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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는 해에 주홍빛 흩뿌리시고
파란색 하늘을 펼치신 그분.
거위들 모여 지내는 모습은
볼수록 얼마나 신기한가.
털북숭이 다람쥐 꼬리,
새의 노래며 닭의 종종걸음,
장엄하게 울리는 천둥소리는
정녕 그분의 의무였을까?
꽃향기는 웬 것이며
음식 맛은 또 왜인가?
우리 얼굴의 그 표정
보고 싶으심 아닐까?
우리도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선물을 주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리하실까? 교만과 탐욕으로 얼룩진 우리가 선물 주기를 좋아한다면 순전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우리에게 선물 주기를 즐겨하실까? 예수님은 물으신다.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1, 현대인)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선하고 후하신 마음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밝게 빛난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바람직하고 유익한 선물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빛의 아버지로부터 폭포처럼 하염없이 내려옵니다" (야고보서 1:17. 메시지).
하나님의 모든 선물이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십자가 선물보다 더 잘 보여주는 선물은 없다. 십자가의 선물은 포장지 대신 수난에 싸여 찾아왔다. 나무 밑이 아니라 십자가 밑에 놓여졌다. 리본이 묶인 대신 피가 뿌려져 있다.
십자가의 선물.
'십자가'라는 선물 자체에 대해서는 다들 많이 얘기했다. 하지만 다른 선물들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못은 어떤가? 가시 면류관은 어떤가? 군병들이 취한 옷은 어떤가? 장례를 위해 드려진 수의는 또 어떤가? 당신은 시간을 내어 이런 선물들을 열어본 적이 있는가?
알다시피 그분은 이 선물들을 꼭 주시지 않아도 됐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행동은 오직 피를 흘리시는 것이었지만 그분이 하신 일은 더 많다. 훨씬 많다. 십자가 장면을 들여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포도주를 적신 해면.
죄패.
그리스도 양옆의 두 십자가.
당신의 얼굴이 밝아지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단 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을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당신은 하나님께 이렇게 속삭인다.
"저를 위한 일입니까?“
*침 뱉음이란 몸에 고통을 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침은 몸에 고통을 줄 수 없다. 침 뱉음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이다. 침 뱉음을 당할 때 과연 우리는 모욕을 느낀다. 군병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을 깔아뭉갬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 아닌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초라하게 만듦으로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당신도 그런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침을 뱉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험담한 일이 있는가? 비방한 일은? 분노로 손을 쳐들거나 교만하게 눈을 굴린 일은 없는가? 누군가의 백미러에 하이빔을 쏘아댄 일은 없는가? 내 기분 좋아지려고 남의 기분을 비참하게 만든 적은 없는가?
그것이 바로 군병들이 예수님께 한 일이다. 당신과 내가 똑같은 일을 할 때, 우리도 예수님께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때, 왕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일, 곧 너희가 이 형제들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일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40. 쉬운성경).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이다.
"오, 그런 말이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항변한다.
또한 분명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예외 없이 야수 같은 면이 있다는 사실을. 자기가 해놓고도 깜짝 놀랄 일을 하게 만드는 야수적 근성 말이다. 자신에게 놀란 적이 있는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내 속에 뭐가 있기에?" 하는 의문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성경은 그 질문에 한 단어로 답한다. 죄. 우리 각자 안에는 뭔가 나쁜, 야수 같은 것이 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베소서 2:3)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선도 행한다. 그보다는,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신학적 용어로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에도 우리는 타락했다. 속이 부패했다. 존재의 중심부터 이기적이고 패역하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좌투성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부터 나는 죄인이었습니다"(시편 51:5, 쉬운성경).
우리 중에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각자는 죄의 속성을 안고 태어났다. 타락이란 전 인류의 보편적인 상태다. 성경은 명백히 말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사야서 53:6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서 17:9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10. 23
이런 강한 표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야.” 돼지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자기 여물통의 다른 돼지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난 누구 못지않게 깨끗해." 그러나 인간에 견준다면 돼지는 도움이 필요한 상태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에 견준다면 똑같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다. 무죄의 표준은 이 땅의 돼지 여물통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있다. 하나님 자신이 표준이다.
