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으로 발행되는 이번 주의 경주신문을 보다가 ‘경주버섯축제’에 관한 기사를 접했다.
지난 10월 16일 건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화려하게 열렸단다.
전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경주 버섯의 우수성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하며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는 이 축제는 버섯의 소비확대와 생산농가의 소득증대를 위해 지난 94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사진전시회, 버섯요리시식회, 버섯품평회, 버섯다듬기대회, 직거래장터가 열려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니 고향발전의 위한 행사가 매년 성공적으로 열렸다니 참 반갑다.
경주 지역의 대표 농산물로 알려진 경주버섯은 양송이 생산량이 경북지역 90%와 전국 20%를 차지하며 한우의 전국 1위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효자 생산품목이다.
양송이, 느타리, 새송이, 표고버섯 등 각종 버섯품평회에서는 관내 작목반에서 생산한 버섯의 우수성과 품질을 평가하여 우수 농가를 뽑았는데 수상자들 가운데는 그리운 고향마을 이름과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이 보여서 더욱 반갑다.
건강식과 웰빙 음식으로 각광 받는 버섯.
영양은 많으나 칼로리는 적어서 미용식으로도 인기가 있는 버섯.
버섯에 관한 기사가 유난히 내 눈을 끈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께서 잠시 농촌지도소에 근무를 하실 때 농촌근대화의 바람이 일었고, 양송이 버섯재배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버섯의 종균을 가지고 와서 마을의 젊은 사람들에게 교육도 하시며 재배를 해보자고 권유하신 분이시다. 그러니까 경주버섯축제의 근원은 아버지와 나의 고향마을인 방내리라는 곳이다.
아버지는 젊고 유능한 마을 젊은이들(주로 친척들이 많았다.)에게 버섯을 보급시켰고, 우리 마을은 관내에서 가난한 마을에서 부자마을로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으며 양송이버섯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옆 마을로 옆 마을로 점점 버섯재배농가수가 불어났다.
마을 뒷산 이름을 따서 ‘단석산 버섯’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버섯은 많이 보급되기 전에는 참으로 귀하게 취급받았다.
왜냐하면 거의 전량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수출되었기에 외화벌이에도 큰 역할을 했었기에.
당시에 우리 마을은 버섯 재배 후 ‘방내 주식회사’라는 버섯 통조림 공장까지 만들어서 마을에서 재배한 버섯을 곧바로 버섯통조림을 만들어 수출되었고, 회사가 생기면서 아버지는 줄곧 그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맡아서 남은 정력을 쏟으신 마지막 일터이기도 했다.
양송이버섯이 우리 마을에 돈을 많이 벌게 해 주기도 했지만 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함께 했다.
어느 날, 밤늦도록 일에 매달리느라 쓰러지신 아버지께서는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
다행히도 큰 병은 아니었지만 빈혈로 쓰러지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가슴이 몹시 아팠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버섯재배단지가 갑자기 무너져 내려 속에서 일하던 분들이 다치기도 했던 일.
냄새가 지독한 계분(닭똥)을 섞어서 짚을 썩힐 때 발생하던 모락모락 김과 함께 동네 아저씨들이 흐르는 땀을 식힐 시간도 없이 바쁘게 거름을 뒤집으며 일하던 모습들.
재배농가들의 보이지 않는 세력다툼에 누군가 쌓아둔 짚 볏가리에 불을 질러서 밤새워 양동이에 물을 나르고, 생소나무 가지로 얼굴이 새까맣토록 불을 껐던 일.
적당한 습도유지와 온도유지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던 마을 사람들.
아랫마을 사람들의 수질 오염 문제로 항의가 높아서 머리 맞대고 대책을 세우며 의논하던 사람들.
너무 무리한 투자로 빚더미에 쌓여 빚잔치하고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까지......
양송이 버섯이라는 특용작물 재배로 인해 우리 고향마을은 젊은이가 고향을 지키고 일하는 %가 높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다들 농촌을 버리고 떠날 시기에 고향에서 대를 이어서 버섯을 재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가까운 예로 나의 7촌 조카는 서울대학교 농대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특수작물재배에 앞장서고 있을 정도다.
버섯이 우리 마을에 들어올 때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70년대였으니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내 고향의 대표 얼굴이 되어주고 있는 경주버섯.
