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김건희 명품가방 선물 수수 보도가 되었다. 늘 그렇듯이 여론을 무마하려는 사건이 터질 것이라는 예측을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에서 언급을 했다.
11월 27일 상월결사 회주인 자승원장은 종단운영 지침을 대서특필한지 한 달도 안되어 긴급 교계간담회를 했다. 핵심내용은 “(종교편향은) 불자인재 없어 생긴 일.... 승려대회 등 언급은 성급하다”는게 핵심이다.
- 한달동안 조계종은 불교신문을 필두로 종교편향을 제기하며, 윤석열 정부를 공격했다. 종정 성파스님이 통도사를 방문한 유인촌 문체부장관에게 언급할 정도였고, 11. 30일 원로회의까지 개최되어 입장이 나올 예정이였다.
- 그래서 언론간담회에서 자승원장의 발언은 용산과의 물밑대화가 잘 되었거나, 관계 기관의 자제요청이 쇄도했기에 피크를 올려가던 종교편향 문제를 중지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생각들 했다.
11월 29일 강남원장은 안성 칠장사에서 여러 의혹을 남기고 자살했다. 여전히 불교계는 황당하고 자살동기를 짐작할 수가 없다. 연예인처럼 심한 우울증으로 갑자기 자살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불교인사는 없다. 최근 4년동안 자승원장이 보인 행각이 괴상망측하지만 그 정도의 멘탈은 아니라는 것에 부정할 사람은 없다.
각종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국정원 수사개입, 윤대통령 ‘진상파악’ 언급 등 갈수록 의혹이 확산되며, 언론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최근에 더욱 광폭행보를 보였던 그가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외부요인이 뭐였을까? 온갖 추측과 소문만 무성하다.
종단 안팎의 외압이라 하더라도 결국 자승원장 신상과 관련된 내용일 것이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말이 없겠지만 이 죽음이 끼치는 영향과 의혹이 크기에 진실규명은 필요해 보인다. 영결식 이후 궁금해할 언론은 없겠지만 불교계 내의 평가는 계속될 것이라 생각된다.
급작스런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이는 별도 없다. 관련기사 댓글 등 SNS에서는 온갖 비난과 의혹만 있을 뿐이다. 향후 평가를 위해서라도 자승원장이 어떤 사람인지? 죽음에 대한 소회 몇가지를 살펴보자
지리산 이원규 시인 - 페북에서
섬진강은 여여하다
날마다 섬진강은 다른 얼굴이지만
오늘 아침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장엄하고 유장하고 여여하다.
하지만 오늘은 불교계가 혀를 깨무는 날이다.
‘자승자박’이라더니 결국 무언가 쫓기듯이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들었다.
치열한 암투와 탐욕의 악취가 확 풍긴다.
방화와 자살이 소신공양이 되고 자화장(自火葬) 했다면서 다시 다비식을 하다니!
웬만하면 애도의 예의를 표해야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조계종단의 후안무치가 극에 달했다.
조계종단 전체의 참회와 성찰이 먼저 아닌가.
2010년 4대강 살리자며 낙동강에서 소신공양한 문수 스님,
당시의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은
문수 스님의 다비식은커녕 철저히 외면하기만 했다.
(그때 한 스님은 부끄럽다며 법복을 내던졌다. 주지직을 내려놓고 차라리 환계(還戒)를 선언했다).
불교의 미래를 위해, 어쩌고 저쩌고 제아무리 어설픈 변명을 하지만
공개된 자승의 유서들이 오히려 더 어색하고 유치하다.
분향소인지, 선거운동판인지 현 정부는 급하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하사하고
현직 대통령 내외라는 인물도 문상을 와서
“중생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쳐 주신
큰 스님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추모의 글을 남겼다.
너무 감동적이다 못해 정말 기가 막힌다.
이맹박과 유인천과 굥정부가 이리도 잘 울리다니!
섬진강 맑은 물에 눈알을 헹구고
차가운 강바람에 귀를 씻는다.
김성동 (어의운하 대표, 전 총무원 총무팀장) - 페북에서
생각해보면, 2009년 10월 자승 전 원장이 총무원장에 당선됐을 때, 선거인단 321명 중 290명의 압도적 지지(91%)로 당선되었고, 사실상 추대 형식의 당선이었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될 정도다. 당시 봉은사 주지가 명진 스님이었고, 종단은 화엄회, 보림회, 금강회, 무차회, 무량회 등등 온갖 정치 계파가 활동하였던 시기였다. 갈등이라기보다 협잡에 가까운 시간들이었다.
그만큼 종단은 사실상 50-60년대 정화 이후 그랬듯이 극도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94년 개혁 정신은 거의 흐릿한 기억이 되었다. 온갖 정치 계파가 이권을 위해 밤에 움직였다. 이건 세속의 여야 정치 문제와 다르다. 요컨대 자승 전 원장의 두 번째 은사였던 정대 전 총무원장이 김대중 정부 주요 인사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은 교단의 정치 관계와 세속의 정치 관계는 공통성이 별로 없으며, 사안별로 이합집산한다는 뜻이다.
자승 전 원장의 33대 총무원장 임기(2009.10~2013.10)에 수많은 불미스런 사건이 일어났다. 해종언론 지정, 은처 의혹, 봉은사 직영 전환, 템플스테이 예산 횡령, 백양사 도박, 돈 선거, 적광 스님 폭행 등이 대표적이다. 누적된 종단의 그늘이 계속 튀어나온 것이다. 이후 종단의 자정 운동도 일어났으며, 임기 말이 다가오자 자승 전 원장은 "마음을 비웠다"며 연임에 대해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반대파의 지지를 받은 보선 스님이 선거 출마를 선언하자, 다시 복잡한 정치 상황이 벌어졌다. 양쪽 계파의 거센 정치 힘겨루기가 나타난 것이다.
