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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3 - 그랑 콜롬비아(1-A :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19세기에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되기 전에 라틴 아메리카는 누에바 그라나다(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및 에콰도르) 와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 페루 및 라 플라타(아르헨티나 등) 부왕령의 4곳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1804년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흑인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는 중남미
에서는 최초로 독립을 이룩했고, 1810년 들어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
점령하면서 식민지 본국인 스페인이 흔들리니 중남미에서는 독립 열기가 고조됩니다.
베네수엘라는 16세기에 스페인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자.... 토착민들은 조직적으로
죽음을 당하였으며 구아이카이푸로(Guaicaipuro), 타마나코(Tamanaco) 같은
원주민 지도자들은 스페인군의 습격에 저항하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정복되었습니다.
타마나코는 카라카스의 설립자 디에고 드 로사다의 명령으로 처형되었고 베네수엘라
는 1522년 스페인에 의해 쿠마나(Cumaná) 에서 부터 식민지가 시작되었습니다!
16세기 초부터는 산토 도밍고의 아우디엔시아로 부터 관리되었고, 18세기
초에는 베네수엘라의 대부분이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la Nueva Granada)에 속하게 되었으며 1776년 이후로는 도독령으로 개편됩니다.
베네수엘라는 독립을 위한 잇따른 봉기 실패 후에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던 시몬 볼리바르의
동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 장군의 지휘하에 스페인이 나폴레옹
의 침략을 받은 다음 해인 1811년 7월 5일에 10개 주 중에서 7개 주가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로부터 베네수엘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1812년 카라카스의 대 지진과
왕당파 야네로 반란으로 인해, 1812년 6월 20일과 29일 베네수엘라의
라 빅토리아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지명을 따서 “라 빅토리아 전투” 라고 합니다.
왕당파(스페인군) 의 사령관인 도밍고 데 몬테베르데는 반군(독립군)인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의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라 빅토리아 라는 도시를 공격했지만,
반군에 기병대 증원군으로 오히려 포위된 베네수엘라 독립군에 의해 격퇴 됩니다!
몬테베르데는 산 마테오로 후퇴했으며 푸에르토 카벨로에서는 억류되어 있던 스페인
전쟁 포로들이 산 펠리페 성을 장악했는데 그런데 스페인군은 카라카스 인근의
반란은 왕실에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고 미란다를 설득합니다.
설득이 얼마나 교묘했던지...... 미란다는 스페인군의 몬테베르데와 협상에 들어가서는
휴전이 체결되었는데, 며칠 후 몬테베르데는 협상을 저버리고 사면을 받은
많은 애국자(독립투사)들을 체포하니 이로써 베네수엘라 첫번째 공화국은 붕괴됩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1813 년 6월 15일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 스페인인(왕당파)을 사형 선고하는
전쟁 법령을 공포하고는, 찬탄할 만한 작전을 지휘해 8월 7일 쿠마나를 해방시킨후 제2
공화국을 수립하니 스페인군은 호세 토마스 보베스를 바르로 벤토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호세 토마스 보 베스의 스페인군이 진압에 나선 가운데 애국자(독립투사)들은 싸움에서 단결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때 베네수엘라는 두 개의 다른 정부가 있었으니 하나는 쿠마나에
있었고 마리 뇨가 이끌었으며, 다른 하나는 카라카스에 있었고 시몬 볼리바르가 지배했습니다.
왕당파들과 독립파인 애국자들 사이의 대결은 1814 년 2 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니
호세 토마스 보 베스가 이끄는 후자는 볼리바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백인만을 위한
공화국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해서 "라네로스 llaneros" (말탄 사람들) 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1813년 Admirable and Eastern 캠페인에서 우세를 잡은 독립 주의자들은 국가의 요충지를
대부분 장악했으니 스페인군은 반격해 잃어버린 땅을 되찾을 준비를 하자, 시몬 볼리바르
는 푸에르토 카 벨로 기지에 많은 병력을 운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왕실 군대가 코로와
마라 카이 보를 심각하게 위협했기 때문에 라파엘 우르 다 네타를 서부 전선으로 보냅니다.
스페인군 호세 토마스 보 베스의 왕당파들은 진격해 1814 년 2월 3일 라 푸에르타 La Puerta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애국자(독립투사) 3천명을 사상시키는 승리를 거둔 후에는 베네수엘라 독립
운동을 종식시키기 시작했으니 베네수엘라 전국은 애국자와 왕실주의자 사이의 전쟁터가 됩니다.
