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보산[天寶山]
정의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과 양주시 회암동에 걸쳐 있는 산.
명칭 유래
조선 시대 어떤 임금이 난을 당하여 이 산에 피신하였고, 난이 끝나고 나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산을 금은보화로 치장하도록 신하에게 명하였다. 하지만 난리를 치르고 난 직후라 금은보화를 구하기 어려웠고, 이에 신하가 산의 이름을 ‘하늘 밑의 보배로운 산’이라고 칭하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진언하여 천보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조선 초인 태종 때에 이미 천보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으므로 이 전설을 사실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태종과 단종·세조 등이 이곳에서 사냥을 한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에 왕들이 수차례 천보산을 찾아 왔던 것은 사실이고, 방문 목적이 전쟁과 비슷한 모습을 연출하는 사냥이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난리를 피한 임금’ 전설이 생긴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자연 환경
천보산은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의 서남쪽, 소흘읍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양주시 회암동의 동쪽에 위치해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능선이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고, 소나무 군락이 많다.
현황
천보산의 높이는 423m이다. 천보산의 양주시 쪽 산자락에는 고려 때 3대 사찰이었던 양주 회암사지[사적 제128호]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 비[보물 제387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 대사 탑[보물 제388호], 양주 회암사지 무학 대사 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호] 등이 있다. 포천시 쪽에는 천보산 자연 휴양림이 있고, 경기도 학생 포천 야영장이 위치해 있다. 천보산 자연 휴양림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로서, 2012년 4~5월 국립 환경 과학원과 한국 자연 환경 연구소의 생태 조사 결과, 하늘다람쥐의 서식지가 수십 군데 발견되기도 하였다. 하늘다람쥐는 주로 백두산 일원에 보이는 동물로, 우리나라 중부 지방에서는 매우 희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포천 군지』(포천 군지 편찬 위원회, 1997)
「포천시 관광 지도」(포천시, 2012)
「포천 천보산에 하늘다람쥐 대거 서식」(『조선 일보』, 2012. 7. 8)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월2일 08시 고읍로 아파트 14층에서 본 천보산의 일출
태양이 뜨다 (일출=日出)
연초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1년 365일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지만 연초에 보는 일출은 좀 더 특별하고 더 의미있는 것 같다. 이번 시간에는 일출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진행되며, 일출 시각은 어떻게 변하는지 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지구의 자전이 진행되면서 점차 태양의 윗부분이 수평선에 접하게 되고 마침내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것을 일출이라고 한다. <출처: 기상청>
일출이란?
해돋이 또는 일출(日出)은 수평선 위로 태양이 뜨는 것을 말하며, 반대로 수평선 아래로 태양이 지는 것을 해넘이 또는 일몰(日沒)이라고 한다. 지구는 남극과 북극을 잇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지구의 북극에서 보았을 때 시계반대방향(서쪽→동쪽)으로 자전하므로, 지표면에서 볼 때 태양은 동쪽하늘에서 뜨게 된다.
일출시 대기굴절에 의한 태양의 상대적 위치를 보여주는 그림. <출처: (CC)TWCarlson at wikipedia.org>
지구는 1시간에 15도씩 자전한다. 자전이 진행되면서, 점차적으로 태양의 윗부분이 수평선에 접하게 되고 마침내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른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태양빛이 지구의 대기에 굴절되어 약하게나마 태양빛이 인지되는 순간을 여명(黎明, dawn)이라 하며, 여명부터 일출 전까지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상태를 박명(薄明, twilight)이라 한다. 일몰 후에 하늘에 잠시 밝고 푸른빛이 남아 있는 상태 역시 박명이라 부르며 일몰 후 박명의 끝을 박모(薄暮, dusk)라 부른다. 따라서 하루는 지구에 대한 태양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자정-새벽-여명-박명-일출-아침-낮-저녁-일몰-박명-박모-밤-자정’의 순서로 구분할 수 있다.