‘경주버섯연구회’에서 새로운 재배기술을 위해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고품질의 버섯을 생산하면서 이 축제가 끊어지지 않고 나날이 발전하여 숱한 사연과 어려움의 바탕위에 세워진 버섯인 만큼 더욱 단단하게 자리 잡아서 나날이 발전하길 바란다.
첫댓글이 글을 읽으니 저도 아련한 추억들이 많이 떠 오르네요.....먼저 고향의 좋은 소식에 기분이 좋구요,우리 학교 다닐적도 방내 살던 친구들 대다수가 양송이버섯을 재배했었지요.....6개 부락중에 아마 유독 부자동네 맞았던것 같으네요....친구집에 놀러가서 (떼거지로...약 10여명정도,부모님께 하룻밤 허락 받고)수박밭
이랑.....둘러보던 생각이 납니다.지금으로 말할것 같으면 바로 현장학습이 되겠죠? ㅎㅎ ㅎ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다들 잘 살고 있겠지요?.....잊고 있었던 하나의 추억이 이 글을 대하는 순간 어제일처럼 선명히 떠 오르는 것은 ....고향과 옛 친구는 확실히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네요.....행복한 마음이밀려오네요.
이 태희 잘 알죠....얼핏 들은듯도....... 그랬네요. 서울서 약대 나와서 독일 유학 갔다 오고 뒤에 약국 한다는 소식까진 들었는데....6학년때도 한 반이었지요....태희하곤 은근히 라이벌(?) 1학기땐 제가 부반장하고,2학기땐 태희가 부반장하고...그땐 여자는 반장 할 수 없었어요....그런데 저는 전업주부랑께요
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 저도 아련한 추억들이 많이 떠 오르네요.....먼저 고향의 좋은 소식에 기분이 좋구요,우리 학교 다닐적도 방내 살던 친구들 대다수가 양송이버섯을 재배했었지요.....6개 부락중에 아마 유독 부자동네 맞았던것 같으네요....친구집에 놀러가서 (떼거지로...약 10여명정도,부모님께 하룻밤 허락 받고)수박밭
이랑.....둘러보던 생각이 납니다.지금으로 말할것 같으면 바로 현장학습이 되겠죠? ㅎㅎ ㅎ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서 다들 잘 살고 있겠지요?.....잊고 있었던 하나의 추억이 이 글을 대하는 순간 어제일처럼 선명히 떠 오르는 것은 ....고향과 옛 친구는 확실히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네요.....행복한 마음이밀려오네요.
행복하다니 저도 즐겁습니다. 산골아이님. 그럼 제 동생과 태희의 관계도 알겠네요. 동갑이면서 태희에겐 제 동생이 고모^^ 였으니 ...
이 태희 잘 알죠....얼핏 들은듯도....... 그랬네요. 서울서 약대 나와서 독일 유학 갔다 오고 뒤에 약국 한다는 소식까진 들었는데....6학년때도 한 반이었지요....태희하곤 은근히 라이벌(?) 1학기땐 제가 부반장하고,2학기땐 태희가 부반장하고...그땐 여자는 반장 할 수 없었어요....그런데 저는 전업주부랑께요
맞아요. 같은 서울대학교 출신인 경주( 안강 )사람이랑 결혼해서 두 사람이 함께 독일갔다가 지금은 서울 살고 있을거에요. 흠마^^ 라이벌이었군요. 고향가면 소식 물어올게요 *^^*
좋은 고향소식에 경사가 났네요~~~두분의 구수한 고향소식의 대화로 카페가 후끈달아 오르네요..고향이 다른 저는 꼬리말다는것조차 외로울것 같은데 ( 너무 틈이 없어서리ㅎㅎㅋㅋ)
미로님,틈은 비집고 들어 오면 생기는겁니다.그러다가 더 넓은 자리 차지하구요..ㅎㅎ 도로 내쫓지나 마시우~
여러분의 정겨운 고향나누기 좋습니다. 나그네는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지요. 어느 한곳에 정을 붙여주기 어렵습니다. 소중한 조국 띵이지만......
버섯축제(잔치)는 언제부터 열었나요.... 경주도 볼거리 먹거리를 많이 만들 수 있는 곳이네요... 사실 음식맛은 선뜻 다가오지 않아요...... 버섯과 소는 유명하지요....축제라는 어감보다는 잔치가 저는 더 정겨워요.
잔치가 더 어울리지만 요즘은 축제라는 말로 거의 통하네요. ^^ 정겨운 말들이 더 익숙했으면 좋겠어요. 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