스페인군의 총사령관 호세 토마스 보베스 José Tomás Boves 는 라 푸에르타
전투 La Puerta 의 첫 번째 전투에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니 스페인
군대의 수장은 그의 대리인인 프란시스코 토마스 모랄레스가 이어 받게 됩니다.
새 사령관 프란시스코 토마스 모랄레스는 카라카스와 볼리바르가 있는 발렌시아 사이의 통신
을 끊기 위해 호세 펠릭스 리 바스가 방어한 라 빅토리아 시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라 빅토리아시의 리바스 Ribas 가 직면 한 가장 큰 문제는 병사 부족이었으니 찾은 해결책
은 시의 대학과 세미나에서 800명의 학생들을 모집하는 것이었는데, 그 중에는 Santa
Rosa de Lima Seminary 와 Royal University of Caracas 의 85 명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어머니는 모집된 학생들이 12세에서 2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강제동원을 거부했으며
그들 중 누구도 군사 훈련을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바스 Ribas 는 작은
군대를 모아 La Victoria 시로 향했으니 10 일에 마을에 도착하여 방어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라 푸에르타 전투 승리후, 왕실주의자(왕당파)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Simón Bolívar 가 이끄는
운동을 완전히 물리칠 전략을 수립했으니 그 전략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는 발렌시아에 있던
볼리바르를 수도 카라카스에서 분리하는 것이었으니 때문에 La Victoria 시를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스페인 군대를 총지휘하는 호세 토마스 보 베스 Boves 는 애국자(독립투사) 들을 물리 치기
위해 라 빅토리아 La Victoria 시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으니 발렌시아와 카라카스
사이의 통신을 막는 것 외에도 라 빅토리아시는 수도 카라카스로 나아갈 거점 지역이었습니다.
스페인 군대는 2,500 명의 군대를 동원했는데 라 빅토리아 La Victoria 시는 아라구아 Aragua 계곡
에 위치하고 있으며 카라카스와 발렌시아 사이의 도로에 있는 여러 언덕과 산 사이에 위치했습니다.
앞서 라 푸에르타 La Puerta 전투에서 사령관 보베스 Boves 가 입은 부상으로 모랄레스 Morales 는
라 빅토리아 La Victoria 시를 점령하려는 왕실 군대를 이끌어야 했는데 2 월 초, 그의 군대가
마을에 접근하니 그곳에 호세 펠릭스 리바스는 훈련이 되지않은 군대를 지휘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라카스에서 모은 젊은이(학생)들은 산 페드로 강 유역의 오래된 길을 따라 라 빅토리아로
가는 길을 걸어야 했으니, 그런 다음 그들은 Las Cocuizas 도로를 따라 계속해서 Aragua
계곡으로 향했고 마침내 2 월 10 일 그들은 방어해야 할 라 빅토리아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스페인 왕실 군대의 수적 우월은 La Victoria 전투가 유일한 사례가 아니니 전쟁 첫해 동안, 독립시
평등한 권리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지만 지주와 다른 사업가들은 계속해서 노예를 사용했습니다.
스페인군 사령관 보베 José Tomás Bove 는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 1813년
11월 1일에 그는 반도 데 과야 발을 공포했고, 그곳에서 백인 소유자의 재산을 군인들에게
분배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이 정책은 자신의 지위를 개선하려는 많은 가난한 사람을 끌어들였습니다.
12일 오전 7시경 모랄레스가 이끄는 스페인군 병사들이 산 마테오 길을 걷고 있었는데,
이 도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시를 흐르는 아라구아 강을 가로지르니 애국자
(독립군) 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스페인 사령관은 군대를 세개의 부대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부대는 같은 San Mateo 도로를 통해 도시로 들어가기로 했고 나머지 두 부대
는 각각 북쪽과 남쪽에서 도시를 공격하기로 했는데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왕실
주의자 들은 4,000 명의 병사 (1,800 명의 소총병과 2,200 명의 창병) 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 무장은 우수했으며 여러문의 대포를 가져 왔는데 반면에 라 빅토리아시의
수비군(독립군)의 수는 1,500 명에 불과했고 게다가 훈련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전투는 하루종일 계속되었으며 싸움은 도시 거리에서 벌어졌습니다.
