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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을 이식하여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내용의 헐리웃 상업 영화!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니 꼭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내용이 매우 재미있고 배우들과 구성이 탄탄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실 수 있습니다.
베리칩의 현실과 발전 방향을 정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제목 :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The Manchurian Candidate / 뜻 : 꼭두각시, 세뇌당한 사람)
주연 : 메릴 스트립, 덴젤 워싱턴 주연
제작: 미국 파라마운트 영화사에서 2005.7월 제작
내용: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몸에 칩을 이식하고 그들의 생각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세뇌하여
결국에는 미국 정치지도자로 까지 만들어 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
영화 예고편보기 :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9345#02
잠시만 기다리시면 나옵니다....
미국은 어떻게 냉전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나?
지옥의 현대 묵시록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필름 2.0 2005-03-14 19:30] | ||
공포의 얼굴이 바뀐 현대 묵시록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한 편의 현대 묵시록이다. 여기선 냉전이 종식되고 적을 잃어버린 미국 사회의 불안과 공포가 베일을 벗는다. 조나단 드미는 9.11 테러 세대의 정신적 외상과 전쟁을 통한 영웅 찾기에 혈안이 된 미국 사회, 전장에서 풍기는 피 내음의 부산물로 탐욕스럽게 배를 채우는 기업들의 음모를 촘촘한 드라마로 엮는다. 과연 서슬퍼런 냉전 시대 보다 지금이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전쟁을 통해 평화가 왔다'고 주장하는 건 부시 뿐이다. 테러의 공포가 상존하는 미국이 전쟁으로 인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선거전을 물들이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환상과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빈부 격차, 고질화된 경제난,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안보 불안 등은 미국인들의 적이다. 하지만 진짜 적은 미국 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고혈을 빨아 이윤을 추구하는 군사 자본과 미디어 권력이 시민들에게 주입하는 ‘조장된 공포’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현 미국의 패권주의가 정치적 파시즘이 아닌 경제적 파시즘으로 변질됐음을 보여준다. 강력한 미국의 꿈을 신앙처럼 숭배하는 광신적 정치인들의 속셈은 그들과 손잡은 맨츄리안 글로벌이 가져다 줄 반사 이익과 긴밀히 연결된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미 전역을 마녀 사냥으로 몰아갔던 매카시즘의 악몽, 인종주의, 힘 센 여성에 대한 공포 등 대중들의 무의식을 잠식한 다양한 공포의 표정을 보여줬던 62년작에 비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냉전은 시효가 끝났으며 여성주의 역시 더 이상 신선한 이슈가 아니다. 대신 하나의 이익을 위해 단결한 각 분야의 악인들이 심판대에 오른다. 사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가 개봉했을 때 즉각적으로 도마에 오른 것은 엔론 스캔들 보다 부시의 파트너인 부통령 딕 체이니였다. 클린턴 정부 시절 체이니가 회장으로 있었던 거대 석유 회사 핼리버튼과 이라크 전쟁의 연관성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핼리버튼은 걸프전에서 이라크가 쿠웨이트 유전을 박살내자 그 재건을 도맡았으며 현재 진행중인 이라크전에 필요한 유류을 공급하면서 회계 부정을 저질렀고 전 세계 미군을 상대로 공사나 군납업을 벌였다. 영화 속에서 맨츄리안 글로벌이라는 가상의 군사 산업 복합체로 대표되는 극악한 비밀 집단은 현대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악의 축, 즉 미국의 에너지 제국주의에 앞장서는 글로벌 기업들의 심장을 겨냥한다.
우상 파괴주의자의 경고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가 공개됐을 때의 첫 반응은 충격과 의심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람들은 기억을 조작하는 무시무시한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고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선 의심했다. 과연 영화 속에서 묘사된 것들은 사실인가? 드미는 "수상한 일들이 많다. 요즘 신문들을 보면 이보다 더한 일이 버젓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는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억 조작과 심리 통제를 묘사하는데 있어 과학적 진실성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오리지널 영화의 초현실주의적인 색채를 배제한 것이나 몸 속에 의식을 통제하는 칩을 내장한다는 설정(덕분에 인간이 로봇처럼 보이기도 한다), 난데없이 마르코를 돕는 과학자(<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 브루노 간츠가 분했다)가 등장해 칩의 성분을 분석하는 설정 따위는 이런 맥락에서 들어갔다. 비대해진 비즈니스 집단은 더욱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엔론이나 핼리버튼, 미국의 군사 방위 업체들이 합작한 놀라운 사기극은 기가 차지도 않는다. 뿐인가. 에너지 전쟁 홍보에 광분하는 미디어는 하루 종일 국민들의 뇌 세척과 세뇌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미디어는 전쟁의 환상을 조장하고 미국인들은 물샐 틈 없이 돌아가는 감시 시스템과 더불어 살고 있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분열증적인 지도 그리기를 시도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 중 하나는 레이몬드 쇼의 어머니 엘리너 쇼의 역할이다. 엘리너는 아들을 최고 권력자에 올려놓으려는 야심찬 여성 상원의원으로 그려진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과 어머니의 품을 벗어날 수 없는 아들의 오이디푸스적인 관계는 '패밀리 비즈니스'(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엘리너에게 ‘힐러리 클린턴’을, 에드워드에게 '부시'를 대입시킨 건 무리가 아니었다)의 특성을 띤 미국 정치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권력욕과 야심, 강박증을 오가다 아들에 대한 삐뚫어진 애정을 폭발시키는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소름이 끼친다. 비정상적인 모성애와 방종한 야망에 들뜬 그녀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잔인한 군주지만 더 이상 뒷전에서 배후조종만 하지 않고 전면에 나선다. 결정적인 순간 근친상간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는 쇼 모자의 모습은 영역을 넓히기 위해 반인륜적 단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추악한 권력의 속성을 통렬하게 꼬집고 있다.
