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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팀 참여연구원 ※ |
임경순, 이면우, 정혜경, 조숙경, 김정연 |
임경순(포항공과대학교)
조숙경(한국과학문화재단)
○ 축구에서 독일의 전차군단, 프랑스의 예술축구, 브라질의 삼바축구 등의 표현은 각국의 축구 스타일을 지칭하는 말
○ 과학기술의 내용은 다른 학문에 비해 객관적이지만 과학자가 성장한 배경, 습성,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됨
○ 특히 국가별로 과학기술은 서로 다른 모습을 띠게 됨
□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학기술은 객관성이 강한 지식이지만 사회적 가치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맞물려 발전하는 것임
○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의 실험 물리학 전통으로 이어짐
○ 런던의 왕립학회와 지방에 있는 학회는 거의 독립적으로 운영됨. 회비를 내면 회원이 됨
○ 피드백 형 탐구방식(check and balance)과 민주주의
○ 소수 정예의 엘리트 구조 (유럽 전체에서 40명만 선택) : 라부아지에, 라플라스, 오일러
○ 모두 과학이 파리에 집중되어 있고, 지방도시에 분회를 설치
○ 백과전서(Encyclopedie) 운동(1751년부터)
ꠂ 베이컨의 프로그램을 수행 : 지식의 수집만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의 사고를 바꾸고, 더 나아가 세계를 바꾸는 것을 지향
○ 프랑스의 백과전서파와 시스템 구조형 백과사전 : 지식의 혁명적 변화를 추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둔감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시대를 통해 계속 변화해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백과사전의 형태가 되었음 : Cross reference를 활용하여 하이퍼 텍스트 시대에 적합
○ 한마디로 후진국 : 영국, 프랑스의 기준으로 볼 때
○ 군소국가로 분할, 단지 통일적인 요소는 언어와 문화뿐
□ German Mandarin: 독일 지식인 집단의 성격
○ 세습과 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교육에 의한 엘리트 집단
○ 정치적, 경제적 관심이 강했던 프랑스와 영국의 지식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
□ 인간적 지식획득, 인간 수양 강조 Bildung 개념
○ 낭만주의적인 자연철학주의 : 셀링, 노발리스, 요하네스 리터
○ 자연친화적 자연과학 추구, 유기체적인 자연관과 합리주의의 결합
ꠂ Napoleon 전쟁기를 통해서 독일의 상황이 바뀜
ꠂ Berlin 대(1809-10), Bonn대 (1818) 신설
□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의 교육 개혁 이념
○ “대학의 의무는 구태의연한 지식의 주입, 전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고 헌신하는 것”
○ 독일과학은 1870년 이후 독일 통일의 과학관에 의해서 커다란 영향을 받음
ꠂ 물리학을 추구하면서도 철학적인 측면에 많은 관심을 지기고 있음
ꠂ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의 철학적 해석에 관심을 가짐2
○ Kaiser-Wilhelm Gesellschaft (1911)
○ 파동-입자 이중성, 시공개념의 비명시성, 인과관계 등에 관심이 적었음
ꠂ 유럽에서 실패 경험하고 유럽으로 유학가지 말 것을 권유
ꠂ 미국인들은 화학이나 고체현상 등에 새로운 양자역학을 이용하는데 관심이 많았음
ꠂ 모든 과학적 개념들의 의미는 그 개념의 적용기준을 마련해 주는 명확한 과정인 조작에 의해서만 명확해짐
ꠂ 혼자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이 팀을 짜서 연구를 하는 것이 일반적
ꠂ 거대한 입자가속기 건설, 원자탄 개발, 케네디의 우주개발
ꠂ MIT의 Radlab : 레이더 장비 개발, 4,000 명 이상의 물리학자, 공학자, 기술자 고용
○ 핵무기 개발의 성공은 미국 실용주의적 스타일이 이루어낸 전형적인 성공 사례
ꠂ 실용주의적 성공이 전후에 연구중심대학으로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줌
□ 서양과학의 흡수하는 동안에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과학이 중요함
○ 한국의 과학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게 되면 우리의 과학에도 스타일이 생기게 됨
○ 예) 탁월한 손재주와 실험과학 => 복제 소와 세포 조작 기술 등 다양한 바이오기술의 개발
○ 객관적인 과학기술에 우리의 스타일을 채색시켜 우리 식의 과학기술을 만들어
표준을 만드는 능력, 패션을 만드는 능력, 독창적 스타일을 만드는 능력은 서로 통하는 내용임
○ 개인주의적 특성과 창의성을 촉발하는 스타일을 개발할 필요가 있음
정혜경(포항공과대학교)
