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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이라고 하면 연대기 비슷한 것을 생각하게 되지만, 저는 그런 서술방식에 묶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회고록은 흔히 저자의 주관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제게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객관/주관의 구분이 그리 확고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책을 쓰라고 해서 썼습니다. 한동안은 쓰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이런 책을 쓰는 일은 자아도취에 빠지라는 유혹과도 같았거든요. 그러나 결국 자아도취에 빠져서 쓰고 말았습니다[웃음]. 회고록 생각을 해보니까 어떻게 써야 할지 알 것 같더군요. 회고록 집필은 꼭 해야만 하는 집착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지요. 끝내서 기쁩니다. 이 회고록은 제가 써온 다른 글들과는 장르가 다릅니다. 제게 편지를 보내온 많은 분들이 이 회고록의 여러 다른 면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한나의 아이」 끝부분에서 교수님은 회고록 집필 과정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임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인생의 여러 사건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시각을 갖게 만든 건가요?
제가 이 책을 쓰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인 줄 몰랐다면 터무니없는 말이 되겠지요. 하지만 제가 이 책으로 분명하게 드러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곧 친구들이 나를 어떤 존재로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이 책이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주장에서 우정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린 시절 텍사스의 연합감리교단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 도중에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나가지 않았다고 쓰셨습니다. 감정적 호소에 거짓되게 반응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인식이 있었나요?
거짓 감정을 꾸며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님은 책으로 구원받으셨나요? 칼리지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 노터데임대학교를 거쳐 듀크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지성인으로 살아온 여정이 교수님이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만들었습니까?
저는 정말 책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책은 친구입니다. 저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친구들 중에 책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읽기는 쓰는 법을 배우는 훈련이고 반대로 쓰기는 읽기의 훈련입니다. 저는 읽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만, 글을 써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교수님의 첫 부인(앤)께서 정신질환을 앓으셨는데요. 교수님과 아드님(애덤)은 그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셨습니까?
우리는 서로 특별한 우정을 나누면서 버텼습니다. 원반던지기나 자전거 타기 같은 활동을 같이 했어요.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달리기도 시작했습니다. 저와 폴라의 결혼식을 앞두고 대학을 다니던 애덤을 공항에서 맞아 차에 태우고 오는 길에 저는 애덤에게 잘 지내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잘 못 지낸다고 그러더군요. 애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의 결혼 때문이에요. 그동안 아빠와 저는 부부처럼 함께 엄마를 보살폈어요. 그러니 이건 아빠와 저의 이혼에 해당하거든요.” 우리는 전진해야 했고 이전과 똑같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애덤처럼 좋은 아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일이지요.
교수님은 교회의 비범한 중요성을 줄곧 강조해오셨지만 교수님이 속하셨던 교회들은 외부에서 볼 때 어떤 면에선 상당히 평범해 보입니다. 그 교회들은 어떻게 교회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도우셨지요. 제가 속했던 교회들 덕분에 제 삶은 매우 풍성해졌습니다. 그 교회들이 없었다면 생각도 못했을 방식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그 교회들이 특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해온 일은 복음의 묵시록적 특성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묵시록적 특성에 힘입어 우리는 아플 때 서로를 보살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관계가 깨어질 때 서로를 돌보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시간을 냅니다. 교회는 대안이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세상에서 대안이 되어 이 일을 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속했던 평범한 교회들은 세상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런 삶을 구현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교수님이 처음 다니신 교회는 연합감리교단 소속이었는데 텍사스에 있다 보니 기능적으로는 침례교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루터파 학교인 오거스태나, 로마가톨릭계 학교인 노터데임 대학교에서 가르치시다가 연합감리교단 소속의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돌아오셨지요. 각 조직에 머물 때마다 해당 전통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셨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우셨는데요, 지금은 성공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시지요. 교수님의 절충주의를 어떻게 설명하시는지요? 아니면 교회일치주의인가요?
저는 교파적 정절 관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저처럼 몇몇 사람들을 교파적 고향이 없는 상태로 만드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교회일치의 어떤 조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말해둡니다. 저는 감리교 신자입니다. 존 웨슬리를 훈련된 회중생활을 통해 가톨릭을 회복시킨 사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 홀리 패밀리 성공회 교회의 수찬자로 있지만 그것이 제 자신을 감리교도로 이해하는 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공회는 웨슬리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상당 부분 구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마가톨릭이 많은 부분에서 옳다고 생각합니다. 모종의 인위적 합의로 과거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기독교의 일치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저는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즉 우리의 교파적 정체성 안에서 각자의 은사에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치를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공회는 웨슬리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을 상당 부분 구현하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교파 전체가 아니라 구체적 회중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회중주의자입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사실은 아니지만, 우리는 회중주의자입니다. 이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성찬의 공동체들이 서로 분리되지 않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큰 과제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 주교/감독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찬 공동체들의 분리를 막는 또 다른 방법은 사람들을 한 회중에서 다른 회중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기독교의 일치를 회복할 것인가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일치”라는 말은 교회 조직에 대한 일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죽이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민족주의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도록 허용한 교회분열은 특히 종교개혁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신학자라면 당연히 공적 기도와 설교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교수님의 경우는 둘 다 오륙십 대에 익혔고 좋아하게 되셨다고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목회자의 소명을 받은 폴라와 결혼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폴라 길버트는 홀리 패밀리 교회의 교구 생활 담당 부목사이다. 연합감리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성공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다.] 아내는 제게 수업 시작 전에 기도를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있다 보니 교회에서 설교 요청을 점점 많이 받게 되었고 제가 설교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서와 씨름하는 것이 신학적 성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만큼 제게 활력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목회사역에 들어서는 학생들을 신학적으로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십니까?
저는 학생들이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 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려주려 합니다. 매주 사람들에게 설교 요청을 받는 일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우리의 삶이 설교에 달려 있습니다. 설교하고 성찬을 집전하는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모험인지 학생들이 느낄 수 있게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교수님을 비판하는 이들은 교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retreat[‘물러나다’와 ‘리트릿(을 가다)’의 뜻이 다 있다] 성찬에만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리트릿을 권하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화를 내는 것일까요?[웃음] 저는 리트릿이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만, 우리는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물러날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세상이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참여를 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세상을 위해 살 찢고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마치고 드리는 기도에는 이런 간구가 들어있습니다. “이제 우리를 평화의 사절로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해 기쁨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힘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아멘.” 이것이 어떻게 물러남일 수 있습니까? 성찬을 통해 이렇게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다면, 어떻게 성찬이 자기 안에 갇히는 일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많은 학생들이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그들이 복음주의권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주면 좋겠습니다. 저는 복음주의자들의 에너지를 높이 삽니다. 그들의 예수님 사랑에 감탄합니다. 그러나 종종 그들이 그 두 가지를 너무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한 나머지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교회가 본질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듯합니다. 저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성서를 읽음으로써 과연 누구에게 영향을 받고 마음을 쓰게 됩니까. 성서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때로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지나치게 사적인 부분을 강조하여 교회를 파괴하는 면이 있지 않나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학생들이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교회라는 맥락을 회복하여 기독교적 확신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