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역사 (위키백과)
타이완의 역사(臺灣의 歷史)가 문헌상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624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타이완 섬(臺灣島)에
진출하여 점거하면서 부터이다.
물론, 그 이전 시기에도 타이완 원주민들이 정주, 생활하여 왔다.
다만, 한족(漢族)이 본격적으로 타이완에 이주한 것은 유럽인들이 타이완 섬을 점거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이전까지 타이완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原主民)들의 섬이었다.
따라서, 타이완의 역사는 크게 16세기 이전 시기, 네덜란드 식민지 시기, 정씨 왕조 시기, 청나라 시기,
일본제국 식민지 시기, 중화민국 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차
1 대두 왕국
2 네덜란드 시대
3 정씨왕국
4 청조 시대
5 일본 통치 시대
6 중화민국 시대 6.1 1945년 ~ 1995년
6.2 1996년 ~ 현재
타이완은 구석기시대 말기(5만년전 ~ 1만년전)에 이미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거주하였다는 증거는 명확한 편인데, 이 시대의 유물들은 말레이계 원주민이
남긴 것으로 보는게 정설이다.
진수가 지은 《삼국지》에서 오나라가 종종 이주(夷洲)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고, 《수서》에는 "유구국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젠안(建安)군(현재의 푸젠성)의 동쪽이며, 배로
5일을 가야 이른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중국측 학자들은 이를 대륙과 타이완 사이의 교류
증거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주(夷洲)나 류구국(流求國)이 타이완을 지칭하는지 확실치 않고 《수서》의
류구국(流求國)은 류구국(琉球國,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 현)으로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1360년 원(元)나라는 펑후 제도(澎湖諸島)에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푸젠(福建)의
취안저우(泉州)에 예속시켜 통치하였다.
이것이 타이완 지역(타이완 섬 서쪽의 "펑후 제도"에 한정된 것임)이 중국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최초의 기록이다.
1590년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 섬에 내렸지만,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 때, 포루투갈 선원들이 초록으로 덮인 타이완 섬을 보고 "포르투갈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이란 뜻)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타이완 섬을 "포르모사"라고 부르곤 한다.
16세기까지 타이완 섬에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原主民)들이 섬 전역에 널리 분포하여
거주하였으며, 한족 이주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명나라(明代) 말부터 유럽 상인들이 앞다투어 타이완으로 찾아 들어오면서
한족(漢族)들의 타이완 이주도 시작되었다.
대두 왕국
대두 왕국(중국어 간체: 大肚王国)은 평포족(平埔族) 중 파포라족(巴布拉族), 바브자족(貓霧捒族),
파제흐족(巴則海族), 호아냐족(洪雅族)이 16세기 중엽(1540년대)에 세운 과족군집왕국(跨族群準王國)으로
모든 부락의 대표로써 대두번왕(大肚番王)을 선출했다.
이 부족연맹의 국가는 청나라 옹정제까지 이어가다 1732년에 사라지게 된다.
네덜란드 시대 (Timeline of Taiwan History zh-hans.png)
1624년 펑후 제도를 점거하던 네덜란드 상인과 명나라 군대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펑후 제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타이완 섬의 서남부(현재의 타이난 시 일대)에 상업지구를 건립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1625년 네덜란드인들은 질란디아 성(熱蘭遮城, 열란차성. 현재의 타이난 시 안핑 구)을 세워
통치기구를 두고, 쌀과 설탕 등의 플랜테이션 경작을 위해 중국 푸젠 성 해안 일대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타이완의 토지 개간을 위한 모집을 실시했다.
이 때부터 한족들이 타이완 섬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626년에는 에스파냐인들이 타이완 섬에 들어와 1642년까지 타이완 섬 북부의 지룽(鸡笼)과
서랴오섬(社寮島, 사료도) 일대를 차지하고, 산살바도르 성을 세웠다.
에스파냐는 이후에 점령지를 하쯔난(蛤仔難, 합자난. 현재의 이란 현), 후웨이(현재의 신베이 시 단수이 구)까지
넓혔고 이 지역에 산토도밍고 성을 세웠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타이완 섬에 진출한 네덜란드 세력과 에스파냐 세력 사이의 경쟁과 알력은
피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인들은 1642년 에스파냐의 타이완 내 점령지를 공격하여 빼앗고 에스파냐인들을 타이완
밖으로 몰아냈다.
네덜란드가 타이완 섬을 점령해 식민지배한 목적은 중국,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우세를 점하고,
타이완을 거점으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동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타이완 섬 통치는 1662년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38년간 이어졌다.
정씨왕국
정씨왕국은 1662년 남명 건평 때 정성공(중국어 간체: 郑成功, 정체: 鄭成功)의 군대가 타이완에서
네덜란드의 군대를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1644년, 명(明)나라가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였지만, 명나라 황제의 유신(遺臣)들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를 내걸고 청나라에 대한 저항(反攻)을 계속하였다.
정성공은 그 지도자 중 하나였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타이완 해협에서 무역업과 해적 행위로 큰
돈을 번 해상 모험가였는데,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사를 하면서 일본의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정성공이다.
정성공은 청나라 군대와 9개월간의 싸움 끝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타이완으로 쫓기게 되었다.
1661년 정성공은 타이완 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여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타이완 섬에서의 철수와 타이완 섬의 모든 권리 이양을 약속받은 정성공은 타이완 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성공은 타이완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 东都, 정체: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타이완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온 푸젠 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어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662년 6월 23일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자, 그의 아들 정경이 그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64년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고, 정성공의 반청(反清)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復明) 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三藩之亂)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 성의 일부 지역을 공격하여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타이완 통치는 21년 만인 1683년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타이완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청조 시대
청(淸)나라는 타이완을 복속시킨 후 푸젠 성(福建省)의 관할 아래 두었다.
