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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미 대통령 방한 때 예배를 본 여의도 침례교회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 왔을 때 목사님 역할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한미관계가 아주 안 좋았지요?=한국 정계에서 카터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저 개인적으로는 카터가 조지아주 지사일 때 거기서 부흥회를 했고 그 양반을 여러 번 만났어요. 구면인 셈이었죠. 그분이 대통령 출마할 때 내가 기도를 많이 해드렸어요.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주한미군) 철군문제가 계속 대두되는 거야.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이 너무 독재한다고 하면서 밀어주지 않았어요. 이래저래 별로 좋은 교감이 없었지. (1979년 여름) 한국에 오면서 자기가 생각한 건 미군철군이랑 인권문제를 타결하려고 맘먹고 온 거죠. 카터는 박정희 대통령이 제공한 영빈관에 묵지 않겠다고 해 박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무시를 당했어요. 우리 집 찾아온 손님 잘 해주려고 하는데 싫다고 한 거죠. 카터는 그냥 미군들과 지내겠다 했었죠.그래서 1차 정상회담은 실패에요. 팽팽했죠. 그러고 나서 카터가 종교지도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외무부가 주선했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교단 총회장들도 와서 1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는데 카터가 저보고 제일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하더라구요. 지금 지나간 이야기지만 차지철 경호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대사관 분위기를 잘 좀 해달라 그래요. 전날 청와대에서 주최하는 리셉션에 나는 초대가 안됐었는데, 나는 내가 아는 친구가 한국에 오는데 대통령 초청도 못받은 주제에 대사관에서 뭐 어쩌고 하는 게 어렵다, 그냥 조용히 있겠다고 했죠. 이미 명단이 다 나간 상태이고...나한테 뭐를 부탁하면서 분위기 조절을 해달라고 하면서 나를 부르지 않은 게 좀 그랬죠. 어쨌든 마지막으로 초청이 되서 그 자리에도 참석하게 됐지.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조용기 목사 등이 있었어요.청와대 리셉션에 400명 정도가 모였는데 다들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부부동반으로 온 거야. 청와대에 들어서니까 경호원들이 다 우리 집사람한테 인사를 하는 거야. 우리 집사람이 경호원들한테 일주일에 두 번씩 영어를 가르쳤거든요. 우리야 뭐 마지막으로 가야지 앞줄에 설 수가 없잖아. 들어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사람을 유심히 보더라고요. 아주 뚫어지게. 카터부인이 나를 나를 보자마자 부둥켜안았거든요. 도대체 저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데 미 대통령부인이 저렇게 포옹을 하냐, 이러고 시선이 다 집중됐죠.(김 목사는 주한 미대사관에서 한국종교지도자들과 카터 일행의 모임으로 화제를 금세 돌렸다.)=카터 대통령 첫 마디가 “내 친구가 먼저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해 내가 먼저 인사를 했지요. 내 인사말 뒤 고 한경직(영락교회) 목사님이 한 마디 하시고, 김추기경이 한마디씩 했어요.김추기경께서 “(카터더러) 당신이 한국에 왔기 때문에 지금 김영삼 김대중씨가 가택연금 돼있는 걸 아냐”고 하니 카터가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그게 끝나고 카터가 여의도침례교회 예배에 같이 가자고 해요. 그래서 내가 대사 자리에 앉아 같이 갔지요. 나는 거기서 작심을 했어. 그리고는 카터대통령더러 “내가 지금 박대통령을 전도를 하려고 한다. 도와 달라. 우리 대통령 그렇게 악한 사람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전도대상으로 삼고 기도도 몇 번했다. 내가 하는 것보다 카터 당신이 박대통령을 전도하면 더 나을 것”이라고 했지. 여의도 도착해서 여기가 (빌리 그래엄 목사의) 그 전도대회 했던 곳이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더라고. 그러면서 자기 여동생이 한국을 그렇게 오고 싶어한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가 초청할 테니 오라고 하라고 했어요. 교회에 도착하니까 한기만 담임목사가 인사를 하더라고. 카터내외하고 딸만 다른 의전 없이 나랑 예배를 보러간 거지.한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나한테 긴급전화가 왔다고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차지철 실장 전화였어. 예배 마치고 바쁘지 않으면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해요. 예배가 예정보다 20분이나 일찍 끝났어요. 한기만 목사가 긴장을 했는지 설교가 일찍 끝났던 거지. 시간이 남아서 아래층 유치원에 내려갔지. 거기 유치원 의자에 카터 내외와 같이 앉아 등소평이 미국에 온 이야기, 중국에 전도사 보내는 이야기 등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쭉 했어요. 의전수석이 들어와서 시간이 됐다고 해서 카터는 국회로 가고 나는 청와대로 갔지....
