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푸른아카를 찾아주시고 <헬Hell 조선에서 게임을 읽다!>에 대한 꾸준하고 훌륭한(!) 리뷰를 올려주시는 이영진 선생님의 글입니다.
인용을 허락해주신 이영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
#1.
벌써 네 번째인 이번 헬조선 강의(...?)에서는 게임과 문학에 대해서 다루었다. 첫 시간에는 게임 플레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두 번째 시간에서는 게임 플레이에 기반한 사회구조적 접근을, 세 번째 시간에서는 게임 플레이가 지닌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에 대해서 모색하였는데 이번 네 번째 시간에서는 뜬금없이 게임과 문학이란 주제로 강의가 이루어졌다.
게임에서의 문학 혹은 서사학에 대한 논의는 사실 관련 전공자나 예술가가 아닌 이상 관심을 갖기가 힘든 소재다. 왜냐면 게이머가 자신을 보통 독자나 작가로 여기지 않기 때문. 이는 게임 개발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그나마 스토리 디자인 작가라면 모를까). 그래서인지 이번 강의에서는 기존 문제제기를 비틀어 ‘표현으로서의 게임’을 논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게이머는 단순히 게임을 재밌게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 게임 플레이를 넘어서, 게임 플레이의 특정한 양상(혹은 양식)을 논하고자 한 이번 강의에서는 게임 너머의 무언가를 사유하고자한 시도가 돋보였다. 그래서인지 강의 중간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은 게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는 점을 강조하셨던 것 같다. <마인크래프트> 게임을 샌드박스 게임(사용자가 가상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구성 요소들을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게임 디자인의 한 유형)으로 보고 게임 속에 이뤄지는 놀이들을 메타언어의 표현 수단으로서 분석한 것은 특정 게임에서 이뤄지는 특수한 플레이 양상을 표현 양식으로 바라보고자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강의의 진행 방향이 게임을 이용한 표현이 기성 미디어의 형태로 나타난 ‘머시니아(machinina)’로 이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것 같다. <심즈>의 사례를 통해 게이머가 만든 유저 모드와 각종 패치(or 스킨)의 사례를 보여준 것도 이의 연장선상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질문은 ‘표현 수단으로서의 게임은 가능한가?’는 화두로 응결되었는데 토론 시간에는 정작 이 질문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표현 수단’이 가능하기 위한 톱니바퀴 하나가 빠져서 이 화두의 불씨가 커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표현 수단으로서의 게임은 가능한가?’는 화두는 ‘게임의 일반 문법’을 선구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면 이야기하기가 힘들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나오기 전까지 문학 비평이나 작가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처럼. 일견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명작 게임의 법칙’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논의가 전개되지 않고서는, 게임에 대한 비평이 자연스럽게 나오기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법칙이 맞든 틀리든, 일단 처음 제시된 테제를 두고서라도 이야기가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지점에서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게임’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다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단순히 탁상에서 벌어지는 귀납의 결과가 아니라 그 정당한 이름을 되찾는 정명(正名) 운동이 되어야 한다. 윤리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제시해야 한다. 게임에 대한 정의가 게임에 대한 올바른 디자인에 대한 모색이면서 게임 플레이에 대한 올바른 유형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게임은 본래의 즐거움이 지닌 긍정적 요소는 사라지고 상품화의 극단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3.
강의 후반부에 나온 ‘놀이노동’에 대한 화두는 이러한 비인간화된 게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초기 온라인 RPG게임에서 일어나는 레벨업&아이템 노가다, 전략&액션 게임에서 나타나는 게이머 평균 실력의 상향평준화 등은 ‘놀이노동’의 서막이자 ‘유희 자본’의 시초 축적이 일어나는 형태라고 볼 수도 있겠다.) ‘놀이노동’이라는 용어는 맑스가 추구하고자 하였던 ‘놀이가 노동이 되고 노동이 놀이가 되는’ 공산주의의 이상향을 깡그리 부수어버린다.
그런데 게임 플레이는 어떻게 ‘놀이노동’으로 변질되어버렸을까? 놀이노동, (2강에서 신현우 선생님이 말한 표현을 빌리면) 이른바 ‘소외된 유희’는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 것일까? 철저히 게임 상품의 판매자 혹은 게임 시장의 자본 증식에 봉사하는 것이다. 게임의 역사 초기에 게임은 소프트웨어만이 상품화되어 있었다. 게임 플레이 자체는 자본주의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던 셈. 그러나 게임의 소프트웨어로서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가자 상품화는 게임 플레이 방식으로까지 침투하였다.
그것은 플레이 시간이 될 수도 있고, 게임 내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게임 내 상품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게임 플레이에 지장이 가도록 짜여진 게임 디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멀티 플레이를 구현하는 초기 온라인 게임의 경우 이를 구현할 서버 이용이 상품이 되어버린 바가 있다.
나아가 각종 소셜 게임에서 벌어지는 유사 바이럴 마케팅 기법은 기술적으로는 서버의 운영 부담을 클라이언트에 불과한 개별 게이머의 기기에 전가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사실 서버와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는 상대적이긴 하다) 게임 플레이 자체가 하나의 게임 운영이 된 셈인데 이때 요금은 이러한 게임 운영의 부담을 지워주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소셜 게임에서 연결이 이뤄진 건 인간이 아니라 기기이다. 개별 클라이언트에 기생하여 상대적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이 방식은 게임 플레이라는 외형에 가려져 있다. 게임 운영의 막중한 업무를 띤 모바일 기기는 그 집사에게 게임의 지속적인 운영을 보채는 푸시 알림을 시도 때도 없이 날린다.