공화당원(독립군)들은 왕실주의자(스페인군) 들의 수적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게
저항을 했으니 오전 8시에 스페인군은 일단 격퇴되었지만 남쪽에서 공격을 재개
했고 오후 5 시까지 이러한 공격은 항상 동일한 결과로 무려 9 번까지 반복 되었습니다.
스페인군이 마요르 광장 모퉁이에 돌입해 수비군을 몰아붙일 때 독립군 220명의 기병을
지휘하는 비센테 캄포 엘리아스 대령이 라 카브레라 에서 도착했으니 스페인군은
당황하는데 증원군이 도착하자 그동안 방어에 몰두했던 리 바스는 비로소 반격할수
있었으니150 명의 병사들에게 캄포 엘리아스 기병을 위해 길을 열라고 명령했습니다.
스페인군은 증원을 온 독립군 기병에 의해 쫓겨나 후퇴해야 했으며 황혼무렵 리바스
는 전투를 멈추고 모든 사람들이 도시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으니 La Victoria
전투는 공화당 측에서 100명이 사망하고 300명이 부상을 입으며 끝났으며
후퇴한 왕실 주의자들은 정확한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발렌시아와 카라카스 간의 통신을 막기위한 스페인군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으니 이 전투로
베네수엘라 제2 공화국이 계속 존속할수 있었고 독립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로 간주
되니 볼리바르 Bolívar 는 리바스 Ribas 가 거둔 승리 소식을 들었을 때 Vencedor de
Tiranos 라는 칭호로 그를 표창했으며 또한 La Victoria 는 공화국 임시 수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라 빅토리아 전투 패배에도 불구하고 왕실 주의자(스페인군)들은 즉시 군대
를 재편성 할수 있었으니..... 며칠 후 산 마테오 전투가 벌어졌고,
재정비 되어 회복 된 스페인군 보베의 군대는 시몬 볼리바르 군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로부터 6년이 더 지난 1819년 부터 1820년 까지 볼리바르가 누벨 그라나다(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해방시키기 위해 벌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독립투사
들을 모으니 여러 전투를 거쳐 베네수엘라는 기어이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1819년 12월 17일, 앙고스투라 의회는 그란콜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를
독립국가로 선언했고 이후 2년간 더 많은 전쟁 후에 마침내 시몬 볼리바르의
지도 아래 1821년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을 달성했으니 베네수엘라는 콜롬비아,
파나마, 에콰도르와 함께 1830년 까지는 “그란콜롬비아 공화국” 의 일부였습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1821년 6월 24일 스페인군에 맞서 베네수엘라 해방의 결정적 계기가 된 승리를
거두는데,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를 스페인의 지배로 부터
해방시킨 ‘해방자이자 국부(國父) 볼리바르’ 를 빼놓고 중남미 근현대사를 이야기할수는 없습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콜롬비아 초대 대통령직에 올랐으며, 1819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와 함께 그란 콜롬비아 연방을 구성했지만 1830년 에콰도르와 베네수엘라
가 콜롬비아의 통치를 거부하며 결국 독립을 선포하는 바람에 연방이 무너졌습니다.
1821년 6월 24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외곽 카라보보 평원에 시몬 볼리바르가 이끄는 6,500명
의 독립군이 스페인 군대와 맞서 승리했으니 카라보보 전투(Batalla de Carabobo ) 인데
그란콜롬비아군이 미겔 데 라 토레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을 맞아 싸워서 크게 이긴 전투입니다.
스페인군은 베네수엘라 지역 발렌시아에서 푸에르토카베요에 이르는 가도를 점령했으니
6500명의 볼리바르 군대가 그들 반혁명군과 맞닥드렸을 때, 볼리바르는 군대를
반으로 나누어 한 무리가 지형이 거친 곳을 통과해 측면 작전을 펼치도록 하자
스페인군 데 라 토레도 군세를 반으로 나누어 한 무리를 측면공격에 대응하도록 합니다.