*하나님의 연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욥기36:26). 첫 파도가 해안에 철썩이던 순간, 첫 별이 하늘에 피어나던 순간이라면 혹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첫 순간만은 영원히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나님 아니셨던 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분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시간에 매여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분은 천국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던 말을 처음으로 들으셨다. "때가 됐다." 아이일 때 그분은 성전을 떠나야 했다. 때가 됐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 그분은 나사렛을 떠나셔야 했다. 때가 됐기 때문이다. 구주로서 그분은 죽으셔야 했다. 때가 됐기 때문이다. 33년 동안 천국의 백마가 시간의 울타리 안에 갇혀 사셨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성육신의 보고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을 보기 원하는가? 당신은 그분이 육체로 사셨다는 점을 꼽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한한 영이셨던 그분이 한순간에 살과 뼈가 되셨다. 다윗 왕의 말을 기억하는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시편 139:7-10).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지만 그것은 물고기가 "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고 새가 "공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중국에도 계시고 남아공에도 똑같이 계신다. 텍사스 사람들의 삶과 똑같이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삶에도 역사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시편72:8) 이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찾을 수 없다.
그런 하나님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인간이 되셨다. 무한하던 분이 유한해졌다. 육체에 갇혔다. 근육이 피곤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제약을 받으셨다. 한때 팔을 펼치면 끝이 없던 그분이 30년 넘도록 그저 팔 길이 하나만큼밖에 닿을 수 없게 되었다. 움직이시는 속도도 인간이 걷는 속도로 제한되었다.
궁금하다. 그분은 자신의 무한성을 되찾고 싶은 유혹을 느끼신 적이 있을까? 먼 길을 걸으실 때면 축지법이라도 써서 다른 도시로 날아가는 장면을 상상해보셨을까? 비가 와 뼛속까지 오슬오슬할 때면 날씨를 바꿔버리고 싶은 유혹은 없었을까? 무더위에 입술이 타들어갈 때면 카리브 해로 홱 날아가 잠시 열기를 식힐 생각은 없었을까?
그분이 그런 생각을 즐기셨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거기에 굴복하신 적은 더욱 없다. 단 한 번도. 잠시 멈춰 생각해보라. 그리스도는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사용하신 일이 한 번도 없다. 말 한마디면 딱딱한 땅을 부드러운 침대로 바꾸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손 한 번 까딱하면 군병들의 침을 부메랑처럼 그들의 얼굴로 되돌려 보내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눈썹 한 번 치키면 가시 면류관을 엮는 군병의 손을 마비시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놀랍다. 하지만 이것이 그분이 오신 사건 중 가장 놀라운 부분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시공의 무한성을 포기하신 것도 놀랍지만 많은 사람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보다 더 놀랍다고 말할 부분이 또 있다. 바로,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지 않고 죄를 지신 것이다.
*죄의 열매는 가시다. 뾰족하여 따끔따끔 아프게 찔러대는 가시가 죄의 결과라는 '핵심'을 재차 강조한다. 당신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수 있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죄의 열매가 가시라면, 그리스도의 이마에 얹힌 가시 면류관은 그분의 마음을 찌른 우리들의 죄의 결과에 대한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죄의 결과는 무엇인가? 인류의 가시밭에 잠시 들어가 몇 가지 가시만 느껴보라. 수치. 두려움. 치욕. 낙심. 불안. 우리의 마음은 가시덤불에 얽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분은 한 번도 죄의 가시에 찔리신 적이 없다. 당신과 내가 날마다 마주하는 것이 그분의 삶에는 전혀 없었다. 불안? 그분은 염려하신 적이 없다! 죄책감? 그분은 죄를 지으신 적이 없다! 두려움? 그분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신 일이 없다! 예수님은 죄의 열매를 전혀 몰랐다. 우리 대신 죄가 되실 때까지는.
무죄한 그분이 우리 대신 죄가 되셨을 때, 죄의 모든 감정이 숲 속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분께 덮쳐왔다. 그분은 불안과 죄책과 고독을 느끼셨다. 그분의 기도 속에 그 심정이 느껴지지 않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이것은 성인의 말이 아니다. 죄인의 부르짖음이다. 이 기도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사건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 중 하나다. 그러나 아직도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성육신의 가장 멋있는 부분을 알고 싶은가?