김장환 목사
김장환 목사는 1973년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를 통역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크게 알렸다.극동방송 김용호 전 심의실장은 그에 대해 “이밴절리스트(Evangelist)로서 철저한 복음주의자,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 그리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는 에너자이저(Energizer)”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후 김 목사 자신도 늘 3E 역할을 잘 해내리라 다짐한다고 했다. 김 목사는 “다시 태어나도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다 미국 유학 가 만난 미국인 아내 트루디 김 사이에 낳은 두 아들, 요셉(47) 요한(41)씨도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손자들에게도 수시로 목사가 되라고 독려한다. 김 목사는 “혼혈인 세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란 것이 가장 자랑스럽고 감격스럽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말한다.1934년 수원 출생으로 밥 존스 고교, 밥 존스 대학 및 신학대학원(신학석사)을 졸업하고 미국 트리니티대, 사우스웨스트 침례대 등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받았다. 2000~05 침례교세계연맹(BWA) 총재를 지냈으며, 현재 극동방송 사장,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한국 10대선교회 YFC(Youth Fof Christ) 명예이사장을 맡고 있다. 1993년 2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극동방송> 전파를 통해 북방정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섬기며 사는 기쁨> <제자가 되려면> <값진 유산> <생명을 걸고 사랑하라>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라> 등을 냈다.
자료 출처: 한겨레신문
KBS2TV
1980년 11월 12일, 광주민주화 운동과 서울의 봄을 유혈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보다 효과적인 언론통제를 위해 전면적으로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48] 이로 인해 방송과 신문의 겸영 및 주재기자제가 금지되고 지방지는 1도 1지로, 5개사로 난립되었던 뉴스통신사는 단일 뉴스통신사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으로 개편되었으며, 거기에 CBS의 보도기능과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이 폐지되었고, TBC, DBS가 KBS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KBS는 TV 채널 2개, 라디오 채널 6개[49]를 가져 초 거대 방송사로 등극하였고, 이에 따라 기존 TBC-TV는 12월 1일부로 KBS-2TV로 명칭을 변경했다.
초기의 KBS 2TV는 TBC 프로그램 일부에 교양, 교육 프로그램을 섞은 편성이었다가 1981년 KBS 3TV(現 EBS 1TV) 개국과 함께 교육 프로그램이 이동,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 위주의 편성 기조를 이어갔다. 동년 3월 7일 KBS 1TV와 동반으로 광고방송을 개시했다. 2TV의 광고 중 4블록짜린 평일에 20분, 주말/공휴일은 5블록 25분으로 정했다. 그러나 광고가 안 팔린다는 이유로 TBC 시절처럼 전시간대 전 프로그램 광고 편성으로 편성방침이 변경되었고, 1982년 1월 25일부터 1TV와 광고방식이 달라졌다. 1981년 방송자료[50] 1980년대 후반 이후로는 1TV가 상대적으로 공익적인 채널 포지션을 지님에 따라서 오락 프로그램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1980년대 당시에는 KBS 1TV처럼 별도의 NEXT 영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엔딩 영상이 나온 후에 이어서 OOO가 방송됩니다라는 안내멘트가 뜨지 않은 채 그대로 광고가 나오고 광고 - 공익광고, 프로그램 예고 - ID영상 - 다음 프로그램의 시작 순으로 EBS 1TV의 광고 방식과 유사하다.# NEXT 영상이 등장하게 된 건 1990년부터로 추정된다.
