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만난 그곳 9...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집필 장소 ‘최순우 옛집’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본문 中)
1994년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흑백 초판 당시, 책을 사들고 왔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로 또 한 권을 선물로 받았을 때도 사양하지 않고 두 권을 나란히 꽂아두었다. 왠지 한 권을 분실하게 되면 안 될 것 같아서 귀하게 보관해 온 것이다. 성북동 최순우 옛집은 동절기는 개방하지 않아서 겨우내 기다렸다가 4월 1일 개방하는 날 방문했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인솔자의 설명을 들으며 마당 안에서 기념사진 찍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고 기특해 보였다. 봄 날씨가 추워서 아직 개화가 늦어지고 있는데, 생전의 선생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가꿔왔던 수십 종의 화초들이 겨울잠에서 깨어 봄소풍 나온 것처럼 삐죽빼죽... 노란 생강나무 꽃은 산수유보다 더 빨리 만개했다. 진달래 한 그루가 손님을 맞이하는 색시처럼 곱게 서있고, 문간에 자줏빛 목단도 건강하게 움터오고 있었다. 중정 한 가운데 향나무는 이 고택보다도 먼저인 130년 수령이라고 송지영 학예사가 전한다.
혜곡 최순우기념관은 등록문화재 제268호로서, 1930년대에 지은 전형적인 경기지방 전통 한옥 양식으로 ㄱ자형 본채와 ㄴ자형 사랑채, 행랑채가 마주 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형 구조를 이룬다. 가운데에는 중정이 있고 중정 옆에는 작은 우물이 남아 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한국미의 발견에 힘쓴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1984년 사망하기까지 기거했던 주택으로, 밀리언셀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다.
곳곳에서 선생의 체취와 고풍스런 인품을 읽을 수 있었다. 단원 김홍도 글씨인 낮잠 자는 ‘오수당’(午睡堂)’, 문을 닫아걸면 곧 깊은 산중이라는 뜻으로 선생이 직접 쓴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추사 김정희 글씨로 매화, 대나무, 수선화의 방인 ‘매죽수선재’(梅竹水仙齋)’, 정말 망중한의 시간을 만끽하고 싶은 아름다운 공간이다.
성북동 한옥의 양옥화 추세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매입, 2004년 복원하여 ‘시민문화유산 제1호’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안채는 전시 공간으로 이용하고 동편 행랑채는 사무실, 서편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게 공간 등으로 꾸며져 있다. 민간 차원에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문화유산이다.
최순우의 한국미 사랑이 물씬한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가 눈에 띈다. 책을 넘겨보니까 5분 거리에 살던 간송 전형필과 절친했던 이야기도 실려 있어서 내친 김에 간송미술관으로 달렸다. 아쉽게도 간송미술관은 5월과 10월에만 개방한다. 미술관 주변 역사의 숨결이 깊이 밴 동네를 뚜벅뚜벅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