최근 정부는 7T, 즉 정보통신, 생명공학, 환경, 문화컨텐츠, 나노, 우주, 로봇 등의 첨단기술분야에서의 특허출원 및 관련분야 기술 개발, 전문인력 양성 등을 통하여 한국 과학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는 기술패권의 획득이 한 나라의 국력 및 경제력의 신장과 직결되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과학이 과학자 개인의 지적인 호기심 충족과 학문적 진리 추구의 차원을 넘어선 근대 이래로는, 한 국가의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문화 속에 녹아든 거시경제적 조건, 교육, 재정적 지원, 정치구조 및 사회ㆍ문화적인 조건 등이 반영된 총체적인 활동이며, 이러한 활동을 선도하고 자극하는 효율적인 정책 집행이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한 구동력임을, 다음과 같은 미국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건국 초기 미국에서는 기초과학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 있었다. 국가적 역량의 대부분이 국경의 확대와 미개척지의 개발에 집중되었고 교회라는 종교적 세력이 대학의 과학교육과 연구 분위기를 위축시키는 등의 과학외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가운데, 유럽의 선진 과학업적에의 접근이 용이했던 점이 도리어 체계적인 과학연구를 위한 미국인의 동기와 태도를 결여시켰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미국인의 지나친 실용성 지향의 학문적 성향이 작용하여, 특히 기초과학연구 활동의 경우 개인의 아마츄어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대학과 정부연구소 및 과학전문단체의 등장과 함께 과학진흥정책이 가시화됨에 따라, 기존의 아마추어리즘을 탈피한 전문과학자의 사회적ㆍ직업적 위상이 강화되었다. 1847년에 설립된 전국적 과학조직체인 미국과학진흥협회(Amercian Association of American Sciences)의 창립사가 보여주듯, 대중적 과학지식의 확산이 아니라 독창적이고 전문적인 연구의 추구에 입각한 과학진흥책이 전문인으로서의 과학자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우선 무상토지증여법(Morrill Land Grant Act, 1862년 통과)에 의해 연방정부로부터 토지를 무상으로 획득한 각 주정부는 토지 매매의 재원으로 주립대학을 설립하여 농업 및 기술교육을 위시한 자연과학 교육의 물꼬를 틀었다. 1862년 최초의 미국내 박사학위 취득자가 예일대에서 배출되는 등 대학원 제도가 확립되면서, 대학교수는 질적역량 측정 차원에서 독창적인 연구능력을 검증받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연구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존슨 홉킨스 대학을 위시하여 당시 대거 설립된 연구중심 대학들이 자리잡는 과정을 통해 기초과학은 이제 대학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게 되었다. 분야별ㆍ학과별로 여러 명의 교수들이 연구에 대한 질적ㆍ양적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는 미국 대학의 특징은, 본격적으로 유럽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경쟁력의 산실 역할을 하는데 커다란 강점으로 작용했다.
3. 연방정부의 본격적인 과학 지원과 기업 차원 연구의 태동
미국 연방정부가 과학의 후원자가 된 것은 영국의 아마츄어 화학자인 스미손(James Smithson)이 유산으로 남긴 기부금에 의해 스미소니언 국립 연구소가 설립되면서부터였다. 특히 미국 정부과학의 강세는 20세기 초 관료제적 경영과 과학 연구력진흥 사이의 독특한 결합을 모색했던 과학국(scientific bureau)의 성장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중앙정부로부터 미 전역에 산재한 필드 실험소(field station)로 하달되는 관료제적 질서를 이용하여, 과학국은 일반 대중을 위한 전문과학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연구기관으로서의 탁월한 위상과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응용과학연구 및 기술개발책의 강조로 인해 미국에서의 정부연구소의 활동에는 순수기초과학 연구의 수행을 다소 포기해야만 하는 제약이 따랐다. 사실 정부가 소수 기초과학자의 후원자가 된다면 과학의 실용적 효과를 기대하는 대중의 이해관계를 저버릴 소지가 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대중이야말로 과학의 진정한 후원자라는 견해가 팽배하던 미국에서는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19세기 말부터 미국 경제의 부상에 힘입어 미국의 대기업이 사내 산업과학연구소(Industrical Research Laboratory, 이하 산과연)를 설립하여, 과학자와 공학자를 고용하여 발명 및 특허 개발 등의 연구개발(R/D)에 전념시킴으로써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GE 산과연 소속의 어빙 랭무어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GE가 기초과학연구와 응용기술개발을 적절하게 병행하여 지원한 결과였다. 산과연에서 수행된 연구개발의 특성은 기초연구와 응용개발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상보적으로 연결되어 양자간의 적절한 조화를 모색한 데 있었다. 