1993년 가을부터 '그린정신'을 제창하면서 KBS 전체의 상징색을 녹색으로 하였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의 KBS 로고가 녹색인 건 이 때문이다. 다만 방송중단 화면에 표출되는 폰트의 경우 2006년까지도 초록색 로고와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해 2003년 사용이 중지된 엑스포체가 사용되었다. #[51] 1994년 10월 1일 KBS 1TV의 광고가 폐지된 이후, KBS의 TV 광고는 2TV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다.[52] 하지만 이 때문인지 가끔가다 수신료를 올리고 KBS 2TV의 광고를 폐지하는 방안이 나오곤 한다. KBS 2TV의 광고는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 시간을 확대시켰지만 KBS 1TV는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전면 폐지를 했고,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이 사라져서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편성하지 않게 되었고, 수신료로 운영을 하고 있다.[53] 1TV의 광고는 제품 없는 광고가 있지만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 없이 프로그램을 곧바로 방송을 했다.[54] 1TV의 채널은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이 없는 이유는 '이 프로그램은 여러분의 수신료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방송이 끝날때는 나오기도 하다.[55] 하지만 이는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과 함께 채널 이미지가 뚝 떨어질 수 있다.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또한 2003년 12월까지는 워터마크를 화면 오른쪽 상단에 흐릿하게 보이게 하기도 했다.
1995년 시보 방송이 3초 시보(뚜! 뚜! 뚜! 땡!)에서 멜로디 형태로 변경되었다.[56] 출처[57]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젊은 채널'이라는 슬로건[58]을 내걸고, 비, 장나라 등 젊은 가수들이 로고송을 만들었으며, 오렌지색 공모양의 KBS가 그려진 마스코트인 K2(동글이)를 2016년 7월까지 사용하였다.[59] 이와 더불어 2TV의 상징색이 오렌지색 계열로 고정되어 한동안 사용하였다. 지금은 케빗으로 나오는데 케빗(Kebit)은 콘텐츠를 흡수하기위해 지구로 내려온 우주 생명체이다. 그 후로 친구들인 도도와 누리라는 캐릭터도 개발해 '케빗 프렌즈(Kebit Friends)'가 탄생되었다.
2014년 12월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는 '다함께 KBS2'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2016년 9월에는 가을 개편으로 'TV는 2TV가 재밌습니다' 또는 'TV는 eTV가 재밌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2017년 9월부터는 "TV는 2TV, 재밌다" 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었다. 2022년 현재 메인 슬로건으로 쓰이고 있다. 2019년부터 2021년 3월까지 서브 슬로건이 적용되었는데, 2019년 6월부터 2019년 12월까지는 "둘2, 같2"를 내걸었고, 2020년 1월부터 2021년 3월까지 "재미 잼2"를 내걸었다.4. 디자인[편집] 몇년전까지만 해도 KBS2는 다른 방송사들과는 달리 몇몇 디자인을 프로그램마다 다르게 내보내는 전통이 있었다가 2021년 5월 31일부터 내일을 여는 빛으로 모두 통합되었다
4.1. 개별 디자인[편집]제공자막 디자인의 경우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드라마나 일반 프로그램에서 블루바 화면에다가 제공자막을 표기하는 방식을 채택했으며[60] 오락프로그램에서는 제공자막을 다채로운 색으로 표기하기도 했지만, 1984년 하순부터는 블루바 화면을 없애고 제공자막을 화면에다가 합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61] 하지만 보도프로그램이나 디즈니 만화동산의 경우에는 90년대 중반까지도 블루바 화면에다가 제공자막을 표기했다. 세로쓰기 자막 시절에는 글꼴이 통일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1993년 6월부터 90년대 말까지는 KBS 2TV 저녁 뉴스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흰색 바를 두고 그 옆에 엑스포체로 제공을 알리는 자막이 통일되었고[62] 그러다가 2000년경부터 프로그램 별로 아예 바를 세우지 않는 방식의 개별 디자인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63] 각 프로그램들마다 제공자막 디자인이 달라졌고, 2003년 개편 때부터는 흰색바로 제공표시하는 방식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프로그램 별로 다른 스타일로 제공자막을 표시하는 방식이 정착되었다가 2016년 가을 개편[64]으로 인해 제공자막 디자인이 1개의 디자인으로 통일되었다. 기존 프로그램의 경우는 뉴스장르 제외하고 제공자막 디자인이 전부 통일되었지만, 신규 프로그램의 경우는 거의 통일된 디자인으로 나오나, 아주 간혹가다 개별적인 디자인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65] 통일된 제공자막 디자인에는 '제공'이 붙혀져서 나온다. 그리고 통일된 제공자막에 케빗(kebit)이라는 캐릭터도 같이나오는 경우도 있고, 케빗이 없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66] 2019년 초 2차 개편으로 인해 제공자막 디자인이 반원 형태로 변경되었다.[67] 2021년 5월 개편으로 인해 제공자막 디자인이 빛을 쏘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단, 뮤직뱅크와 뉴스장르 프로그램은 아직까지도 개별적인 디자인을 사용한다.
