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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진주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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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자료실 스크랩 1940.12.25 독립운동가 문양목 사망
야무 추천 0 조회 75 14.09.05 22: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40.12.25  독립운동가 문양목 사망
동학혁명군으로 활동하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역 총회장 역임

 

 

 

 

 

 

 

 

 


 

 

 

국가보훈처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동학혁명군으로 활동하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역 총회장을 역임한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가 문양목(文讓穆 1869. 6. 7~1940. 12. 25) 선생을 광복회, 독립기념관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선정 발표했다.

문양목 선생은 충남 서산 출생으로 동학혁명군으로 활동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5년 하와이로 망명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선생은 1907년 국권회복을 위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을 결성해 중앙회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인 ‘대동공보’를 발행해 국내외 동포들의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켰다.

1908년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 하는 발언을 신문지상에 발표하자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는 스티븐스를 방문해 발언취소와 해명을 요구했으며 그를 처단한 전명운·장인환의사의 재판 과정을 언론에 소개함으로써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미국사회에 인식시켰다.

또한 네브라스카주에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 입학을 권유하는 ‘미제 소년병학교’라는 글을 써 사관양성을 통한 항일 무쟁투쟁론을 적극 지지했다.
중국신문과 기관지인 신한민보에 일본의 야만정책을 규탄하는 논설을 투고해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알리기도 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 역임 당시에는 국민의무금 제도를 실시하는 등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했다.
회장 사퇴후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견간부로 활동하며 무장투쟁 등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선생은 1940년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 6월 한 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NAVER 뉴스


 

 

 

 

문양목 [ 文讓穆 ]

1869(고종 6)∼?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서산 출생. 1903년 경기도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재직중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인의 노동자 모집에 응하여 도미, 캘리포니아 새클라멘트에 거주하며 항일민족운동을 하였다.

 

1907년 3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된 대동보국회(大同輔國會)에 참여하여 이병호와 백일규에 이어 회장이 되었고, 이 단체의 기관지인 ≪대동공보 大同公報≫의 주필도 맡았다.

 

1908년 3월 당시 한국정부의 외부고문이던 스티븐스(Stevens, D.W.)가 귀국하여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제의 우리나라에 대한 보호정치를 찬양하며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하자, 다른 교민단체들과 함께 대동보국회도 항의를 하게 되었다.

 

이 때 최유섭(崔有涉)·정재관(鄭在寬이덕현(李德鉉)·문양목 등이 진상규명통대로 뽑혀 스티븐스를 방문하고 비난하였으나, 그의 계속적인 일본의 대한정책 지지에 격분하여 구타하였다.

 

그뒤 3월 22일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하자 대동보국·독립협회 등은 후원회를 조직하고 변호사 교섭, 통역선택, 경비조달 등을 맡게 되었다.

 

이 때 변호비용으로 의연금 700달러를 모금하고 판사전담위원이 되어 재무를 맡는 등 구명운동에 힘썼다. 그뒤 미국에서의 우리나라 노동자의 권익옹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在美韓人50年史(金元容, 1959)
≪참고문헌≫ 在美韓人史略(盧載淵, 1963)
≪참고문헌≫ 韓人의 美洲移民과 抗日運動(吳世昌, 民族文化論叢 6,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4)

 


 

/네이트 백과사전

 

 

 

 

 

산지조종 태백산은 선왕조의 발상지라/산이던지 물이라도 선조유업이 아닌가/박산아 물어보자 고금 역사 네 알리라/
대한민족의 영웅호걸 누구누구 왔다 갔나/태산같이 뜻을 세워 사욕탐심에 요동마라(…)강식약육 험한 시대 청년들아 전진하라/
(후렴)내나도 네나도 네나도 내나/네나도 내나 단군의 자손

-선생의 시 <산지조종 태백산>-

 

 

충남 서산에서 동학혁명군으로 참여하다

 

 

문양목(文讓穆, 1869. 6. 7~1940. 12. 25 )선생은 1869년 6월 7일 충청남도 서산군 남면 몽산리 268번지에서 아버지 문상도와 순흥 안씨 사이의 차남으로 충선공 문익점의 18세손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출중하였던 선생은 향리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중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의 부패함을 개탄’하여 동학혁명군으로 참전하였다. 선생이 동학혁명군으로 반제, 반봉건 투쟁에 앞장섰던 것은 당시 서산 일대의 동학군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2차 농민전쟁 시기였던 1894년 9월 당시, 태안군수 신백희와 안무사인 김경제 등은 태안, 서산, 해미 3읍의 동학교도들을 귀화시키는 한편, 거부하는 동학군을 참수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태안군수와 안무사는 관군 등을 파견하여 동학의 대수두목 30여명을 감금하였다. 이처럼 사태가 급박해지자, 손병희 산하에서 대접주로 활동하던 박희인, 박인호 등은 휘하의 접주들로 하여금 서산지역을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서산일대 동학 접주들은 일제히 기포(起包)하여 갇혀 있는 동학의 대수두목 구출을 결정하였다.


