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릉참봉 경주이공[창효] 묘갈명
(德陵參奉慶州李公[昌孝]墓碣銘)
예천(醴泉) 북쪽 5리 지점에 있는 아미산(峨嵋山) 남쪽 보젓골(寶儲谷) 임좌에 있는 묘는 고 덕릉참봉(德陵參奉) 이공의 묘소다.
공은 경주 사람이다. 이름은 창효(昌孝)고 자는 연승(衍承)이다. 신라 공신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대대로 우리 나라 대성이 되었다.
고려조를 거쳐서 본조(本朝: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높은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고조 권생(權生)은 영변판관(寧邊判官)이고 증조 계상(繼祥)은 사정(司正)이고 조부 문좌(文佐)는 호가 세촌(細村)인데 점필재(佔畢齋:金宗直의 호) 문하에서 수학하여 맑은 명성과 곧은 절조가 있었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었는데 상사(上使:상사 밀에 부사와 서장관이 있어서 이 세 사람을 삼사라고 한다.)가 탐욕하고 비굴함을 공박하다가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밀려 나갔다가 관저에서 하세하였다. 유림이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지냈다.
부친 절(節)은 진사인데 비로소 서울에서 외가를 따라 예천 금곡(金谷)에 집을 짓고 살았다. 문장이 전아하고 아담하였다. 호는 금헌(琴軒)이라고 하였다. 선비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석전의 女로 生 一女하고 선비는 봉화금씨(奉化琴氏)니 첨지(僉知) 원수(元壽)의 따님이다.
공이 중종 경진(1520)에 출생하여 선조 계사(1593)에 하세하였다. 수(壽) 74세였다. 부인은 평산신씨니 처사 세용(世容)의 따님이고 좌의정 문희공(文僖公) 개(槩)의 5대손이고 현감 동래(東萊) 정구령(鄭龜齡)의 외손녀다. 공의 묘소를 북제동(北堤洞) 간좌에 썼다.
공이 문헌(文獻:문으로 다스린다.)의 세상에 태어났고 또 명선(明宣:명종 선조)의 성대를 만나서 이미 사관(祠官: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에 선출하는 명에 응하였으나 임천(林泉:전원 또는 은둔에 적합한 산간 벽지)에 물러앉아 세상의 영화를 끊고 높고 쾌하며 수를 누려 일생을 보냈으니 의당 덕업과 사적 행실이 전할 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난리를 겪어서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징빙할 수가 없다.
오직 덕을 넉넉히 쌓아서 자손에게 남겨 주었으니 그 덕의 보답이 뒤에 오는 후손들에 있어서 지금에 이르도록 대대로 계속되어 안팎 자손들이 번성하여 그치지 아니하니 이것으로써 공이 어질었다는 것을 징험할 수 있다. 후손 생원(生員) 황주(璜周)와 사인(士人:벼슬하지 않은 선비) 일영(日榮) 택영(宅榮) 등이 장차 묘소에 묘표를 세우려 하는데 비석은 이미 준비되었다.
생원의 손자 선하(善河)가 여러 부형의 명령으로 질박하고 화려하지 않은 글을 요구하므로 다만 그 세계와 자손들만을 기록하여 무궁토록 어리고 몽매한 사람을 가르쳐 주려 한다. 생각건대 나 주종도 외람되게 외손의 서열에 있으니 그 서차를 밝히는 바다. 참람스럽고 두려워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어 명을 쓴다.
양양(襄陽)의 북쪽에
산은 높고 물은 활발하네
공의 덕을 상징함이
과연 길러서 이에 와서 피었도다
멀고 멀어 유유하다
산은 깎아서 평평히 할 수 있고
물은 마르도록 할 수 있으나
안팎으로 갈린 파의 후손들은
곤곤히 흐르는 물 같아 다할 줄 모르도다.
외예손 함양 박주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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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종(朴周鍾)
[생졸년]1813년(순조 13)~1887년(고종 24)
박주종(朴周鍾, 1813년∼1887)의 자는 문원(聞遠)이고, 호는 산천(山泉)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조선 후기 학문에서 백과전서학이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가는 추세 속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14편의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동국통지(東國通志)』를 편찬하였다. 1862년(철종 13) 삼정구폐책을 올려 우등 5인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