별들로 구슬치기를 하시던 분이 그것을 포기하고 구슬로 구슬치기를 하셨지만 그 부분도 아니다. 은하수를 펼쳐놓으신 분이 그것을 포기하고 돈도 없으면서 물건만 빨리 달라고 닦달하는 까다로운 손님을 참으시며 문설주를 달아주셨지만 그 부분도 아니다. …
아담 이후의 모든 남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뒤집어쓰면서도 자기를 변호하지 않으셨지만 그 부분도 아니다. 천국의 법정에 무수한 유죄 판결이 울려 퍼지고 빛의 창조자가 죄인의 밤에 느껴지는 냉기 속에 버려질 때에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셨지만 그 부분도 아니다.
어두운 무덤에서 사흘을 보내신 후 환하게 웃으며 부활의 아침햇살 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와, 초라한 루시에게 그것이 네 제일 센 주먹이더냐?"고 물으셨지만 심지어 그 부분도 아니다.
그것도 멋있다. 말할 수 없이 멋있다.
그러나 천국의 면류관을 버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분의 가장 멋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그분은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 바로 당신을 위해.
*건축가의 실수를 쭉 적다보니 하나님이 내 실수를 적으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분도 내 마음에 입주하여 사시지 않던가? 내 집의 흠이 내 눈에 보인다면 하나님은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을 보실까? 오, 한없이 늘어갈 그분의 목록을 어찌 감히 상상이나 하랴.
기도실 문은 하도 사용하지 않아 경첩이 녹슬었다.
질투라는 이름의 난로는 펄펄 끓고 있다.
다락방은 겹겹이 쌓인 후회로 내려앉을 것만 같다.
지하실에는 웬 비밀이 그리 많은가.
하나님은 이 마음의 닫힌 문을 활짝 열어 비관적인 생각을 몰아내시고 싶지 않을까?
우리 연약함의 목록. 남들이 당신의 목록을 보아도 좋은가? 목록을 대중 앞에 공개해도 좋은가? 그리스도를 포함해 만인이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게시된다면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정말 그렇게 게시됐던 순간으로 당신을 안내하고 싶다. 그렇다. 당신의 실패 목록이 게시됐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모든 단점을 적으셨다. 그리고 그 목록은 대중에 알려졌다. 하지만 당신은 본 일이 없다. 나도 보지 못했다.
나와 함께 갈보리 언덕으로 가보자. 거기 그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에게 불리한 율법의 채무 증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골로새서 2:13-14, 현대인).
그분이 주먹을 움켜쥐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분은 목록을 보셨다! 무엇이 그분의 저항을 막았는가? 당신의 실패가 적힌 이 증서, 이 목록이다. 이 죄의 값이 사망임을 그분은 아셨다. 이 죄가 비롯된 곳이 당신임을 그분은 아셨다. 당신 없는 영원을 생각하실 수 없기에 그분은 못을 택하셨다.
망치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은 로마 보병의 손이 아니었다.
망치를 내리치게 한 힘은 성난 폭도가 아니었다.
사형 선고는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결정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못을 택하셨다.
그렇게 예수님의 손은 활짝 펼쳐져 있었다. 행여 군병들이 머뭇거렸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망치를 내리치셨을 것이다. 망치질은 그분의 전공이었다. 그분은 못 박는 일이라면 이골이 나있었다. 목수로서 그 기술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리고 구주로서 그 의미를 분명히 아셨다. 자신의 희생으로 가리고 자신의 피로 덮고자 당신과 나의 죄를 매다는 것, 그것이 못의 목적임을 그분은 아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친히 망치를 내리치셨다.
바다를 잔잔케 하셨던 그 손으로 당신의 죄를 잔잔케 하셨다.
성전을 깨끗케 하셨던 그 손으로 당신의 마음을 깨끗케 하셨다.
그 손은 하나님의 손이다.
그 곳은 하나님의 못이다.
예수님의 손이 못 앞에 활짝 펼쳐질 때 천국 문도 당신 앞에 활짝 열렸다.
*아벨과 가인. 둘 다 아담의 아들이다. 아벨은 하나님을 택한다. 가인은 살인을 택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두신다.
아브라함과 롯. 둘 다 가나안의 순례자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택한다. 롯은 소돔을 택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두신다.
다윗과 사울. 둘 다 이스라엘의 왕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택한다. 사울은 권력을 택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두신다.
베드로와 유다. 둘 다 주님을 부인한다. 베드로는 자비를 구한다. 유다는 죽음을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냥 두신다.