수좌회 등을 중심으로 적명, 도법, 수경 스님이 양측(자승, 보선)을 중재하며, 양측 모두 후보 사퇴하자고 일정한 합의가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보선 스님이 합의 사항을 부정하였고, (적명 스님은 보선 스님의 이런 행동에 크게 실망하고 봉암사로 되돌아갔다. 만약 이때 합의처럼 제3의 인물이 총무원장으로 나왔다면, 아마 이후 종단은 꽤 달라졌을 것이다. ) 각자 계파의 총무원장 선거전이 치열하게 진행되어, 50표 차이로 2013년 10월 자승 전 원장이 당선됐다.
온갖 네거티브와 날선 비난의 과정 속에 재임에 성공한 자승 전 원장은 종단 권력을 압도적으로 쟁취해야 할 필요성을 더욱 느꼈을 것이다. 이후 2017년 10월 퇴임 때까지 중앙종회를 비롯한 권력의 집중화는 빠르게 진행되며, 반대 세력을 신속하게 제거하고 인사적인 보복도 진행되면서 비판세력은 거의 사라지고, 종단의 최고 통치자로서 그 영향력은 더욱 거세졌다. 당시 종단 적폐청산 범불교도대회, 전국승려결의대회 등으로 자승 체제를 압박했지만, 94년 종단 개혁 같은 승단 내부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기에 저항은 제한적이었다.
2018년 퇴임 후 종단은 이미 '자승 체제'로 고착되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개혁 세력은 각자도생했고, 약한 권승은 강한 권승에게 쫓겨났다. 성추행자인 선학원 이사장은 선학원 사태를 계기로 반자승 세력으로 몸을 감췄다. 승단은 옳고 그름이 마구 뒤엉키면서 흙탕물 속으로 빨려갔다. 역설적이게 이런 혼란은 외적으로 자승 체제를 더욱 빠르게 확장시켰다.
출가 시절을 절 뺏기로 보냈다고 스스로 고백할 만큼 자승 전 원장은 은사 정대 전 원장처럼 사판승으로 입지를 다져왔다. 그런 그가 퇴임 이후 겨울 안거를 백담사에서 보내고 신흥사 조실 무산 스님은 “자승 스님이 한 철 사신 덕에 설악산은 더욱 높아지고, 골짜기는 더욱 깊어진 것 같습니다."라고 덕담을 던져줬다. 이후 2019년 11월 부터 3개월간 이어진 '상월결사' 로 종단의 전통 안거를 개인의 명예욕 처리장으로 치환시키며 수행자를 엔터테이너로 둔갑시켰다.
사판승에서 수행자의 이미지로 갈아탄 이후 자승 전 원장은 종단의 공식 행정 체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방장, 총무원장, 본사주지 등에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며 사실상, 종단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었다. 모든 행사에 총무원장보다 앞서 나섰고, 교계 언론과 스님들은 이를 당연시했다. 종단의 주요 행사와 사업 등은 자승 전 원장이 제안한 사업보다 후순위였고, 세속의 정치에 대놓고 개입했다.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기괴하고 해괴한 모습, 대놓고 머리카락을 기른 채 그렇게 한동안 지냈다. 이 모든 게 ‘불교 중흥’이란 단어 속에 용납되었다.
2022년 8월 대낮 봉은사 일주문 앞에서 벌어진 조계종 노조원 폭행 사건은 자승 전 원장 추종자들의 절대적 충성심을 드러낸다. 그 승려들은 자승 전 원장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노조원에 오물을 뿌리고 구타 폭행했다. 사이코패스의 행동이다. 지금까지 종단에서 아무런 징계조차 받지 않은 채 승복을 입고 다닌다. 그만큼 자승 전 원장의 절대 권력은 넓고 깊게 종단에 자리했다. 보복의 두려움, 동물적 복종, 종교적 카리스마, 설익은 관용, 강요된 종단 안정, 방임과 외면 등 모든 게 얽히고설키며 그의 허상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자승. 어떤 인과 연이 그를 무너뜨리게 했을까. 인간 자승과 만들어진 자승, 그 큰 간격을 그는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일까. 인간이란 때론 무의식의 명령으로 움직이기도 하니 말이다.
예상하듯 그의 부재 속에 무너진 허상을 다시 쌓아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이 등장할 것이다. 물론 칠장사 요사채는 열반지로 기념될 것이다. 재벌급이라는 그의 재물을 놓고 다툼도 일어날 것이다. 글자 배운 이들은 제법 고고한 척, 거리를 두며, 찬양했던 옛 흔적을 지우거나 교묘한 글장난으로 흔적을 덮으려고 할 것이다.
늘 그랬듯 계파의 이합집산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별것 없다.
기사 - "한국 불교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별"이라고? 누가? : 자승의 삶을 설명하는 3가지 장면 (ddanzi.com)
https://brunch.co.kr/@friscii/655
https://cafe.daum.net/jokbunion/7OmA/282
https://www.youtube.com/watch?v=1AhkEDQkgoA
https://v.daum.net/v/20231201112100043
[단독] 수사당국, 자승스님 타살가능성 조사…국정원도 수사 참여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