하루의 부분(여명부터 박모까지)을 나타낸 그림. <출처: (CC)Why Not A Duck at Wikipedia.org>
박명의 종류
박명은 일출 전 또는 일몰 후에 하늘에 빛이 남아 있는 상태를 일컫는데, 수평선에 대한 태양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시민박명, 항해박명 및 천문박명으로 구분된다. 박명의 지속시간은 관측자의 위도 및 태양의 적위에 따라 다른데, 저위도 지방에서는 짧고 고위도 지방에서는 길다. 박명 현상이 밤새도록 계속되어 어두워지지 않은 상태를 백야(白夜, midnight sun)라고 하는데, 고위도 지방에서 여름철에 일어난다.
시민박명
태양의 중심이 수평선에서부터 수평선 아래 6도 사이의 구간에 위치할 때의 박명이다. 이 시기에는 빛이 남아 있어, 육안으로 사물이 구분 가능하며 조명 없이도 일상적인 야외 생활이 가능한 시기이다. 서울에서는 약 30분간 지속된다.
항해박명
태양의 중심이 수평선 아래 6도~12도 사이의 구간에 위치할 때의 박명이다. 이 시기에는 육안으로 사물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지만 일상적인 야외 생활은 불가능한 시기이다. 수평선을 구분할 수 있으며 잘 알려진 별들도 관측 가능하다. 서울에서는 약 30분에서 40분간 지속된다.
천문박명
태양의 중심이 수평선 아래 12도~18도 사이의 구간에 위치할 때의 박명이다. 거의 대부분의 별들을 관측할 수 있는 시기이다. 서울에서는 30분에서 40분간 지속된다.
일출 시각의 변화
일반적으로 일출 시각은 위도, 경도 및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지구가 23.5도 기울어진 채로 자전 및 공전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북반구의 경우 여름철로 갈수록 낮의 길이는 길어지고 밤의 길이는 짧아지는 반면, 겨울철로 갈수록 낮의 길이는 짧아지고 밤의 길이는 길어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여름철에는 아침 5시경에 해가 떠서 19시 50분경에 해가 지며, 봄과 가을철에는 아침 6시경에 해가 떠서 19시경에 진다. 겨울철에는 아침 7시경 30분경에 해가 떠서 17시 30분경에 해가 진다. 2012년 1월 1일 기준일출 및 일몰 시각은 서울은 7시 47분 및 17시 24분, 대전은 7시 42분 및 17시 25분, 부산은 7시 32분 및 17시 22분, 서귀포는 7시 37분 및 17시 37분이었다. 지역에 따른 일출 및 일몰 시각은 천문연구원의 일출 및 일몰 시각 계산기를 이용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출 시각은 위도와 고도별로도 차이가 나는데, 고도가 높을수록 그리고 위도가 적도에 가까울수록 일출이 빠르다. 우리나라에서 일출 시각이 가장 빠른 곳은 독도와 울릉도 성인봉이다.
출처:(이미지 사이언스)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한 이승만[李承晩]
요약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 독립협회, 한성임시정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로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선 후, 4·19 혁명으로 사임했다.