역사의 시대마다, 성경의 면면마다 밝혀져 있는 진리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신다.
이 사실을 예수님보다 더 분명하게 말한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 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1좁은 문과 넓은 문 마태복음 7:13-14.
좁은 길과 넓은 길 마태복음 7:13-14.
많은 무리와 적은 무리 마태복음 7:13-14.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반석 위에 지을 수도 있고 모래 위에 지을 수도 있다 마태복음7:24-27.
하나님을 섬길 수도 있고 재물을 섬길 수도 있다 마태복음 6:24.
양 중에 들 수도 있고 염소 중에 들 수도 있다 마태복음 25:32-33.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5:46).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으러 가지 않던가? 여자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을 때까지 온 집안을 쓸지 않던가? 맞다. 목자는 간다. 여자는 쓴다. 그러나 잊지 말라. 탕자의 아버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양을 잃은 것은 양의 뜻이 아니었다.
동전을 잃은 것도 동전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탕자가 집을 나간 것은 고의적 선택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예수님도 두 강도에게 마찬가지로 선택권을 주셨다.
하나님은 천둥을 보내 우리를 정신 차리게 만드실 때도 있고 축복을 보내 우리를 회유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도 있다. 우리를 존중하사 영원을 보낼 곳을 선택할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얼마나 큰 영광인가! 삶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 생각해보라. 당신의 성품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형제들도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인종이나 출생지도 당신의 선택이 아니다.
선택권이 없는 데 대해 우리는 때로 분노를 느낀다.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고 음치이며 달리기를 잘 못한다. 모두 불공평하다. 하지만 인생의 저울은 에덴동산에 한 그루 나무를 심어두신 하나님의 그 공평함으로 인해 영원히 전복되었다.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자유 의지가 주어짐으로 모든 불평은 잠잠해졌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운명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현세의 모든 불공평함은 내세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영광으로 상쇄된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당신이라면 그와 다른 것을 바라겠는가? 차라리 그 반대가 더 좋겠는가? 현세의 모든 것은 당신이 선택하고, 당신이 내세를 보낼 곳은 그분이 선택하시는 것? 코의 크기며 머리색이며 염색체 구조는 당신이 선택하고, 당신이 영원을 보낼 곳은 그분이 선택하시는 것? 당신은 차라리 그편이 더 좋겠는가?
*아기에게 젖을 물린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라. 아기를 안고 어르는 아빠의 눈을 바라보라. 행여 아기를 다치게 하거나 아기에 대해 나쁘게 말해보라. 그 즉시 무서운 힘에 맞서게 될 것이다. 부모의 사랑은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물으셨다. 죄인인 인간에게도 그런 사랑이 있는데 하물며 죄와 욕심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더 우리를 사랑하실까? 하지만 우리가 준 사랑이 사랑으로 되돌아 오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가 등을 돌리고 떠날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
성경에 의하면 우리도 똑같이 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야멸차게 거부했다.
"우리는 다・・・・・・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사야서 53:6). 바울은 우리의 반역을 한 걸음 더 깊이 끌고 들어간다. 우리는 단지 외면한 정도가 아니라 그분을 대적했다. 우리는 "경건하지 않은 자" (로마서 5:6), 즉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던 자”였다.
10절에 가면 그보다 더 강한 표현이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에." 너무 심한 표현 아닌가? 원수란 곧 적이다. 해치는 자다. 모르고 해치는 것이 아니라 고의로 해치는 자다. 우리가 그렇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적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아버지를 대적한 적이 있단 말인가?
당신은 어떤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인 줄 알면서도 행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나 피조 세계의 일부를 해친 일이 있는가?
하나님의 적인 마귀의 일을 거들거나 성원한 일이 있는가?
대중 앞에서 하늘 아버지를 모른 척한 일이 있는가?
있다면, 당신은 그분의 원수 역을 행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분의 원수가 될 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그 길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뜰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우리를 찾아 집을 떠나시던 날 그 여정은 시작되었다. 당신의 마음을 얻으시고야 말겠다는 열정 외에는 아무런 장비도 없이 그분은 찾아오셨다. 그분의 뜻은 오직 하나,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 찾아오심을 한 단어로 '화목하게 하심'이라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하시며" (고린도후서 5:19).