대부분의 연구개발 프로젝트의 경향이 응용개발의 영역에 치중한 성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기초연구와 응용개발은 상호간에 경계를 두고 뚜렷하게 구분되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 가능한 것이었던 점, 말하자면 연구와 개발 양측면의 적절한 조화가 미국 연구개발 체제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학을 응용과학이라고 칭하는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자면 공학의 의의는 결국 순수과학의 이론과 방법을 실용적 문제에 응용하는 것일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공학은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발달시킬 수 있는 독창적인 연구분야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양측면에 내재하고 있는 역동적 딜레마는 미국의학의 발전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의학 역시 기초과학에 해당하는 기초의과학(해부학, 생리학, 생화학, 병리학 및 약리학 등)과 응용과학의 범주에 드는 임상과학(치료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19세기 초ㆍ중반에는 미약한 편이었다. 19세기 말에도 상황은 비슷하여, 실험실 기반의 과학적 의학을 수행했던 독일과 같은 선진의학의 지식과 경험에 자극받은 바 있는 소수의 미국인들은 국내에서 과학적 의학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적ㆍ물적 장치에 대해 한탄했다. 대학교수와 의대생의 자질이 결여되었으며 의대생의 수업료에만 의존했던 의학교의 재정적 불안정이 기초의과학 육성을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의학교의 인력양성은 의과학자가 아니라 임상의 배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때마침 일어난 미국 의학교육의 개혁이었다. 예과교육의 의무화 및 교과과정의 혁신에 따라 의대생들은 높은 교육적 수준을 갖추어야만 했으며 임상의로서의 활동을 위해서는 주정부가 요구하는 자격시험에 통과하여 면허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엄청난 기부금으로 재정적 안정을 가진 존스 홉킨스 대학은 의학교육 개혁의 최전선이 되었으며 최초의 대학부설 의과학 센터를 세워 기초의과학에 대한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개인 차원의 사설후원제 역시 과학발전을 위한 중요한 하부구조가 되었다. 1841년부터 1842년에 걸친 미첼(Ormsby MacKnight Mitchel)의 저명한 천문학 대중강연의 수익에 힘입어 신시네티 천문대에서는 천문학 연구를 위한 정교한 반사경을 설치할 수 있었지만, 이후 지속적인 기부금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아 천문대가 종내 폐쇄되고만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릭(James Lick)과 열키스(Charles Yerkes)와 같은 거부들의 대규모 기부금에 힘입어 20세기 초에는 142개에 달하는 미국 천문대가 연구를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는 등, 활성화된 기부금 문화에 의한 과학연구 활동이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이러한 기부금 문화가 정점에 달한 1920년대에 등장한 과학재단, 그 중에서도 록펠러(John Rockefeller), 카네기(Andrew Carnegie)의 민간재단이 연구소들의 중점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개인별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그란트와 펠로쉽을 부여하며, 박사후 연구인력을 양성함으로써, 화학, 물리학, 의학, 수학 및 생물학 및 사회과학 분야의 발전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대학의 연구인력과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어우러진 과학 협력프로젝트가 수행되었다. MIT-TVA로 알려진 프로젝트를 위해 1933년 여름 MIT와 연방정부기구 산하 테네시유역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 사이에 “혁명적 발전시스템 power system” 구축을 위한 연구계약제(research contract)가 체결되었지만, 연구수행 과정에서 연구비 지원자인 정부측과 연구주체인 MIT 대학이 연구결과의 특허권을 둘러싸고 서로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불협화음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양측간의 갈등으로 인해 MIT-TVA는 결국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과학활동의 효율적인 분업화를 위한 연구계약제는 미국의 연구개발을 진흥하는 법적ㆍ제도적 장치로 작용했다. 미국 기초과학 역사상 커다란 전기의 하나는 제2차 대전 직후 과학기술계의 완만한 발전과 느슨한 대응을 한탄했던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의 국장인 부시(Vennavar Bush)의 “과학 : 끝없는 프론티어”라는 보고서에 근거하여 미국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이 발족된 것이다. 부쉬는 연구계약제를 이용한 협동연구를 통하여 산업계, 학계, 정부 및 군부간의 연구개발 협력을 독려하면서 동시에 민간차원의 특허 보호를 통한 연구의욕을 자극하여 연구개발이 급속하게 진행될 수 있는 장치를 확립하였다. 의학 및 국방을 포함한 자연과학분야의 진흥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 마련과 연구인력 인프라의 구축이 이루어져 미국은 기초과학의 위기에 대한 만반의 대비를 갖추게 된 셈이다.
