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3번째 기사
이종준(李宗準,1458~1499)이 김일손의 행적에 대하여 공초(供草)하였다. 이종준은 김종직(金宗直,1431년 세종 13~1492년 성종 23)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일손(金馹孫,1464년 세조 10~1498년 연산군 4)과 친했는데, 이 공초는 김일손이 7월 13일에 ‘진사(進士) 권작(權綽)의 일은 이종준에게 듣고 졸(卒)이라 쓰고 드디어 기사(記事)를 한것’이라고 진술한 것에 대한 공초였다.
그러면 이종준의 공초를 살펴보자. “병오(丙午) 정미(丁未) 연간에 신이 내자직장(內資直長,從7品)이 되고, 김일손이 내섬직장(內贍直長, 從7品)이 되었사온데 하루는 임금께서 후원에 납시어 활쏘는 것을 구경하옵기로, 신과 일손이 설비를 맡게 되었습니다.”
1486년~1487년 사이에 이종준은 내자직장(內資直長,從7品)이고 김일손은 내섬직장(內贍直長, 從7品)이았다. 내자시(內資寺: 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는 호조 소속의 관서) 이종준의 공초는 이어진다. “신의 동료 허계(許誡,미상~1502년 연산군 8)가 신에게 묻기를 ‘그대가 바로 권작(權綽)의 사위인가? 하므로 신은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김일손이 말하기를 ‘권작(權綽)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기에 신은 말하기를 권작은 계유년(1453) 진사에 합격하였고, 그 뒤에 죽산(竹山) 청산현(靑山縣)의 훈도(訓導)가 되었는데, 그 당시 백관의 가자(加資)가 잦았는데도 권작은 성질이 옹졸하여 고신(告身)을 내놓지 아니하고 단지 청산 훈도의 고신만을 내놓았을 따름이다.’라고 말하자 다시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정미년(1487, 성종 18)에 신이 평안도 평사(評事,正六品)가 되었는데, 권작은 신에게 편지를 통하여 말하기를 ‘김일손이 청주(淸州)를 지나면서 시(詩)를 부쳐왔다....이 시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르러 왔는냐? 하면서, 그 시를 신에게 부쳤는데, 바로 오언 절구였습니다.
그런데 위 두 구는 글자가 지워져서 볼 수가 없었고, 아래 두구에 이르기를 “세상에 자양(紫陽, 송나라 유학자/주자)의 붓이 없으니[世無 紫陽筆], 누가 진대(晉代)의《춘추》를 기록하랴?[雜記晉《春秋》?” 하였는데, 신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평안도) 평사에서 체임되자, 권작은 신에게 말하기를 ‘일손은 어떤사람이며, 그 시는 어떠하더냐?’ 하므로 신은 알지 못하겠다 대답하고, 나중에 일손을 보고서 물었더니, 김일손은 말하기를 계유년(癸酉年,1453에 계유정란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측근인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에 진사에 합격하고, 마침내 벼슬을 아니했으니 나는 그를 조행(操行)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장인이 두 번째 훙도가 되었으니 벼슬을 안 한 것도 아닌데, 너는 어찌 망령이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김일손은 이종준의 장인 관작(官爵)을 절개를 지킨 선비라고, 사초에 썼는데, 이종준은 김일손의 사초가 망령스럽다고 공초한 것이다.
글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연산군 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사적 제3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