화목하게 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상태를 되돌려놓는다"는 뜻이다. 화목하게 한다는 것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고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며 싸늘하게 식은 열정에 다시 불꽃을 지피는 것이다. 화목하게 한다는 것은 고집부리는 아이의 어깨를 어루만져 집으로 오라고 타이르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 온갖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교만과 수치. 이 둘은 보기에는 너무 다르지만 자매지간이다. 교만은 가슴을 내밀 대로 내민다. 수치는 고개를 숙일 대로 숙인다. 교만은 뻐긴다. 수치는 숨는다. 교만은 내보이려 한다. 수치는 달아나려 한다. 그러나 속지 말라. 두 감정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두 감정이 미치는 파급 효과도 같다. 교만도 수치도 당신을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교만은 말한다. "넌 하나님을 찾기에는 너무 착해."
수치는 말한다. "넌 하나님께 가기에는 너무 추해."
교만은 당신을 몰아낸다.
수치는 당신을 가둬둔다.
교만이 넘어짐의 앞잡이라면 수치는 넘어진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리스도는 이 솔기 없는 완전한 옷을 벗으시고 다른 옷을 입으셨다. 수치의 옷을 입으셨다.
벌거벗음의 수치-어머니와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 벌거벗은 몸이 되셨다. 가족 앞에서의 수치였다.
패배의 수치-고통이 엄습하던 그 몇 시간 동안 종교 지도자들은 승자였고 그리스도는 패자처럼 보였다. 적 앞에서의 수치.
무엇보다도 그분은 죄의 수치를 입으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24).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옷은 무엇인가? 죄, 당신과 나의 죄의 옷이다. 온 인류의 죄의 옷이다.
…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말했다.
"로마 시민의 몸에는 물론 생각과 눈과 귀에도 십자가라는 단어조차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만 수치를 당하신 것이 아니라 천국 앞에서도 수치를 당하셨다.
살인자와 간음자의 죄를 지셨기에 그분은 살인자와 간음자의 수치를 느끼셨다. 평생 거짓말하신 적이 없음에도 그분은 거짓말쟁이의 능욕을 지셨다. 속인 일이 없음에도 사기꾼의 창피를 맛보셨다. 온 세상의 죄를 담당하셨기에 온 세상의 모든 수치를 한꺼번에 느끼셨다.
그분이 "치욕"을 짊어지셨다고 표현한 히브리서 기자의 말은 지당한 것이다(히브리서 13:13).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범죄자의 수치와 치욕을 맛보셨다. 그분은 죄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었다. 그분은 단 한가지도 죄를 범하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범했다.
그분께 사형선고는 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땅한 것이었다.
*그분은 당신을 눈여겨보셨다. 그분은 당신의 말을 들으셨다. 그리고 당신을 초대하셨다. 한때 당신을 막았던 벽이 이제 허물어졌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에베소서 2:13).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남은 것이라곤 열린 문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대통령을 보러 들어갈 수 없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된 일일까? 한마디로 누군가 커튼을 젖혔다. 누군가 휘장을 꺾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당신과 내게 문이 열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19-20
이 편지의 첫 독자들에게 마지막 네 단어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성경에 따르면 휘장은 곧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에 일어난 일이 그대로 휘장에 일어났다. 예수님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분의 몸은 찢겼다. 채찍질에 찢겼고 가시에 찢겼다. 십자가의 무게와 못의 구멍으로 찢겼다. 그러나 처참하게 찢긴 그 몸을 통해 영광의 문이 열렸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태복음 27:50-51).
휘장이란 바로 성전의 휘장을 말한다. 지성소 앞에 걸려 있던 휘장이다.
알다시피 지성소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성전의 한 부분이었다. 유대인 예배자들은 바깥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성소 안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아무도, 왜? 여호와의 영광,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침 뱉음 당하고 멍들고 찢겼다.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죄를 지셔야 했다. 단 한 방울의 물도 그분의 목을 적셔주지 못했다.
그분은 목마르다.
