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사는 승가대학으로 유명하며 예전에는 일반인 출입금지 사찰로도 유명하였다. 현재 사찰의 출입은 허용되나 아직도 극히 제한적으로 둘러 볼 수 있으며 항상 스님이 따라 다니며 사찰 경내에서는 일체의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들어가는 입구는 정말 맑은 계곡의 물소리와 산새소리로 자연 그 자체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면서 이러한 자연을 유지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사찰로 통하는 길을 걸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둥근 기둥을 양 옆으로 받쳐 둔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을 한 일주문이다.
→ 청암사 일주문
현판에는 불령산청암사(佛靈山淸巖寺)란 예서체로 된 듯한 글씨가 있는데 근세의 명필가 중 한 명인 성당 김돈희의 글씨라 하며, 원래 이 자리가 재 위치는 아니라 한다.
청암사는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운 절이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나 1911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이듬해부터 3년에 걸쳐 다시 세웠다.
→ 청암사 전경
이제 입구에 들어서면 만나는 범종각은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불전 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있다.
→ 청암사 내경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다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21호)은 2중 기단 위에 현재 4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나 본래는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청암사 석조물표석(왼쪽)과 다층석탑(오른쪽)
기단은 아래ㆍ위층이 거의 비슷한 높이인데 보통 아래층 기단이 낮고 위층 기단이 높은 일반적인 탑들과는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면마다 불상을 양각하여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큰 편으로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 청암사 석탑 석등
또한 이 탑은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도선국사가 세운 탑이라고도 전하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성주군 어느 한 논바닥에 있던 것을 당시 청암사 주지였던 대운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도 한다. 청암사 홈페이지에는 무슨 근거인지 모르나 1938년 제작된 것이라 한다. 그 사연과 내력이 정말 많은 탑 중의 하나이다.
다층석탑 뒤로 있는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20호)은 정면 3칸ㆍ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안쪽 법당내부에는 연화대좌에 선정인을 하고 있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1912년 주지 대운당스님이 중국 항주 영은사에서 조성한 불상이라 한다.
양쪽 협시 보살상은 없으며 후불탱, 산신탱, 신중탱, 칠성탱, 독성탱 등 여러 점의 탱화와 소종(小鐘), 수번(繡幡)이 있다. 1976년 10월 청기와로 번와 불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대웅전이란 편액은 근세의 명필가인 성당 김돈희의 글씨라 한다. 청기와가 눈에 들어온다.
이외에 많은 건물들이 있으나 이제부터는 정말이지 일반인 전면 출입 금지구역이다.
→ 청암사 석등
청암사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보광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88호)은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가 장희빈 때문에 폐위되어 이 곳 청암사 극락전에 은거하였는데, 이 때 극락전 서쪽에 인현황후의 복위를 빌기 위해 보광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뒤 광무 9년(1905)에 다시 세웠으나 1911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안에는 42수의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고 벽면에 산신도(山神圖), 독성도(獨聖圖), 신상도(神像圖) 등이 걸려 있으며 상벽에는 불화를 그려 놓았다.
이외 건물로는 육화전ㆍ진영각ㆍ정법루ㆍ비각ㆍ객사 등이 있다. 이중 육화전은 옛날에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며 또 정법루는 현재 종각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청암사에서 다소 떨어진 먼 거리의 수도암을 찾아 나선다. 수도암으로 가는 길에는 할머니께서 직접 만드시는 손두부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 이 곳의 손두부는 유명하여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을 정도이다.
→ 수도암 전경
수도암에 다다른 순간 마치 암자라기 보다는 대형 사찰에 온 듯 한 느낌이었다. 탁 트인 공간과 시원한 풍광과 건물의 규모라든지 여러 면으로 볼 때도 암자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높은 축대 위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ㆍ서쪽에 서 있는 쌍탑(보물 297호)으로, 신라 헌강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다.
→ 수도암 동 삼층석탑(왼쪽)과 서 삼층석탑(오른쪽)
동탑은 단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각형의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ㆍ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탑은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크게 줄었으나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하다. 1층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기둥만 새겨져 있고, 그 사이에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동탑보다 얇고 넓으며 밑받침은 5단이다.
→ 수도암 동 삼층석탑의 사방불
두 탑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곳곳에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탑은 1층 몸돌의 위가 좁고 감실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고 서탑은 지붕돌 밑의 간격과 지붕돌이 넓다는 것이 특징이다. 약광전 앞에는 석조물 표석이 있는데 마멸이 심하나 창주도선국사(創主道詵國師)라고 새겨져 있다.
→ 약광전 석불
→ 약광전 석불 수인
약광전에는 높이 1.54m의 고려시대 석불좌상(보물 296호)이 모셔져 있다.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단아한 모습인데 마모가 심해 세부수법을 자세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양 어깨에 걸쳐져 있는 옷의 주름은 도식적이고, 손모양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모아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선정인 모습이다. 보주를 들고 있다는 설명이 일반적인 설명이나 자세히 보면 보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약광전 석불대좌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ㆍ덩쿨무늬ㆍ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좌(臺座)는 4각형으로 윗부분에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을, 아랫부분에는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을 조각하였다.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형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생각된다.
→ 대적광전
→ 대적광전 석조 비로자나불
바로 옆 왼쪽 대적광전에는 높이 2.51m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호)이 모셔져 있는데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으로 민머리에는 육계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네모나며 풍만하고, 긴 눈ㆍ작은 입ㆍ평평한 콧잔등에서 위엄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느슨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단정하고 강인한 느낌을 준다. 거구의 불상이면서도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특이한 손 모양과 함께 당시 시대양식의 반영인 것 같다.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쪽은 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8각형을 이루고 있다. 맨 위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연꽃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어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균형잡힌 모습을 나타내는데, 위축되고 긴장감이 감소하며 탄력이 줄어든 점으로 볼 때 신라 말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수인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불상을 불당골이라는 거창의 한 마을에서 만들어 옮겨올 때 그 크기가 너무커서 절쩔매고 있는데 한 노승이 나타나더니 등에 업고 마구 달리더란다. 그런데 그만 수도암 입구에 다다른 노승은 칡넝쿨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노승이 불상을 내려놓은 뒤 산신을 불러 “부처님을 모셔 가는데 칡넝쿨이 웬말이이냐? 앞으로는 절 주위에 일체 칡이 자리지 못하도록 하거라.”하고 크게 호통을 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로 지금까지 수도암 근처에는 칡이 일체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창살 꽃 무늬도 그런데로 볼만하다.
맑은 시냇물과 산이 자뭇 그윽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그 곳 청암사와 수도암 김천이긴 하지만 외곽에 위치해 있으며 직지사와는 별계로 또 다른 사찰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조용하고 한적하여 마음의 안식처로는 이 보다 좋은 사찰이 또 어디 있으라.
시간에 구애받지 받지 않고 넉넉함과 여유로움으로 다가오는 이 곳 산사의 하루도 어느 듯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있다.
산사를 즐겨 찾는 이들은 늘 가까운 곳과 먼 곳을 택할 때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정할지 모르나 세상의 모든 번뇌를 잊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이 보다 더 한 장소가 없는 곳이 바로 이 곳 청암사와 수도암이 아닐까 한다.
<붓다뉴스> 김환대 2003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여여님^^ _()_
여름에 수도암에 들러서 기도할때 정말 환희로움을 느꼈던 곳입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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