방어목적을 가진 소규모 군사집단이 주둔하는 임시적 혹은 반영구적으로 설치된 최소 단위의 군사시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임시적으로 설치’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성벽과 같은 구조물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형태나 내부시설에 있어 정해진 규격이 있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또한 ‘순수하게 전투 목적을 지닌 소규모 군사집단이 주둔’하는 만큼 ‘정치 · 군사 · 경제적인 목적의 집단이 주둔’하는 성곽과는 성격이나 기능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오늘날 고구려 보루라고 부르는 소규모 관방시설들은 ‘변방에서의 전투를 수행하는 소규모 군사집단이 주둔하기 위하여 임시적 혹은 반영구적으로 축조한 최소 단위의 군사시설’이자 ‘적의 침입을 방어하거나 공격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만든 석축시설’이며, ‘성벽과 같은 구조물이 없이도 방어적인 기능을 갖춘 관방시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19). 이는 고대와 현대의 보루 개념이 적절히 절충된 것으로서 그간 통용되던 ‘보루’라는 용어가 적절한 것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 崔種澤은 고구려의 관방유적을 두고 堡壘城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가(1995a: 12), 보루라는 단어 안에 이미 城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보루라는 용어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1999b: 258).
그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은 보루의 ‘구분 기준’이다. 崔種澤은 히스토그램 분석 결과 둘레 600m 이하인 경우, 보루로 분류하고 다시 400m를 기준으로 대 · 소형으로 구분한 바 있다(1999b: 265). 이후 白種伍는 600m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다른 지역의 소규모 테뫼식산성에 전체적으로 보루의 개념을 적용시킬 수밖에 없는 문제점이 있음을 근거로 300m를 기준으로 보루를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999: 61). 오늘날 대체로 이러한 견해를 따르긴 하지만 보루의 유형을 분류하는데 있어 규모 이외에 입지조건, 기능 및 성격, 주변 유적과의 상호관계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고려돼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 만큼(서영일 2002: 65) 단순히 규모만 갖고 보루와 성곽을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보루와 성곽의 사전적 의미를 비교해보면 ‘성벽의 有無’가 구분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20) 보루와 성곽을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히 ‘전체적인 규모’의 통계치 보다는 ‘외형과 보루 내부시설의 차이’가 되어야 적절할 것이다. 실제 2007년 추가 발굴 조사된 아차산 4보루 성벽에서 ‘이중 구조의 치’가 확인되었는데(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2007)21) 이러한 구조의 시설은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것으로서 성곽과 보루의 기준을 나누는 중요한 차이점이 될 수 있겠다.
20)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search/List_dic.jsp) 검색 결과(2009. 9. 15일 기준).
성곽의 사전적 의미는 ‘예전에, 적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 담 적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구역’으로서 보루와 외형적인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21)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형태의 시설이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부족하지만 본고에서는 조사단의 견해에 따라 ‘이중 구조의 치’로 명명하겠다(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2007: 18).
- 참고문헌 -
문헌사료
『三國史記』『
三國遺事』『高麗史節要』『朝鮮王朝實錄』『錦溪日記』『民堡議』『民堡輯說』『茶山詩文集』『史記』『漢書』『後漢書』『三國志』『晉書』『宋書』『南齊書』『梁書』『陳書』『魏書』『北齊書』『周書』『南史』
『北史』『隋書』『舊唐書』『新唐書』『舊五代史』『新五代史』『宋史』『遼史』『金史』『元史』『明史』『續資治通鑑長編』
『日本書紀』『続日本紀』『日本後紀』『続日本後紀』『日本文徳天皇実録』『日本三代実録』
논문
白種伍, 1999, 「京畿北部地域 高句麗城郭의 分布와 性格」 『京畿道博物館 年報』3, 京畿道博物館.
서영일, 2002, 「京畿北部地域 高句麗 堡壘 考察」 『文化史學』17, 韓國文化史學會.
崔種澤
, 1995a,「漢江流域 高句麗土器 硏究」, 서울大學校 大學院 考古美術史學科 碩士學位論文.______, 1995b,「漢江流域 高句麗土器 硏究」『韓國考古學報』33, 韓國考古學會.
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 2007,『아차산4보루 성벽 발굴조사』.
관련싸이트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main.jsp)
대한민국합동참모본부(http://www.jcs.mil.kr/main.html)
위키백과(http://en.wikipedia.org/wiki/Main_Page)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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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의 개념에 대해서 한번 싹 정리해봤다. 솔직히 필자도 이렇게 정리하기 전에는 보루라는 개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논문을 준비했었는데 가만 보니깐 먼저 개념 정리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개념 정리부터 하게 되었다. 혹시 보루에 대해서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거나, 추가하거나 고칠 부분이 있으면 조언해 주셨으면 한다.