당신의 뇌는 안녕하신가?
인간 정신의 근본에 대한 이 같은 회의는 자본주의 세계 시스템 속에서 마냥 부정할 수만은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이미지 조작의 모티프를 강화하기 위해 드미는 하이퍼 리얼리즘과 역동적인 악몽의 스타일로 화면을 구성한다. 콘트래스트가 강한 흑백 화면이 인상적이었던 프랑켄하이머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가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1964)나 시드니 루멧의 <페일 세이프>(1964) 같은 당대에 유행한 초현실적 블랙 코미디의 색채를 띠고 있었다면 드미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장르의 틀을 빌어 노골적으로 정치적 이슈를 다룬 60-70년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영향력 아래 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다룬 알란 J. 파큘라의 <대통령의 음모>,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컨버세이션>, 시드니 루멧의 <네트워크> 등, 정통 정치 스릴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드미의 파트너인 촬영감독 탁 후지모토는 불길한 사선 앵글과 빈번한 클로즈업을 주조로 한 박진감 넘치는 촬영으로 60-70년대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생동하는 기운을 되살린다.
조나단 드미가 이렇게 제 색깔을 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뇌세척'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음모 이론' 등 몇 가지 모티프를 제외하고 주제, 장르, 그리고 구조의 측면에서 프랑켄하이머의 원작을 따르지 않는다. 오리지널에서 취한 건 주인공들의 이름 뿐이다. 차라리 그것은 드미에게 유명세를 안겨 준 스릴러 걸작 <양들의 침묵>을 연상케 한다. 고금을 통틀어 할리우드에서 스릴러는 '반성의 장르'였다. 민주주의로 치장한 미국 정치판의 혼탁상을 그린 <컨텐더>, 냉전적 사고를 벗지 못한 우둔한 미국을 슬쩍 비꼰 <썸 오브 올 피어스>, 동서 대결 시대 악행의 표상인 전직 CIA 요원의 참회록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 등이 꾸준히 그 명맥을 이었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할리우드 반성적 정치 스릴러 계보의 최신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양들의 침묵> 이후 갈 짓자 행보를 걸었던 조나단 드미가 자신의 스타일로 귀환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작품이다. 저예산 인디 영화의 거물인 로저 코만의 졸업생이었던 드미는 장르적 질료를 가공하는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며 그 틀 안에서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 같은 직관적이고 뉘앙스가 풍부한 걸작을 만들어왔다. 그 사이 누벨 바그의 스타일을 잠시 흉내낸 <찰리의 진실>이 있었지만,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를 통해 비로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장르적 쾌감 속에 용해시키는 본래의 감을 찾은 듯이 보인다.
코드화된 기억을 극복하기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는 자유의지를 속박하려는 음모적 집단과 인간 본연의 의지로 억압의 상황을 돌파하려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으로 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조나단 드미가 미스터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주목할만하다. 드미는 관객의 기대를 방해하면서 관객을 정치적 해석으로 유도한다. 영화를 본 미국인들이 엔론과 딕 체이니, 핼리버튼, 부시를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무의식적 연상 작용 때문이다. 나치를 연상시키는 맨츄리안 글로벌들의 세뇌 기술자들처럼 드미는 이미지의 연상 작용을 적절히 활용한다. 드미는 실제와 조작된 기억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가도록 만든다. 이미지의 반복 재생이 영상을 흐려지게 만들 듯이 이미지 코드의 반복은 조작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내기 때문이다. 마르코의 소대원들이 정찰을 나가기 전 탱크 안에서의 소란스럽게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도입부는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이식된 기억인가? 실제라면 어디까지가 실제고 조작이라면 어디서부터가 조작인가? 미수로 그친 전당대회 암살 장면에서 마르코 소령은 세뇌당했는가 그렇지 않은가?(그는 친구인 델프 박사의 도움으로 어깨 속에 박혀 있는 기억 조작 칩을 이미 빼낸 상태다) 드미는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실과 이식된 기억 사이의 간극을 만들고 그 간극을 관객 스스로 메꾸기 시작했을 때 세계의 거대한 실체가 드러나도록 구조화돼 있다.
조나단 드미는 40년 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이 더 이상 국가의 감시와 통제, 처벌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전에는 위성을 통해 소련인들을 감청하던 국가안보위원회(NSA)가 지금은 미국인들의 인터넷 항해를 감시한다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다. 더욱 소름끼치는 건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건 사상범이나 테러리스트(?)의 체제 전복 활동만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뇌라는 사실이다. 메릴 스트립의 말처럼 "몽매한 미국인들을 겁주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지만 정치 권력과 결탁하려는 자본의 속성이 세계 어느 곳보다 성행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건 귀담아 들을만한 얘기다. <맨츄리안 켄디데이트>를 본 미국인들은 세뇌를 통한 완강한 기억 조작 시스템에 의해 자신들의 일상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포에 떨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욱 오싹한 것은 그들이 자고 나면 이 끔찍한 진실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오리지널에 얽힌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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