5천명의 스페인군은 머스킷 총을 쏘면서 혁명군의 공격을 한동안 저지하였고, 혁명군의 보병
은 후퇴하였지만 1천명의 영국인 부대의 대원들은 격렬하게 싸워 언덕 거점을 확보했는
데... 그 와중에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으니 전체 혁명군 사상자의 절반 가량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혁명군이 측면 공격으로 반혁명군의 전열을 무너뜨렸고, 데 라 토레 군대의 후방을 향해
진군하자 스페인 보병은 사각 대형을 만들어 끝까지 싸웠지만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해
사상자와 포로가 2,900명이나 발생하니 최종적인 혁명군의 승리로 전투는 끝이 났으며
이 전투 이후 이어지는 마라카이보 전투 등을 통해 베네수엘라의 해방이 공고화 되었습니다.
중남미에서 태어난 크리올료(크리올, 스페인의 후손인 백인) 볼리바르는 6월 29일 고향인 베네수엘라
의 수도 카라카스에 입성했으며...... 남미 해방을 위해 이듬해 1822년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 교외
피친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볼리바르 군대는 스페인군에 대승을 거두었으니 에콰도르도 해방 됩니다.
1822년 5월 24일,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장군이 지휘하는 남미 독립군과
멜초르 아이메리히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에콰도르 키토 시가 보이는 피친차 화산 경사면에서 충돌
했는데, 1822년까지 스페인군은 도주 중이었으니 북쪽은 시몬 볼리바르가 1819년 뉴그라나다를
해방시켰고 남쪽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해방하고 페루로 북상중 이었습니다.
남미대륙에서 왕당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은 페루와 에콰도르의 키토였으며 해안에서 중요한
항구도시 과야킬은 독립을 선언했고 스페인군이 이를 탈환할수 없었으며 대신 지원군
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수 있다는 희망으로 키토를 요새화하기로 결정했는데 1820년
말, 과야킬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소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키토를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전략 도시 쿠엥카를 점령했지만 후아치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패했으며 1821년에
시몬 볼리바르는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를 과야킬로 보내 두번째 시도를
조직했으니 수크레는 군대를 일으켜 1821년 7월 키토로 진군했지만, 이번에는
2차 후아치 전투에서 패배했고 생존자들은 재편성하기 위해 과야킬로 후퇴 합니다.
1822년 1월 수크레의 새로운 군대는 키토로 가는 길에 남쪽 고지대를 가로질러 다른 전술을
취했으니 쿠엥카는 다시 함락되어 키토와 페루의 리마 사이 통신을 끊었고 1,700명
수크레 군대는 다수의 에콰도르인에 볼리바르가 보낸 콜롬비아인, 영국인 ( 주로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 편을 바꾼 스페인인, 심지어 일부 프랑스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월에는 산 마르틴이 파견한 1,300명의 페루인, 칠레인, 아르헨티나인의 지원을 받는데 5월이
되자 그들은 키토에서 남쪽으로 100km 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는 라타쿵가 시에 도착
했는데 스페인군 Aymerich 는 키토로의 접근과 함께 강력한 군대를 방어 위치에 배치했습니다.
수크레 Sucre 는 그의 부하들을 요새화된 적진에 무모하게 돌격시키지 않고 요새를
돌아서 후방에서 공격하기로 결정했으니 이것은 부하들을 Cotopaxi 화산과
스페인 진지 주변으로 행진시키는 것이었는데 작전은 성공해 키토 뒤편 계곡으로
들어갈수 있었으니 5월 23일 밤 수크레는 부하들에게 키토로 이동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도시를 내려다 보는 피친차 화산의 고지대를 차지하기를 원했으니 Pichincha 위치
는 공격하기 어려웠고... 스페인군 Aymerich 는 왕실 군대를 내보냈으니 아침 9시
30분경, 군대는 화산의 가파르고 진흙 투성이의 경사면에서 충돌했는데 수크레의
군대는 행군하는 동안 흩어져 있었는데 스페인군 선두 대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습니다.
독립군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알비온 대대가 스페인 정예부대를 전멸시켰을 때
왕당파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으니 피친차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패배한지라
5월 25일, 수크레는 에콰도르의 키토에 입성했고 스페인군의 항복을 받아
들였으며 볼리바르는 6월 중순에 기뻐하는 군중들로 가득찬 키토에 도착했습니다.
피친차 전투는 남미대륙에 남아 있는 왕당파의 가장 강력한 요새인 페루와 맞서기 전
반군(독립군)을 위한 마지막 워밍업이 된 것으로 수크레는 이미 매우 유능한
지휘관으로 여겨졌지만, 피친차 전투는 최고의 반군 장교 중 한명으로 그의
명성을 공고히 했으며 전투영웅중 한명은 십대의 중위 Abdón Calderón 이었습니다.