#4.
이 지점에서 다시 하위징아의 문제제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위징아는 놀이가 하나의 사회적 활동이자 문화 현상으로, 문화는 놀이 형식에서 발생하며 문화는 애초에 놀아지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게임 플레이가 아직 상품화되기 전의 상황에서, 게이머들이 게임 소프트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즐겼는가를 살펴보는 데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잡아야 한다. PC통신 시절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BBS 커뮤니티는 컴퓨터 동호회와 게임 동호회였다. 아케이드나 가정용 게임기를 구동할 수 있는 에뮬레이터 기술 또한 이 시절에 발전하였다. 초기의 컴퓨터 유저들이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모두에게 공유하였듯이, 이 초창기의 PC 게이머들은 자신이 구동하는 게임이나 혹은 구동법, 공략법 등을 네트워크를 통해 교류하였다.
PC통신에서 웹으로 인터넷 서비스가 점차 대체되어가던 시절, 일부 게임 동호회가 웹 페이지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이트는 특정 게임에 대해서만, 다른 사이트는 여러 게임을 다루는 개인 홈페이지였지만 점차 규모가 커져가면서 고유의 인터넷 커뮤니티로 발전하였다. 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로 선정된 ‘부흥’은 초창기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임진록2+조선의반격’ 게임 길드였다. 초창기 루리웹은 PC통신 게임 동호회에서 외면 받던 비디오 게임 전문 리뷰 사이트였지만 지금은 포털사이트 급으로 성장한 대규모 인터넷 커뮤니티다. 지금도 각종 유명 게임 전문 동호회 사이트를 보면 개인 홈페이지와 포털 사이트의 중간 즈음에 해당하는 규모의 구조로 운영이 되고 있다.
게임의 사회적 플레이, 즉 메타언어이자 표현 수단으로서의 게임 플레이는 사실상 이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게임 공략과 리뷰(수기)는 게임을 통한 표현 방식의 시초 형태라 볼 수 있다. 나아가 게이머들은 이곳에서 소설, 만화 등의 2차 창작을 하기 시작하였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부분적으로 게임 소프트를 직접 뜯어 커스터마이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대표적으로 외국 게임의 한글화 작업). 오스카 에이지가 말한 ‘이야기 소비’와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이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머시니아’급의 미디어 작품은 이러한 환경에서 예외적으로, 우연적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머시니아는 이러한 온라인 플레이 문화의 예외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KOF 온라인 커뮤니티인 ‘베틀페이지’에서는 유머게시판 등 각종 게시판에서 이뤄지는 커뮤니티 활동이 분화되어가면서 이른바 ‘배페 설명서’라는 것이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디시인사이드에서는 ‘합필갤’의 각종 플래시 영상이,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 커뮤니티에서는 여러 가지 창의적인 유즈맵을 만들고 공유하며 즐겼다. AOS 장르 게임의 시초인 ‘도타’와 ‘카오스’도 이 공간에서 나왔다. 게임이 게임을 만든 순간이다.
게이머의 자유도가 높아진 게임이 속속들이 등장하면서 게임을 통한 표현 양식도 발전하였다. 그런데 그 발전의 바탕에는 이러한 게임의 메타 플레이가 이루어진 사이버스페이스 공간이 있어 왔다.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놀이는 단순히 게임 하나만 가지고 노는 수준 이상의 무언가로 봐야한다. ‘표현 수단으로서의 게임’이란 시각은 오히려 광대하게 이뤄지는 사회적 유희를 바라보는 데 제약이 될 수도 있다.
#5.
그러나 SNS가 등장하고 웹 사이트가 점점 SNS 환경처럼 변화하면서 사이버 스페이스는 점점 비공간(non-place)화 되어갔다. 포털급으로 성장한 각종 웹사이트들은 커뮤니티의 자생성을 목표로 하면서 폐쇄성을 강화해나갔다. 어떤 경우는 가입 활동하는 행위가 엄격한 심사에 걸쳐 이뤄지며, 다른 경우는 새로이 진입한 유저들이 사이트의 활동 규칙을 ‘욕 먹어 가면서’ 배운다. 이러한 공간에서 질린 사람들은, 새로이 신문물을 접한 사람들과 함께 SNS라는 공간으로 신체를 피신하였다. 이곳에서의 놀이는 철저히 자신의 지속적인 노출 형태로 이뤄진다. SNS는 모바일 기기를 기반으로 한 웹 커뮤니티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바일 게임을 기반으로 게이머들의 자생적인 커뮤니티 발전이 가능할까? 적어도 내가 찾아본 거 내에서는 모바일 게임은 각종 공략과 정보를 공유하는 ‘포럼’만 존재하지 ‘커뮤니티’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공략과 정보도 효율적인 게임 플레이 위주로 획일화되어 있다. 2000년대의 사람들은 웹에서 PC나 콘솔 게임 공략을 직접 작성하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하였지만 2010년대 모바일 게임 유저에게서 이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이러한 척박한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도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게임을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심해의 열수구 근처에서도 생명체가 살아가듯이, 상품의 직접으로 숨막히는 공간 속에서도 그 빈틈 속으로 유희에 기반한 생활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기대하며 오늘의 강의 리뷰를 마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