출생-사망본관호별칭활동분야출생지주요수상주요저서
1875.3.26(음) ~ 1965.7.19 |
전주(全州) |
우남(雩南) |
초명(初名)은 승룡(承龍) |
독립운동, 정치 |
황해 평산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49) |
《독립정신》《일본내막기》 |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우남(雩南), 초명은 승룡(承龍)이다. 1875년(조선 고종 12) 3월 26일(양력 4월 18일)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위의 두 형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으로 지냈다.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귀국,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지만, 미국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12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14년 박용만(朴容萬)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西歐)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國民會)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同志會)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武斷派)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雩南派)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島山派)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7월 24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이승만 연보출생 1875~ 사망 1965.7.19
1875 | 3월 26일(음력)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에서 이경선과 김해 김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
1877 | 서울 염동으로 이사하여 한문 공부를 함. |
1895 |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과 영어를 배움. |
1898 | <협성회주보>, <매일신문> 창간함. 중추원 의관으로 선임. |
1904 | 박영효와 함께 고종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수배되어 징역을 살다 특사로 출옥. 미국으로 떠남. |
1910 | 조지워싱턴대학 컬럼비아 학부, 하버드대학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과정 졸업. 귀국하여 YMCA 한국인 학감으로 활동. |
1919 |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창호를 만남. 서재필로부터 3.1 운동 소식을 들음. 대한국민회의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고 국무총리로 추대됨.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선포. 6월. '대한공화국 대통령' 자격으로 미,영, 불,이,일 등 정부 수반과 파리강화회의 의장에서 공문 발송(Republic of Korea 처음으로 공식 사용됨). 9월 5일.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제로 헌법 개정.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됨. |
1920 | 12월 28일. 상해임시정부청사에서 초대 대통령 취임식. |
1934 | 10월 8일. 뉴욕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 |
1943 | 5월 15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하는 공식 서한 발송. |
1946 |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했다 5월 6일에 결렬됨. 9월 12일. 돈화문 앞에서 피격 당함. |
1947 |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 발표.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 총선거안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설치안이 가결됨. |
1948 |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 실시. 7월 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 7월 24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함. |
1949 | 전국 첫 인구조사 실시, 농지개혁법 공포. 남북통일방안 발표, 일본에 약탈 문화재 반환을 요구. |
1950 | 6.25전쟁 발발.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 후, 부산에 피란갔던 정부의 서울 환도. |
1951 | 1월 4일, 중국의 참전으로 1.4후퇴. 9월 20일. 중국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11월 19일. 자유당 창당하여 총재로 취임함. |
1952 | 7월 4일. 발췌개헌안 통과시킴. 8월 5일. 직선제로 정, 부통령 선거.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함. |
1954 | 11월 29일. 제2차 개헌(사사오입) 통과시킴. |
1956 |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 실시,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됨. |
1958 | 12월 24일. 국가보안법을 여당 의원의 단독으로 통과시킴.(국가보안법 파동 일어남) |
1960 | 3.15 부정선거. 4월 19일. 4.19 혁명 발발 후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함. 5월 9일. 정계 은퇴 성명 후, 하와이로 출국. |
1962 | 3월 17일. 정부의 반대로 귀국이 좌절됨. |
1965 |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 유해를 미 군용기로 운구. 7월 27일. 국립묘지에 안장. |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연천역[ 漣川驛 , Yeoncheon Station ]
기본정보
경원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전곡역과 신망리역 사이에 있다. 1914년 10월 5일 영업을 시작하였다. 1945년 8 · 15 광복과 함께 북한에 귀속되었다가 1951년 수복되었다. 통근열차가 운행되며 여객, 화물,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연혁
날짜내용 주변 관광지동막계곡
동막골(내산리)은 약 571,211m2의 드넓은 면적의 계곡으로 맑은 물이 깊은 계곡을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고 계곡 주변에는 기암괴석과 자연림이 어우러져 자연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대부분 지역의 수심이 낮아 어린이 안전사고 발생이 거의 없으며 가족단위 관광지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또한 견지 재미가 솔솔하다.
역에서의 거리 : 5.73km 태풍전망대
태풍전망대는 천하무적 태풍부대에서 1991년 12월 3일 건립한 것으로, 서울에서 약 65km, 평양에서 약 140km 떨어진 중면 비끼산의 가장 높은 수리봉에 위치한다. 처음에는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2km 지점에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이 설정되었으나, 1968년 북한이 휴전선 가까이 철책을 설치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1978년에 부분적으로 철책을 설치하였다. 태풍전망대는 휴전선까지 800m, 북한 초소까지는 1,600m의 거리에 떨어져 위치하고 155마일 휴전선상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유명하다. 태풍전망대에는 국군 장병들이 종교 집회를 가질 수 있는 교회 · 성당 · 성모상 · 법당 · 종각 등이 있고 북녘에 고향을 두고 떠나온 실향민의 망향비와 한국전쟁의 전적비, 6.25 참전 소년전차병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전시관에는 이 곳으로부터 2km 떨어진 임진강 필승교에서 수습한 북한의 생활필수품과 일용품, 그리고 휴전 이후 수십 회에 걸쳐 침투한 무장 간첩들이 이용한 침투 장비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출처:(철도역 정보)
▼연천역 주변풍경
2024-02-0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