쿠엥카 태생인 칼데론은 전투중에 여러번 부상을 입었지만 떠나기를 거부했고 부상에도
불구하고 계속 싸웠으니 그는 다음날 사망했고 사후에 대령으로 진급했으니 수크레
자신이 특별히 칼데론을 언급했고, 오늘날 압돈 칼데론 스타는 에콰도르 군대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중에 하나이니 용감하게 싸우는 칼데론 동상이 있는 공원도 있습니다.
Pichincha 전투는 또한 가장 뛰어난 여성인 Manuela Sáenz 의 군인모습을 보여주는데 . 마누엘라
는 리마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토박이 출신으로 수크레의 군대에 합류하여 전투에서 싸우고
군대를 위한 음식과 의약품에 자신의 돈을 썼으며 그녀는 중위 계급을 받았고 전투에서 중요한
기병 지휘관이 되어 대령이 되었으니 그녀는 시몬 볼리바르를 만났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중남미를 식민 지배한 스페인은 부왕령(副王領) 제도를 통해 식민지를 나누어 통치했으니 총독인 셈인데
19세기초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는 멕시코(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 페루 부왕령, 누에바 그라나다
(콜롬비아) 부왕령, 그리고 리우데라플라타 부왕령(아르헨티나등) 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니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으로 식민지에 스페인의 통제권이 약화되자 1810년경 부터 남미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계기는 경제적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본국 스페인 상인과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부왕 및 본국 세력, 그리고 자유 무역을 추구하며 정치적 지배력까지 확보
하려는 크리올료(중남미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주민) 사이의 심각한 대립이었으니 1810년
베네수엘라의 크리올료들은 스페인이 파견한 군사령관을 추방하고 대표자 회의를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보고타에 입성한 볼리바르는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고, 이때부터 그는 ‘해방자’ 칭호로 일컬어졌으니
볼리바르는 스페인 식민지 베네수엘라, 누에바그라나다(콜롬비아), 키토(에콰도르) 등을 하나의 연방
으로 묶는 대(大)콜롬비아 구상을 실현하려 했으니 미국처럼 합중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823년 9월 볼리바르는 리마에 입성하여 이듬해 페루를 독립시키고 상(上)페루(불리비아) 지역도 해방
시킨 때가 영광스러운 시기였는데... 1825년 자신의 대콜롬비아 구상이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했으니, 국가 건설에 대해 크리올료(백인)들이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 지역마다 대립했고
유럽도 강력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견제했으니 1826년 결성된 연맹은 1830년 해체되었습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출신 독립운동가로 산 마르틴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해방자이자 국부로
추앙받으니 무장투쟁을 통해 식민지였던 파나마,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볼리비아
를 독립시켰으니 볼리비아는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국가명을 그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오랜 식민지배로 인해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남아메리카에는 엘리트주의 통치방식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방하였으나 사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고 독재와
군국주의를 싫어했고 권력형 비리를 통한 축재나 부정부패를 멀리했으며 스페인
으로 부터 독립후에는 미국을 모델로한 남아메리카의 통일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에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는데 바스크 태생의 에스파냐 출신 가문으로
5대조 할아버지 돈 시몬은 베네수엘라 총독의 비서로 근무했으니 아버지는 시몬
볼리바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로마 가톨릭 사제에게 유아세례를 받도록 했는데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았으니 흑인 여종인 이폴리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1792년 어머니가 사망한뒤, 고아가 된 후 외삼촌 카를로스 팔라시오스의 집에서 살다가
열두살 때 엄한 외삼촌 집에서 나와, 결혼한 큰 누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같이 살면서
진보적 가치였던 정치적 자유주의의 신봉자인 시몬 로드리게스의 지도를 받았으니
장 자크 루소와 몽테스키외의 사상을 통해 볼리바르에게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들인 크리오요(Criollo)들은 에스파냐의 식민통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으니 농장을 경영할 정도로 경제력과 높은 교육수준을 갖고 있는
데도 스페인 본토 출신에 비해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으며 자유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에스파냐에서 해방 되어야 한다는 열정적인 투쟁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볼리바르는 14세에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준위가 된 볼리바르는 1799년부터 1802년
까지 멕시코와 유럽을 여행하였으니 멕시코 여행은 같은 크리오요들과의
만남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졌고 유럽(에스파냐와 프랑스)여행은
남아메리카에서만 살던 청년 볼리바르에게 교양과 자유주의 사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유럽에서 사는 동안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이 1804년에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보면서 절대
권력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하던 로드리게스의
영향으로 1807년 고향으로 돌아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는데
미국을 거쳐 오면서 남아메리카가 독립하면 미국처럼 합중국으로 만들겠다고 구상합니다.