왜 그분은 가만히 계시는 걸까? 얼마든지 능력이 있지 않은가? 항아리에 담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지 않았던가? 요단강에 벽을 세우고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지 않았던가? 말씀 한마디로 비가 그치게 하시고 파도를 잔잔케 하시지 않았던가? 성경은 그분이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시편 107:35) "차돌로 샘물이 되게" (시편 114:8) 하셨다고 말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이사야서 44:3)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런 질문에 덧붙여 물어야 할 질문이 또 있다. 그분은 왜 사마리아에서 피곤하셨고(요한복음 4:6) 나사렛에서 괴로우셨고(마가복음 6:6) 성전에서 화나셨을까?(요한복음 2:15) 왜 갈릴리 바다의 배 안에서 주무셨고(마가복음 4:38) 나사로의 무덤에서 슬프셨으며(요한복음 11:35) 광야에서 배고프셨을까? (마태복음 4:2)
왜? 그분은 왜 십자가에서 목마르셨을까?
그분은 목말라 괴로워하시지 않아도 됐다.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됐다. 여섯 시간 전에 누군가 그분께 마실 것을 드렸다. 그러나 그분은 거부하셨다. … 몰약과 쓸개에는 둘 다 감각을 마취시키는 진통 성분이 들어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셨다. 약물의 마취를 거부하셨다. 고통을 그대로 다 느끼려 하신 것이다.
왜? 왜 그분은 그 모든 감각을 견디신 것일까? 당신도 그런 아픔을 느끼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당신도 피곤하고 괴롭고 화나리라는 것을 그분은 아셨다. 당신도 아픔에 부딪치리라는 것을 그분은 아셨다. 몸의 아픔이 아니라면 영혼의 아픔을……………. 너무 아파 약물로도 덜 수 없는 아픔을 당신도 목마르리라는 것을 그분은 아셨다. 물의 목마름이 아니라면 적어도 진리의 목마름을. 목마른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우리가 깨닫는 진리는 그분은 이해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이 이해하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입장에 처해보셨고 그래서 당신의 심정을 헤아리실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의 자리에 가보셨고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아신다.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신 삶으로도 당신에게 증거가 부족하다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이야말로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분은 당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하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마음에도 없는 선심을 쓰거나 우리의 필요를 비웃지 않는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 (야고보서 1:5).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목마르다 하셨는가? 이미 튼튼한 다리에 기둥 하나를 더 받치기 위해서다. 의심 많은 자라도 건너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분이 목마르다고 고백하신 것은 모든 구하는 자에게 하나의 징표다. 그분이 메시아라는.
이렇듯 그분의 마지막 몸짓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한마디 따뜻한 말이다. "나를 믿어도 좋다."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보다 크면서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해받기 위해 이 땅의 사람들을 믿는 데 이미 지치지 않았는가? 힘을 얻기 위해 이 땅의 것들을 믿는 데 염증이 나지 않았는가? 물에 빠진 사람은 이미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죄수는 다른 죄수에게 석방을 간청하지 않는다. 거지는 다른 거지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이 필요하다.
포도주 적신 해면에 담긴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내가 그 사람이다. 나를 믿어라.
*하나님과의 동행도 똑같다. 세월이 간다고 처음 구원받은 날보다 더 구원받은 자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구원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물론이다. 결혼처럼 구원도 완성된 사건이면서 동시에 매일 성장해나가는 것이다.
피는 우리를 위해 내주신 하나님의 제물이다.
물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요한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반드시 알리려 했다. 무엇이 나왔는가를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어떻게 나왔는가를 알아야 한다.
"곧(동시에, at once, NCV)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34)
요한은 하나를 다른 것보다 강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그런 잘못을 잘 범하는가.
피는 받아들이지만 물은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은 받고 싶지만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
물은 받아들이지만 피는 간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바쁘게 무언가를 하지만 그리스도와 화목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당신은 어떤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가? …
당신의 마음속에 세례 요한의 선포를 새겨두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복음 1:29)이시다. 그리스도의 피는 당신의 죄를 살짝 덮어주지 않는다. 당신의 죄를 가려주지 않는다. 당신의 죄를 뒤로 미뤄두지 않는다. 당신의 죄를 감해주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는 당신의 죄를 없애준다. 단번에 영원히
예수님은 우리의 실수가 자신의 완전하심에 묻혀 사라지게 하신다. …
당신과 내가 천국에 서서 상을 받을 때에도 오직 한 분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아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이미 잊으셨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의 반경은 얼마나 넓은가? 온 세상을 품을 만큼 넓다. 그 세상에 당신도 포함되는가? 그렇다면 당신도 하나님의 사랑에 포함된다.