 

이때 서산의 북접조직에 남평 문씨 일가가 다수 참여한 것으로 보아, 선생 또한 이 시기 문중 사람들과 함께 동학혁명군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최시형으로부터 기포 훈시를 받은 서산지역 동학군은 10월 2일 동학군 수만여 명을 태안읍에 집결시킨 뒤, 안무사 김경제와 태안군수 신백희, 서산군수 박정기 등을 살해하고 동학두목 3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후 이들은 10여 군(郡)의 무기를 몰수하고 대도소(大都所)를 유치하는 등 농민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동학군 진압작전을 계기로 11월경 서산지역 농민군 또한 이두황군에게 패퇴하는 등 서산지역 농민군의 활동도 점차 위축되었다. 이에 따라 선생 역시 동학농민군이 패퇴할 당시, 관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피체 후 큰 동아줄에 묶여 끌려가던 선생은 관군에 가담하였던 서당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 친구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였다 한다. 그러나 선생의 부인은 농민전쟁의 와중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 결성, 스티븐스 처단 사건을 지원하다

탈출 후 선생은 1903년 경기도 인천으로 피신한 뒤 서당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이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선생은 종형 문우목에게 어린 딸을 맡기고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하와이로 망명길을 택하였다. 36세가 되던 해인 1905년 하와이사탕농장 노동자 모집에 응모한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캅틱(Coptic)호에 승선하여 2월 2일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도착 후 사탕농장 노동자로 근무했던 선생은 1906년 미국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도미 후 선생은 동학접주 출신 백일규, 대동교육회의 장경, 방사겸 등과 어울리면서 노동생활을 하다가 1907년 3월 장경, 백일규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결성하였다. 1907년 10월 선생은 대동보국회 중앙회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동회 기관지 <대동공보>를 발행하던 대동공보사의 사장 겸 발행인을 겸직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중앙회장으로 미국 내 스탁톤, 프레스노, 칼린, 덴버, 솔트레이크시티 등지에 지방회를 설립하는 한편, 기관지 대동공보를 통해 국내외 동포들을 대상을 국권회복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강력한 항일운동지로 위상을 키워 나갔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인민족운동단체였던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는 1908년 3월 22일 하오 8시 합동으로 공동회를 개최하고 스티븐스의 망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선생을 위시하여 최정익, 정재관, 이학현 등 4인을 총대(總代)로 선정하여 스티븐스가 투숙하고 있는 페아몬트 호텔로 파견하였다. 선생 등 4인의 총대는 스티븐스를 방문하여 관련 기사의 정정과 해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이를 거절하자 선생 등은 격분하여 스티븐스를 구타한 후 공립관으로 돌아와 사건전말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스티븐스 처단을 위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튿날인 3월 23일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제2차 공동회를 개최하고 전명운, 장인환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을 비롯한 최정익, 정재관, 백일규, 김영일, 이일, 이용하 등은 판사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였다.

 

 

선생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신한국보 사용지). 이승만이 착수하는 서적발행과 학생기숙사 건축, 총회관 건축 및 세세한 제반 경비는 동포의 의연금에 의지할 수 없다는 어려운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선생을 비롯한 재미한인들의 재판 후원으로 말미암아 일시 수세의 입장에 있었던 국내의 의병전쟁은 전세가 급변하여 다시 활발한 의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선생 등이 기획하고 후원한 스티븐스 처단사건은 의병전쟁의 활력과 함께 이후 독립전쟁에 있어 의열투쟁이 독립전쟁의 일환이라는 인식의 시원을 이루었다.

 

이후 선생은 1908년 7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박용만이 재미한인단체의 통합을 목적으로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자, 동 회의에 참석하면서부터 박용만과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진 선생은 이 회의에서 한인군사학교의 설립을 결의하였다. 애국동지대표회의 한인군사학교 설립 결의는 해외 한인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한 후 이를 바탕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후,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주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선생은 [미재(美哉) 소년병학교]라는 글을 써서 학생들을 권유, 입교시키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 소년병학교는 한국 최초의 독립군사관학교였다.