고향에 돌아온 볼리바르는 1809년 안드레스 베요, 런던 빈민가에서 빈한한 삶을 살던 독립운동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어 1811년 베네수엘라를 베네수엘라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가진 국가로 해방시켰지만 독립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왕당파의
카라카스 점령으로 실패했고 볼리바르는 검거를 피해 네덜란드령 퀴라소에서 망명생활 했습니다.
에스파냐의 손길이 미치자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로 피신하는데, 이때 카르타헤나
선언으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베네수엘라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독립전쟁을 지도했으니 시몬 볼리바르의 군대에는 에스파냐의 학정에 반감을 갖고있던
청년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쟁은 연전연승하였고, 1814년 8월 4일에 카라카스에 입성합니다.
베네수엘라 공화국에서 볼리바르에게 해방자라는 이름을 줄 정도로 그는 큰 영광과 존경을
받았는데 영광도 잠시, 에스파냐군은 카라카스를 다시 침공하니 볼리바르의 부대는 전쟁
에서 계속 지게 되니 당시 복수심에 불탄 볼리바르는 포로들을 모두 총살 하였다고 합니다.
독립의회에서는 사병들이 경험이 부족한 신병들이었고 무기도 열악한지라 책임을 묻지 않았으나, 결국
전쟁에 패해 아이티 공화국으로 망명했으니 당시 아이티 대통령 알렉산드르 페숑은 남아메리카
독립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조건으로 4개 대대 1200명 군대를 지원했으나, 훈련을 받지못한
오합지졸 부대로는 잘 훈련된 사병과 최신형 대포를 가진 에스파냐군을 이길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1816년과 1817년 전쟁에서도 패배한 시몬 볼리바르는 대평원지대의 군벌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 전술로 에스파냐군과 전쟁을 벌여서 1818년 2월 12일 승리하였지만....
에스파냐군의 재공격으로 3월 26일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에서의 전쟁을 당분간 포기해야 했습니다.
1819년 볼리바르는 2,5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5일간의 피스바산 험난한 산행을 거쳐
콜롬비아로 건너갔으니 볼리바르의 부대는 5,000여명의 영국군과 아일랜드군
의 병력 지원과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1819년 8월 7일 콜롬비아를 해방시켰습니다.
그해 그는 콜롬비아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819년 12월 17일에 군사 지도자들과
의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그란콜롬비아가 승인되었으니 그란콜롬비아는 미국을 모델
로 삼은 연방 공화국으로 지난 1807년 이래 볼리바르가 구상하고 있던 국가체제 였습니다.
에스파냐군과 휴전을 협정한 뒤에는 군인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부대를 정예화 했으니
1821년 11월 16일 카라보보 전투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볼리바르는 파에스와 함께
그해 11월 21일 카라카스에 재입성하였으며, 아르헨티나의 독립운동지도자 호세
데 산 마르틴의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해방에 자극받아 에콰도르를 해방 시켰습니다.
1822년 7월 26일, 볼리바르는 산 마르틴과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만나 남미지역 독립문제에
대해 비밀회담을 했으니 볼리바르는 미국을 모델로한 강력한 중앙정부와 대통령 중심제
의 연방국으로 전체 남미지역의 통합을 주장했으나 현실주의자였던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의 제안은 남미지역 정치상황과 맞지않다는 이유를 들어 입헌군주제를 피력했습니다.
1824년에 산 마르틴이 일선에서 물러난후 유럽으로 망명하자 볼리바르는 해방군을 파병하여
페루의 왕당파를 공격했는데 1824년 12월 9일 스페인 부왕 호세 드 라 셀 나가 이끄는
왕당파 군을 상대로 한 아야쿠쵸 전투(Battle of Ayacucho) 에서 수크레가 이끄는
해방군이 승리해 페루가 독립하였으며 1825년 볼리바르는 페루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825년 8월 6일, 볼리바르와 협력한 수크레 원수가 안드레스 데 산타크루스와 함께 알토 페루지역을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켰으니 알토 페루의 지배층은 그동안 동일한 행정 단위를 구성하고 있던
페루와 아르헨티나와의 연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키사카에서 알토 페루 독립이 선언되었고
1825년 8월 26일, 시몬 볼리바르 업적을 기리기위해서 알토 페루의 국가명을 볼리비아로 정했습니다.