청나라의 병합 이후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이주하는 한족(漢族)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 대부분은 타이완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푸젠 성(福建省) 남부와 광둥 성(廣東省) 동부 출신이었다.
청 정부는 공식적으로 대만 이민을 금지했으나, 실효성이 없어 1732년 이민 제한을 해제하였다.
현재 타이완 주민의 약 85%를 차지하는 한족계 본성인(漢族系本省人)은 대부분 이 시기에 타이완에 이주한
한족의 후손들로, 오늘날에도 해당 지역의 방언인 민남어(閩南語) 또는 객가어(客家語)를 일상생활에서 사용된다.
또, 청조 시대의 이민 초기에는 여성의 도항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남녀비가 치우쳐 한족과 평포족(平埔族) 간의
통혼이 빈번히 이루어졌고 청의 관청에서는 조직적으로 대만 원주민에게 성씨나 가계도, 족보 등을 주어
한화(漢化)를 권장함으로써, 섬의 평지에 한족들과 섞여 살던 평포족은 한족과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高山族)과는 달리 평포족은 대만 원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타이완은 주로 농업과 무역으로 발전했으며, 1858년 청나라가 제2차 아편 전쟁에 패하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됨으로써 타이완에서도 타이난의 안핑 항(安平港)과 지룽 항(基隆港)이 개항되었다.
1874년 일제에 의해 모란사 사건(牡丹社事件)이 일어났고, 청불 전쟁(1884 - 1885)시기에는 프랑스 함대가
타이완 북부의 공략을 꾀했다. 이에 청나라는 타이완 방위를 위해 류명전(劉銘傳)을 파견했다.
1885년 종래 푸젠 성에 속하고 있던 타이완이 타이완 성(臺灣省)으로 승격되어 1887년 시행에 들어갔는데,
류명전은 초대(初代) 타이완 순무(臺灣巡撫, 지방장관)가 되어 타이완 전역의 실효 지배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충분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고 타이완은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 통치 시대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으로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는 일제(日帝)에 할양되었다.
일제는 타이완에 총독부(臺灣總督府)를 설치하고 50년간 타이완 주민들을 식민지배했다.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 타이완에 대하여 일본 본토(內地)와는 다른 식민지법(植民地法)을 적용하다가
1922년부터는 식민지에 대해서도 일본과 같은 법제도를 적용하면서 동화정책을 폈다.
이러한 동화정책은 법제도(法制度)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식민지의 "일본화(日本化)"를 꾀하는
정책이었다.
1936년 2·26 사건 이후 일제는 총력전 체제화(總力戰體制化)[5]를 진행하였고 타이완 총독부 역시
이른바 황민화 정책(皇民化政策)에 따른 동화정책을 강화하여 타이완 내에서 중국어 신문을 금지하고
타이완사람들에 대하여 일본어 사용과 창씨 개명을 강요했다.
또 일제 육군과 해군에 대한 지원병 제도를 도입해 타이완 주민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일제는 식민지배과정에서 타이완의 철도나 도로 등 기반시설과 교육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러한 일제의 타이완 개발은 궁극적으로는 타이완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고
타이완을 류큐(오키나와 현)와 같이 일본의 완전한 일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제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정책의 영향과 잔재는 오늘날에도 타이완에 많이 남아 있다.
타이완 주민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맞서 지속적으로 항일 민족운동(抗日民族運動)을
전개하였다.
특히 1895년에는 타이완 민주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등 식민지배 초기에는 일제에 대한 조직적
무장투쟁에 나섰으나, 1915년 타파니 사건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항일 무장투쟁은 약화되었다.
1930년에는 타이완 섬 중부에서 원주민족인 아타얄족(泰雅族)에 의한 항일 봉기(抗日蜂起; 우셔 사건)가
발생했다.
중화민국 시대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1945년 10월 25일 타이완 섬(臺灣島)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는 50년 만에
중화민국(中華民國)으로 반환되어 현재까지 통치되고 있다.
1949년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화민국에 대한 권리 일체를 주장하고 있다.
1945년 ~ 1995년
타이완을 수복하고 통치하기 위해 파견된 중화민국 정부의 관료와 병사들은 타이완 주민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들을 보여 이들에 대한 주민들의 실망은 무척 커졌다.
타이완 주민의 이러한 불만은 1947년 2월 28일의 항거(2·28 사건)를 통해 폭발하게 된다. 봉기로 인해
중화민국 관료들은 주민들을 상대로는 협상을 할 것처럼 시간을 벌면서 뒤로는 장제스에게 본토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3월 8일 본토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타이완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성인(本省人) 약 3만여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이 사건은 타이완
본성인(本省人)과 1945년 이후부터 타이완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외성인(外省人) 사이에 깊은 앙금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타이완 성 계엄령의 원인이기도 하다.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밀려 난징에 있던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하였고(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의 실효 통치 지역은 사실상 타이완 지구로 축소되었다.
1996년 ~ 현재
1996년 3월 23일 국민의 직접선거로 총통을 선출하도록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타이완은 중국 국민당 일당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시대를 열었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민주진보당(民主進歩黨)의 천수이볜이 총통에 선출됨으로써 정권교체를 이루기도 하였다.
2008년 이후 다시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가 당선되어 총통에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