 

 

 

 

국민국가 건설에 앞장 서다

1910년 2월 10일 선생이 활동하던 대동보국회는 미주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이었던 대한인국민회에 흡수, 통합되었다. 동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무로 당선된 선생은 총회장 황사용과 함께 미국 내 각 지방회를 순회하는 한편, 서기와 재무, 회계 등이 신병 등을 이유로 사면할 때마다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는 등 그야말로 1인 다역 역할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선생은 1908년 4월을 끝으로 종간된 대동공보사의 활판 제구를 수습하여 ‘대동신서관’이란 출판사를 설립하고 민족의식 고취에 필요한 책자를 간행하였다. 이때 선생이 출간한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박용만의 [군인수지] 등이 있다. 그러나 대동신서관은 재정난으로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미주에서는 군인양성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한학에 능했던 선생은 이따금 중국 신문에 일본의 야만정책을 성토하는 글을 투고하는 한편, 군인양성운동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단체를 조직할 것을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10년 11월 2일과 9일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 [신한국 건설책은 국민단체를 완전하게 하는데 있을 따름이다]라는 글과 [국민단체완전책(國民團體完全策)]이란 논설을 투고하였다. 이들 논설에서 선생은 새로운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한 후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창하였다. 1910년 12월 13일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당선된 선생은 이전부터 추진하던 군인양성운동에 더욱 매진하는 한편, 독립군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 지방총회를 적극 설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은 1911년 6월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로 실험하기 위해 국민의무금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은 [국민의무금 실시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신한국 건설을 위한 국민의무금 납부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 국민의무금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행되는 근대 국민국가를 모범한 제도였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관 모습. ‘애국관’이라고도 불렸다.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했다가 1937년 로스엔젤레스
제퍼슨가로 이전하였다. 이곳에서 <신한민보>를 발행하고 한인 2세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쳤다.

 

 

적빈한 생활 속에서도 조국 독립과 한인들을 위해 헌신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선생은 1911년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하던 박용만이 떠날 즈음, 선생 역시 개인 사정으로 동년 7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서 총회장직을 사직하였다. 1913년 8월 하와이로 이주한 선생은 박용만을 만나 해후하는 한편, 상처한 뒤 18년 만에 정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1914년 3월 부인과 함께 호놀룰루를 떠나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하였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장에 당선된 선생은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맞아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박공륙의 보증으로 독립운동가 정재면을 비롯한 북간도 거주동포 22인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 입회시켰다. 1914년 말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신병으로 은둔하였던 선생은 1917년 6월에는 맨티카 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맨티카에서 무사탕농사를 경영하는 한편, 스탁톤 여관을 구매하여 한인들에게 노동주선과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18년 11월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원의 한 사람으로서(총회장: 안창호)파리평화회의 청원대표 파견과 뉴욕에서 열리는 ‘소약국동맹회의’에 대표 파견을 결정, 대대적으로 모금운동에 나선다는 결정에 참여하여 3.1운동 불길 확산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맨티카 지방에 국어학교를 개설하고 교장으로 재직하여 한인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8월경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가족사진(1917년경). 캘리포니아주 만덕카 사탕수수농장 경영 당시 장남 문덕소와 장녀 문한나와 함께.

 

 

 

항상 적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견 간부로 활동하던 선생은 1921년 10월 ‘산지조종 태백산’이라는 시를 남겼다.

산지조종 태백산은 선왕조의 발상지라/산이던지 물이라도 선조유업이 아닌가/박산아 물어보자 고금 역사 네 알리라/
대한민족의 영웅호걸 누구누구 왔다갔나/태산같이 뜻을 세워 사욕탐심에 요동마라/위국진충 하량이면 영웅호걸 그 뿐이로다/
산에 올라 바라보니 형식문명 굉장하다/강식약육 험한 시대 청년들아 전진하라/(후렴) 내나도 네나도 네나도 내나/
네나도 내나 단군의 자손

그러나 선생은 꿈에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0년 서거하였다. 선생이 서거하자, 동지였던 백일규는 추도문을 써서 선생의 업적과 인품을 기렸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7. 3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보국회 결성
1908. 3 전명운, 장인환의거 지원
1908. 7 한인소년병 학교 입교 권유 등 지원
1910. 12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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