'이 프로그램은 간접광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프로그램마다 모두 달랐으나, 2016년 가을개편으로 하나의 디자인으로 통일된 상태이다.[68]시청등급 고지화면 디자인의 경우 2001~2006년까지 검정색 바탕이었다가 이후 2013년까지는 각 프로그램 전용 개별 디자인을 사용하다가 2013년 10월 중순부터 KBS에서 직접 만든 통일 등급고지영상이 도입되었는데[69], 처음 도입할 당시에는 드라마[70]하고 해피 투게더, 개그콘서트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사용되고 있었으며 2015년부터 KBS의 디자인이 전체적으로 바뀌면서 등급고지 역시 바뀌었고 2016년 가을개편으로 인해 드라마와 위에서 설명한 2개의 예능도 같은 시청등급 고지화면으로 변경되었다.[71] 또한, 현재 시청등급 고지화면이 없는 프로그램도 있다.[72]
참고로 낮에 편성되는 애니메이션의 경우 오프닝과 본편 사이에 광고가 없는 경우에 한해 KBS 1TV와 동일한 편성 방식(오프닝 전에 등급고지영상부터 내보내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가끔 오프닝이 시작하자마자 채널 로고(워터마크)와 등급마크를 송출하는 경우도 있다 (e.g. 터닝메카드 40화, 원피스[73]) 또한, 프로그램 방송 중 좌측 상단에 프로그램 정보(프로그램 로고)가 없는 프로그램도 가끔식 있다.[74 시각 표시 디자인은 KBS 1TV와 달랐는데 1984년부터 1991년까지 1TV가 세븐 세그먼트 디자인의 디지털 시계로 시각표시했던 것과 달리 2TV는 일본식 시각 표시 디자인을 썼으며[75] 1991년 요일이 표시되면서 1TV와 같은 디자인이 쓰이기 시작했고 1995년까지 1TV와 같은 디자인을 쓰다가 1995년 중순부터 1TV가 신명조체 디자인을 썼던 반면 2TV만 요일 표시가 한자에서 한글로 바뀐 1992년부터 쓰인 명조체 디자인을 적용하다가 1996년부터 고딕체 디자인으로 1TV와 다시 통합되었고[76] 2003년 12월부터 시각 표시가 0:00에서 00:00으로 변경, 크기가 축소되어[77] 이후 약간의 보정 이외에는 2022년 현재까지 같은 디자인을 쓰고 있다.
출처:(위키백과)
여의동생태공원
여의도샛강 생태공원은 저습지로 주변 환경이 열악한 상태로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었다가, 1997년 9월 25일 국내 최초로 자연환경 보존을 위해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서울 한복판 빌딩숲 사이에 위치한 공원이지만, 온갖 야생화가 피어나는 들판과 버들치, 송사리, 붕어가 사는 샛강이 있다. 갈대와 물억새가 무성하게 자라는 샛강 생태공원에는 6km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20∼30m간격으로 설치된 안내판을 통해 우리 토종식물에 대해 공부할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으로 천연기념물 황조롱이를 비롯해 흰뺨검둥오리, 왜가리, 제비꽃, 말즘, 버들치 등 희귀 동식물이 살고 있다. 생태공원에는 자연을 해치지 않기 위해 벤치와 매점은 물론, 동식물들의 휴식과 수면을 위해 가로등도 설치하지 않았다. 연중 이용이 가능하나 동물의 산란기에는 일부구간의 출입이 제한될 수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3-05-1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