포함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다. 똑똑하지 않으면 대학은 당신을 제외시킨다. 자격이 안 되면 사업도 당신을 젖혀놓는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착하지 않으면 일부 교회마저 당신을 따돌린다.
하지만 대학과 사업과 교회는 당신을 빼놓을지 몰라도 그리스도는 당신을 끼워주신다. 자신의 사랑의 넓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 앞에 그분은 한 손을 오른쪽으로 펴고 또 한 손을 왼쪽으로 펴신 뒤 그 위치에 못을 박아버리셨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죽어간 사실을 당신이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이 사랑에도 필시 한계가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드는가? 하지만 간음한 다윗은 그 한계를 찾지 못했다. 살인범 바울도 그 한계를 찾지 못했다. 배반자 베드로도 그 한계를 찾지 못했다. 삶에 관한 한 그들은 바닥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는 바닥이 없었다.
그들도 당신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목록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했다. 얼마든지 믿어도 좋다. 당신의 이름을 그곳에 쓰신 그분은 당신의 이름을 발음하는 법까지 알고 계신다.
*요한에게 예수님의 죽음보다 큰 비극은 없었다. 3년 전에 요한은 직업마저 내던지고 이 나사렛 목수에게 운명을 걸었다. 주초에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만 해도 요한은 꽃잎 휘날리는 시가행진에 흠뻑 취했었다. 오, 사태가 그렇게 급박하게 뒤바뀔 줄이야! 일요일에 그분을 왕이라 불렀던 사람들이 금요일에는 그분을 죽이라고 소리쳐댔다. 요한의 앞날은 친구 예수님과 함께 이 수의에 싸여 무덤 속에 봉해졌다. 이 수의는 절망을 알리는 가시적인 물건이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그 금요일의 요한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금요일의 비극이 일요일의 승리로 변하리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후에 그는 “성경에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요한복음 20:9)고 고백했다.
그가 토요일에 한 일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도 없고 따로 알려진 정보도 없다. 다만 한 가지를 알 뿐이다. 일요일이 되었을 때도 요한은 그곳에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요한을 찾으러 가자 과연 그는 그곳에 있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 주님의 몸은 이제 생명이 없다. 요한의 친구도 묻혔고 요한의 미래도 묻혔다. 그러나 요한은 떠나지 않았다. 왜? 부활을 기다리느라? 아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다시 입술을 떼시거나 손을 움직이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일요일의 환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거기 있었는가?
그는 얼마든지 떠날 만도 했다.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 그를 잡으러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군중은 십자가형 한 번으로 족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더 많은 처형을 원했을 수도 있다. 요한은 왜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대답은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 수 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달리 갈 데가 없었을 수도 있다. 돈이 없거나 기력이 없거나 방향 감각을 상실했거나…그 전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머무른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는 자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요한에게 그분은 그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이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친구였다.
우리는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 친구가 죽은 후에라도 마찬가지다. 요한은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다. 요한은 그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다락방에서도 예수님 곁에 있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 곁에 있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발밑에 있었다. 그리고 장사 지낸 후에도 한달음에 달려갈 거리에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의 뜻을 이해했는가? 아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기쁘게 받아들였는가? 아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떠났는가? 아니다.
당신은 어떤가? 요한의 입장에 처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당신의 삶에 그 토요일이 찾아올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제의 비극과 내일의 승리 사이 어딘가를 지날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을 떠나는가? 아니면 그분 곁에 그대로 남아 있는가?
요한은 남아 있기를 택했다. 그렇게 토요일에 그곳을 지켰기에 일요일에도 그곳에 있다가 기적을 본 것이다.
*말리고 접힌 채로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친구들이 시신을 가져갔다면 수익에 싸인 채 그냥 가져가지 않았을까?
적들이 가져갔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그렇지 않고 어떤 이유로든 친구나 적들이 수의를 벗겼다면 그렇게 가지런히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만큼 신경을 썼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친구도 적도 시신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누가 그랬단 말인가?
이것이 요한의 의문이었다. 바로 그 의문이 그의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 다른 제자(요한]도…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8).
죽음의 옷자락 속에서 요한은 생명의 능력을 보았다. 하나님이 수의같이 비참한 것을 사용해 한 사람의 삶을 바꾸시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은 곧잘 그런 일을 행하신다.