※ 이 내용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및 학술논문과 관련된 내용으로 연구 및 공부에 참고할 목적 이외의 무단 도용은 왠만하면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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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존에는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를 통해 본 고구려의 군사전략'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는데, 아무래도 제목이 너무 긴 것 같아서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를 '남부전선'이라는 개념으로 통합해 버렸다. 실제 필자의 논문에도 이런 식으로 개념 정리를 하기도 했고 말이다. 앞의 글들도 제목을 모두 바꿨으니 착오 없으시기 바란다.
여휘님의 논문을 보면 고구려의 보루(아차산 등지)는 몽촌토성의 경우와 같은 전진기지로서의 '성채'보다는 규모면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분견대의 임시요새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 보루들이 관방체계로 유기적으로 작동되려면 본부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주변의 중심성채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2편에서 고구려 관방유적을 잠깐 소개한 부분(큰 사진 위 두줄)을 참고하면 양주분지와 한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고 있는 보루들의 母성채는 제대로 발굴이 되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제 생각인데, 아차산 등지의 보루들도 몽촌토성과는 강으로 단절되어 있어서 아차산, 망우산 以西 어딘가에 이 母성채가 있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母성채! 맞습니다. 제 논문의 요지도 그겁니다. 보루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으므로, 절대 보루만으로는 특정 지역의 정치 · 군사 · 행정적인 중심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존에는 보루로 연결된 다소 느슨한 광역관방체계가 남평양(한강 이북에 있다는 분도 있습니다)의 방어체계를 형성했다거나, 보루 중 하나가 남평양으로서 치소였을 것이다라고까지 하는 분도 계십니다. 전 여기에는 절대 반대입니다. 한강 이남에서 母성채, 중심지를 꼽으라면 몽촌토성이 있을 것이며, 한강 북쪽에 그런 것이 있다면 임진강 일대의 호로고루, 당포성과 같은 성을 방어진지로 갖춘 황해도 일대의 성들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즉~
남평양은 황해 어긴가 있을 것으로 보고요. 아차산과 망우산 이서, 즉 현재 확인된 보루군 주변으로 母성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구려가 보루군을 조성한 이유는, 남쪽의 백제, 신라에 대해 황제(형)-제후(동생)의 개념으로 조공-책봉관계에 따른 고구려의 천하관 완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유목국가, 북쪽의 수렵민족에 대해서는 이런 확실한 보루군 유적이 현재 안 보이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가 이들과 똑같이 남부전선에 전략적 중요성을 부여했다면, 절대 보루군만으로 남쪽의 방어체계를 형성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이 제 주장의 큰 요지입니다. 그래서 전 황해도의 남방거점을 임진강 일대의 소성들이 방어
하고, 그보다 남쪽인 한강북안의 보루들은 오히려 방어보다 공격적 · 감시적(?)인 목적으로 전방 깊숙히 조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고구려의 직접 지배범위 밖에 설치한 군진이랄까? 마치 요하 서쪽에 고구려가 조성했다는 무려라처럼요. 그 상황에서 힘이 강해지면 충주의 국원성을 포함해 청원의 남성골산성, 대전의 월평동산성 등 내륙 깊숙히까지 거점을 마련했는데, 이는 중간 거점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그 주변에 대해 고구려가 실효적인 영역확보를 하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전 이것을 당이 한반도 등지에 세운 도독부, 한나라가 세웠던 외역의 군현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게 좀 기존과 다른 견해인만큼 신중하고 있고요
지도교수님의 조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논문 주제는 참으로 탁월합니다. 제 네이버 블로그에 조금 소개한 내용도 있습니다만, 시기적으로도 로마軍의 전진캠프, castra나 limes와 비교하여 보면 더욱 멋질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저도 예전에 로마사, 혹은 전쟁사를 공부하는 지인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의 전진캠프 혹은 야전병영에 대해서 관련 자료를 조금씩 얻어서 논문에 참고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영어가 짧은 터라 주로 국내자료나 중-일 자료를 더 보게 되더라고요(아! 물론 중국어, 일본어에 강하다는 건 아닙니다. -.-;) 암튼 좋은 주제라고 하니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안 그래도 지도교수님 석-박사논문 주제인데다가 교수님이 이 분야에서는 국내외 최고 전문가이신데, 저랑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저 이 논문 쓰면서 참...그만 둬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다행이 교수님께서 어느 정도 생각이 다른 저와 타협
점(?)을 찾아주셔서 이 논문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 어느 부분이 다른지는 아마 차차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ㅋ 그나저나 고고학적으로 전략, 전술, 군사사상, 천하관 등의 아주아주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증명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것에 대해 지금도 계속 고민 중입니다. 박사논문에는 이런 것들이 더 잘 반영되어 있어야 하는데, 국내에는 아직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나 연구가 없어 보여서 말이죠. 암튼 이건 좀 더 정리해서 까페에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계속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댓글 폭탄이 떨어져서 깜짝 놀랐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