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 교수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광해군이 <혼군>임을 입증하는 책이다. 이 책은 치밀한 사료 검토 후에 쓰여진 글이므로 이에 대한 반박도 일반 대중에게 영합하는 내용이 아닌 사료에 의한 비판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폭군 또는 혼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나름 피끓는 의기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함부로 극우니 식민사학 옹호자라고 매도해서는 안되고 서로 간에 토론의 대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광해군의 중립외교라고 처음으로 칭찬한 사람은 대표적인 일제 식민 사학자인 이나바 이와키치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조선을 비판하기 위해서 광해를 옹호하여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쫓은 조선은 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논거를 이끌어 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 인조반정 후에 쓰여진 <광해군일기>는 승자의 기록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관의 사초와 각종 공문서를 추려서 초고를 만드는데 초초-중초-정초의 순서로 진행되고 활자로 인쇄한 후에는 중초본을 세초하므로 간행된 자료만 보게 된다. 그런데 <광해군일기>는 중초본과 정초본이 다 남아 있어서 간행된 자료와 비교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펴보면 <광해군일기>의 기본 사료는 인조반정이후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광해군 재위 당시 기록이 95%이상이다. 따라서 <광해군일기>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의심하지 않아도 될 믿을만한 사료이다.
2. 대동법을 최초로 시행한 것은 광해군의 불후의 업적이라는 시각에 대해서 오항녕 교수는 오히려 광해군은 대동법의 시행을 사사건건 방해했다고 했다. 광해군은 대동법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수시로 표명했고, 방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북의 기자헌을 총애하여 좌의정으로 삼아 대동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한 이원익이나 강력하게 추진하던 호조판서 황신을 내쫓은 것도 광해군이었다. 최초 시행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 개선이 문제인데 이를 방해한 광해군이 어떻게 대동법 시행의 업적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다. 심지어 대동법의 최초 시행도 광해군이 아닌 선조라고 한다. 광해군이 즉위한 때가 1608년 2월이었고 대동법을 시행한 때가 같은 해 5월 이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상중일 때는 정책을 논의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이렇게 빨리 대동법을 시행한 것은 선조때 이미 시행하기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동법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인조반정 이후이다. 이 때 논의를 주도하고 시행에 앞장선 이원익, 조익, 김육 선생등은 모두 광해군 때 쫓겨났던 사람들이고 남인과 서인이었다. 이들 없이 어떻게 대동법이 시행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대동법을 반대하는 광해군과 대북세력에 의해 대동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3. 광해군의 업적으로 거론되는 양전도 광해군 때는 한번도 실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조 말에 임시적인 양전이 있었지만, 토지 결수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이 광해군때는 아예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양전이 시행된 것은 인조반정 후에 인조 때였다. 그리고 민간에 부과된 세금 원곡 11만석을 삭감하여 민간의 숨통을 틔워준 것도 인조 때였다.
4. 조선 시대의 안정적 나라 운영의 기본은 왕도정치 사상으로 표현되며, 그것을 지탱하는 문치주의 제도가 있었다. 그것은 <경연관> <언관> <사관>이라는 세 직제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조선 시대 왕도정치의 제도적 표현인 문치주의의 트로이카는 곧 요즘의 헌법에 해당한다. 조선의 국왕은 즉위하면서 이들 제도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했다. 광해군은 재위 16년 동안 경연을 연 것이 불과 10일에 불과했다. 경연은 본래 군주의 보양을 위해 인덕과 학문을 갖춘 신하가 사부의 자격으로 군주를 교육하는 것이다. 경연에서는 단순한 공부뿐만 아니라 정책토론도 이뤄지는 자리였다. 대통령제 하의 국무회의의 성격도 있었던 것이다. 하루 세번씩 해야하는 경연을 광해군은 재위 기간 동안 거의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국무회의를 16년 동안 10번만 개최한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부기능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연은 국정의 철학, 민생과 인간의 도리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대안없이 경연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이런 공유를 포기 또는 방기했음을 의미한다. (경연을 광해군만큼 방기한 조선의 왕은 연산군이 있을 뿐이다.)
5.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1623년) 3월 14일에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두채의 궁궐을 건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10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법궁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창덕궁의 세 궁궐이 모두 불타버렸다. 한성을 수복한 뒤 선조는 경복궁 중건을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 중이기도 하고, 궁궐을 지을 재정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백성들이 전란에 시달리는 판에 궁궐을 논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비용이 많이 드는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지어 법궁을 삼기로 했다. 선조 40년 부터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에 주요 전각을 완공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이 단종의 폐위 사건이 있었던 궁이라고 꺼려하여 들어가려 하지 않고 즉위 후 거처했던 경운궁에 계속 거처했다. 경운궁은 원래 궁이 아니고 성종 임금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집으로 그 주변 민가 몇채를 개조하여 임시 거처로 삼았던 궁궐이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한 후에 경운궁에 같이 있기 곤란해서 광해군 7년에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만족할 수가 없어서 창경궁을 수리 중건했다. 이것만 해도 백성의 부담이 엄청났지만 계속해서 인경궁과 경덕궁을 창립하고자 했다. 궁궐 공사에 들어가는 재정과 인력을 쥐어 짜내기 위해 전세(田稅)를 25% 올리기로 했다가 그것으로 부족하자 100% 올렸다. 처음에는 승군1000명을 동원하여 궁궐을 건축했지만 부족하여 전국 각지의 기술자 6000명을 참여하게 했다. 그러고도 재정이 부족해지자 기부를 종용하면서 기부한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매관매직을 만연시켰다. 그런 후에도 궁궐 건축 비용이 부족해지자 각 군영의 군량미를 가져다 사용했다. 후금이 흥기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군대에서 사용하여야 할 염초(화약)와 공철과 군량미를 빼돌려 궁궐 건축 비용으로 사용했으니, 그 군대의 사기와 질이 어떨지는 안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광해군 11년 3월, 이런 준비없는 상태의 군대로 명나라의 요청으로 파병했고, 강흥립이 이끄는 조선 군대가 후금에게 전멸하다시피 패배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군대가 후금에게 패배한 후 명나라 황제는 조선 정부에 전사자 가족과 부상자에게 쓰라고 위로금을 보냈지만 광해군은 이 돈조차도 궁내 자금으로 사용하고 말았다.
6. (폐모살제는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으로 거론된다. 조선은 효의 나라였다. 어떤 명분보다도 중요한 것이 효였다. 이항복도 영창대군이 죽은 것으로 목숨을 거는 것은 지나치지만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것을 막는 것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폐모사건은 대북 세력외에 모든 당파가 반대했다. 서인도 남인도 남아있던 소북도 모두 반대했고 그들 모두 자발적으로 조정을 떠났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하던 백성들의 민심이 완전히 떠나게 한 사건이었다. 계축옥사에 관련된 죄목은 모두 대북세력에 의한 조작이고 무고였다.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