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전쟁영웅이 된 잭슨은 1817년에도 조지아 주에서 세미놀족과 크리크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세미놀 전쟁’의 지휘를 맡아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인디언의 마을을 불사르고 밭을 망쳐 먹고 살 길을 끊었다. 뿐만 아니라 인디언들의 배후에 스페인이 있음을 안 그는 스페인령이던 플로리다에 침공하여 스페인 총독을 자리에서 밀어냈다. 이 독단적 행동으로 스페인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은 잭슨을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플로리다를 스페인 땅으로 남겨두는 한 후환을 막을 수 없다는 잭슨의 설득에 따라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거꾸로 스페인을 압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리하여 1821년에 플로리다는 스페인에게서 미국으로 할양되었고, 잭슨은 그곳에서 10개월 동안 군정총독을 맡아 새로 획득한 땅을 다스렸다.
백악관으로 가는 진흙탕길
이런 그에게는 언제부터인지 “올드 히코리(Old Hickory)”라는 별명이 생겼는데, 히코리나무처럼 단단하고 굽힘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올드 히코리는 1823년에 다시 상원의원이 되었고, 영웅의 명성에 기대어 바야흐로 백악관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를 기피하던 민주공화당의 간부들은 당시는 간부들끼리의 당대회를 일컬었던 코커스(caucus)에서 재무장관이던 윌리엄 크로퍼드를 대선후보로 선출했다. 하지만 잭슨은 이를 “국민의 뜻과 평당원들의 뜻을 무시하는 당간부들의 독단”이라며 불복했고, 다수의 평당원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의 “전당대회”가 열리고 여기서 잭슨이 후보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이로써 민주공화당은 붕괴했으며, 잭슨을 지지하던 세력은 나중에 오늘날의 민주당이 된다. 아무튼 선거는 잭슨, 크로퍼드, 그리고 존 퀸시 애덤스와 헨리 클레이가 정당이 아닌 지역 지지기반을 가지고 난타전을 벌이는 양상이 되었다.
선거 결과 잭슨이 다수표를 얻었으나, 과반수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당시의 규정에 따라 연방 하원에서의 투표로 대통령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크로퍼드가 애덤스를 밀어줌에 따라 그가 제6대 대통령으로 뽑힌다. 잭슨은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분격했으며, 이를 계기로 “선거와 정당제도가 좀 더 대중과 가깝게 바뀌어야 한다. 엘리트들의 농간에 놀아날 여지를 없애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게 되었다.
1828년, 다시 찾아온 대선에서 잭슨은 서부의 유명 정치인 존 캘훈, 북부에서 주목받던 마틴 밴 뷰런 등과 힘을 합치고, 재선을 노리는 존 퀸시 애덤스와 다시 격돌했다. 이 선거는 미국 역사상 유례없이 인신공격과 흑색선전이 판치는 선거가 되었다. 애덤스 진영은 잭슨의 결혼 과정에서의 문제를 끄집어냈을 뿐 아니라 그가 노예들을 학대하고 인디언들을 불필요하게 학살했으며, “미국인 병사들까지 잔인하게 죽였다”고 주장했다. 미-영 전쟁 당시 탈영병 6명을 처형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또한 잭슨의 아버지는 흑인의 피가 섞였고, 어머니는 매춘부였다는 사실무근의 소문까지 흘렸으며, 학력이 변변치 못했던 잭슨을 비아냥대려고 “잭애스(Jackass)”라는 별명을 지어 퍼뜨렸다. 그런데 ‘수컷 당나귀’와 ‘멍청한 촌놈’을 모두 뜻하는 이 별명을 잭슨 스스로가 무척 마음에 들어해서, 나중에 민주당의 상징이 당나귀가 되도록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추잡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애덤스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마침내 백악관에 입성했다.
‘잭슨 민주주의’
제7대 대통령이 된 잭슨은 사상 처음으로 백악관에서 취임 기념 파티를 열고, 서부에서 축하해주러 온 카우보이들과 워싱턴의 빈민들도 마음대로 참석하도록 했다. 왁자하게 먹고 마시며 춤추는 분위기 속에 백악관 앞뜰은 온통 쓰레기와 오물로 어지럽혀졌다. 이는 “체신머리 없는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비난거리를 만들었지만, 잭슨의 시대가 미국 평민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시대가 되리라는 신호탄과 같은 이벤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