그분의 손 안에서, 결혼식장의 빈 포도주 항아리는 능력의 상징이 된다.
과부의 동전은 후한 드립의 상징이 된다.
베들레헴의 볼품없는 구유는 헌신의 상징이 된다.
사형의 도구는 그분의 사랑의 상징이 된다.
그렇다면 그분이 죽음의 옷을 취해 생명의 화신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이 놀랄 일인가?
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도 비슷한 일을 하실 수 있을까? 오늘의 비극의 흔적을 취하여 승리의 상징으로 바꾸실 수 있을까? …
이런 변화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다고 믿는다. 당신도 요한이 한 대로만 하면 된다. 떠나지 말라. 곁에 있으라.
말씀의 앞부분을 잊지 말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그것이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마음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했다. 예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고 언제나 수긍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분을 사랑했다.
그분을 사랑했기에 그는 그분 곁에 머물렀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목마름으로 쉴 대로 쉬어 목구멍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그들의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음소리는 점차 들릴락 말락 작아졌다. 세 사람은 죽은 듯 보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그때 그분이 소리를 지르셨다. 누가 머리카락이라도 잡아당긴 듯 뒤통수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죄패를 내려치셨다. 그리고 소리 지르셨다. 단도로 휘장을 베어내듯 그분의 비명이 어둠을 가른다. 세 개의 못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곧은 자세로 서서 그분은 마치 잃어버린 친구를 부르는 사람 마냥 부르짖으셨다. "엘리!"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픔이 배어 있다. 그분의 커다란 눈동자에 군병들의 횃불이 비쳐 아른거린다. "나의 하나님!"
화산처럼 폭발하는 통증조차 무시한 채 그분은 어깨가 못박힌 손보다 높아지도록 잔뜩 몸을 곧추세우신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군병들이 쳐다본다.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멎는다. 바리새인 중 하나가 비꼬듯 코웃음 친다.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분은 소리 질러 하늘에 질문을 올렸다. 당신은 하늘도 소리 질러 대답할 줄 알았으리라.
들려온 대답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이 들려온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한낮의 어두움이 덮처왔다.
그분이 마지막 호흡을 받으시는 순간 갑자기 땅이 부르르 떤다. 바위가 터지고 군병이 비틀거린다. 그러고는 침묵이 깨진 것 만큼이나 갑작스레 다시 침묵이 찾아온다.
지금은 온 사방이 조용하다. 조롱도 끝났다. 조롱하던 사람들이 다 가고 없다.
군병들은 시체를 수습하느라 바쁘다. 두 사람이 왔다. 옷차림을 보아 평범한 이들은 아니다. 그들의 동기는 순수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넘겨진다.
우리 앞에는 그분의 죽음의 유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상자 속에 담긴 세 개의 못.
세 십자가의 그림자.
핏자국이 묻은 가시 면류관.
기이하지 않은가? 이 피가 사람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라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 못들이 당신의 죄를 십자가에 박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를 용서하시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없애버리신다! 우리는 실수를 그분께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저지른 실수만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현재 저지르며 사는 실수도 원하신다! 오늘 당신의 삶에도 실수가 있는가? 음주가 과한가? 직장에서 남을 속이는가? 배우자를 속이는가? 돈 관리가 엉망인가? 인생의 관리가 엉망인가?
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하지 말라. 넘어지지 않는 척하지 말라. 그대로 다시 시합에 뛰어들려 하지 말라. 먼저 하나님께 가라. 넘어진 후의 첫걸음은 십자가를 향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당신은 십자가에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당신의 나쁜 순간들로 시작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당신의 화난 순간도 하나님께 내어드리라.…
당신도 이미 깨우친 사실 아닌가? 우리에게는 되받아 싸우는 기질이 있다는 것. 내가 당한 그대로 갚아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품고 다니며 호통치고 으르렁거린다는 것.
하나님은 당신의 그 명단을 원하신다. 그분은 그의 한 종에게 영감을 주어 이렇게 쓰게 하셨다.
"사랑은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5. 쉬운성경).
그분은 우리가 이 명단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기 원하신다. 쉽지 않다.
"그 자들이 나한테 한 일을 보라!" 우리는 항거하며 자신의 상처를 가리킨다.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을 보라!" 그분은 그렇게 일깨우시며 십자가를 가리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