1826년 파나마에서 개최된 연맹회의에서 볼리바르는 연방제 형식을 갇춘 남미
대륙의 통일국가 건설을 호소했으니 남미가 분열될 경우에 미국등에 의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종속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판단 이었습니다.
미국은 1823년에 '먼로 독트린'을 통해 유럽의 아메리카 간섭을 차단하고 중남미 대륙의 패권을 거머
쥐겠다는 의지를 표방한바가 있으니 신생 독립국인 남미 국가들로서는 매우 경계해야할 점이었으니
이런 점들이 수용되며 조약이 체결되고 긍정적인 결과가 도출되는듯 했으나 곧 그의 구상은 무산됩니다.
거대한 대륙의 특성상 각 지역간 소통의 문제, 정치적 이해관계 충돌, 지역 군벌들의
욕심, 미국과 영국의 남미대륙 분열 정책등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으니 볼리바르는
"우리는 혁명을 위해서 몸 바치는 동안 배울 시간이 없었다" 고 하며 절규하였고,
남미 대륙의 미래에 대해서 '유혈충돌과 무질서' 가 난무할 것이라고 예견 했습니다.
불행히도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남미 정국은 혼란속에 빠져들어 갔으니 볼리바르는 오랜 독립
투쟁에 지쳐 있었고 건강도 나빠져가던중 그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적들
과 볼리바르의 흑인노예 해방정책에 반감을 가진 지주들의 반발의 결과물이었지만 그러나
볼리바르는 사건 주모자에 대해 국외추방 및 관련자 석방이라는 매우 관대한 처벌을 내립니다.
1829년과 1830년 베네수엘라 및 에콰도르가 각각 분리독립하면서 그가 만든 그란콜롬비아도
와해되자 1830년 4월 27일 종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그란콜롬비아 의회에 반납
했으며 거액의 연금 지불 제안도 거절하고는 1830년 5월 8일 그란콜롬비아 대통령직
에서 물러나 콜롬비아 보고타를 떠나 호아킨 미에르가 제공한 별장에서 조용히 지냈습니다.
볼리바르는 지병인 폐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동료 수크레가 6월 4일에 암살 당하자 이로
인한 상심으로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고 1830년 12월 17일, 요양을 하던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병자성사를 받은 뒤, 47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으며 볼리바르가 사망한후 2년 뒤 유명무실한 그란콜롬비아는 공식적으로 해체됩니다.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떨어져 나간 가운데 콜롬비아는 1886년 공화국을 선언하는데 ,
1903년 파나마 운하에 관심을 가진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사주한 것으로
생각되는 파나마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한 미국 정부에 의해서 파나마를 상실하였고
브라질과 페루에 남부 아마존 밀림지대의 영토들을 할양하면서 현재의 영토로 줄어듭니다.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독립을 쟁취했고 3번째 공화국으로 1819년에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그란콜롬비아 공화국을 이루다가 1830년에 분리를
선언하였으며 사이가 틀어진 콜롬비아로 부터는 1845년에 분리 독립을 승인받게 됩니다.
안토니오 구스만은 정교 분리, 공교육 제도를 실시했으나 후안 비센테 고메스통치 기간중에
석유에 관한 이권이 외국 자본가들의 손에 넘어갔고 이후 외국 석유기업의 수익에 대한
세율을 50% 인상하기도 했으며 군부 쿠데타가 이어지다가 1998년 반미 성향의
좌파 우고 차베스가 대통령에 올라 석유국유화조치를 실시해 미국의 경제 재제를 받습니다.
세계미인대회를 휩쓰는 베네수엘라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콜롬비아는 저 대회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미인의 나라인데 콜롬비아(Colombia)라는 이름은 아메리카 대륙 항로를 처음으로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가 지은 것으로 6.25때는
1068명의 병력과 프리깃함 1척으로 참전했으며... 인구는 5천만이고 최근 내전이 종식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