5. 과학자의 업적 배후에 있는 또 하나의 주역 : entrepreneur scientist
상술한 바와 같은 20세기 과학강국 미국의 저력을 이해하는데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경영자적 과학자(entrepreneur scientist)의 천재적 역량과 역할이다. 예를 들어 보자. 19세기 초반 연방정부로부터의 후원을 받은 미국 연안기초조사연구국(U.S. Coast Survey)의 국장인 베이쉬(Alexander Bache)는 연구국의 경영과 조직 통제를 통하여 기초과학 vs. 응용과학, 과학의 엘리트주의 vs. 과학의 대중화간에 내재하는 딜레마를 조정하여 미국과학의 전문성 획득에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19세기 말 20세기 초 새롭게 등장한 연방정부의 과학조직체인 과학국의 국장들도 과학과 경영 마인드를 함께 겸비한 전문과학자 출신이었다.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과학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한 연구와 서비스를 수행하는 수 백명의 정부과학자들과 다양한 연구프로젝트를 관리하였다. 그밖에도, 산과연의 소장들도 본격적으로 산업과 과학의 결합의 장을 개시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수행했다. MIT 화학과 교수 출신인 휘트니(Willis Whitney)를 사내 산과연 소장으로 초빙한 적 있던 GE는 지나치게 경제적 이익에만 급급한 기술이나 발명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을 지양하고, 화학 및 물리학과 같은 순수과학 분야의 논문출판과 특허출원이 자유로운, 마치 대학 실험실과 같은 자율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던 것이다. GE 산과연은 텅스텐 필라멘트를 사용한 전등의 제조 및 생산과정, 전구에 빛의 밝기를 강화하는 기체 사용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는 경제적 성과를 누렸으며, 랭뮤어(Irving Langmuir)는 텅스텐 개량전등 개발로 산업계의 과학자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첫 케이스를 기록하는 학문적 쾌거를 이룩했다. 록펠러 재단의 과학경영을 맡아 영양과학 개선을 위해 농업과학과 실험생물학 분야를 포함한 자연과학 분야의 지원과 연구를 책임졌던 위버(Warren Weaver)의 사례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1938년 그는 록펠러 재단이 중점 지원할 새로운 과학분야로서 분자생물학을 지칭했다. 록펠러 재단의 연구 기금은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출현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이는 이후 1953년에 와서야 왓슨(James Watson)과 크릭(Francis Crick)이 유전현상의 메커니즘을 분자적 수준에서 밝혀냄으로써 분자생물학을 구성하는 체계화된 지식이 갖추어지는데 필요한 장치를 조성한 셈이었다.
요약하자면 19세기 이후 미국 과학기술의 발흥의 이면에는 전문발명가, 과학자 혹은 공학자들의 연구개발 활동을 연방정부 산하기관, 기업 산과연, 민간재단이 직접 수행하거나 배후에서 지원하는 커다란 구도 아래, 이들의 과학연구수행 혹은 지원 활동을 일선에서 직접 담당하였던 경영자적 과학자들의 탁월한 역할 수행이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다. 이는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혁신적이고 가시적인 기술 개발 및 혁신 결과를 이끌어 냈을 뿐 아니라, 개인과 조직이라는(동시에 순수과학과 공학까지) 서로 상이하게만 보이는 차원간의 협력과 융화가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낸 하나의 사례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은 양차대전을 경험하면서 실로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강국으로 등극하였다. 2차대전 이후 정부의 과학지원은 전례 없이 증가하여 해양학, 재료과학, 우주과학, 고에너지 물리학, 양자역학, 전기역학, 고체물리학과 같은 새로운 분야들이 발달되는 가운데 미국과학의 발전을 선도하는 주류는 점차 거대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거대과학이란 단일한 연구목적 아래 수백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초고가의 실험 장비들을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협동작업을 펴는 것으로, 입자가속기, 로켓 및 우주선, 사이클로트론 장치, 허블우주망원경, 인간게놈프로젝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2차대전 당시의 원자탄 개발사업인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태동되었던 거대과학은 연구규모의 크기와 복잡성,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과학자 집단의 지식탐구활동이라기보다는 사회적ㆍ제도적ㆍ경제적ㆍ정치적 요구에 의해 추진되는 범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이러한 거대과학의 순수한 과학외적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초전도 충돌형가속기 계획의 몰락과 인간게놈프로젝트의 비상이다. 미국의 초전도 충돌형가속기(SSC) 계획은 소립자 세계의 연구를 통해 고체물리를 포함한 제분야의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1993년 백지화되었다. 2차대전 이후 국가안보와의 연관성 아래 시행되었던 고에너지 물리학 지원정책이 미소 냉전체제의 종식으로 인해 이제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반면,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기 위한 인간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는 불치병인 암의 치료나 신약개발에의 활용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정치가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HGP 연구사업은 종전의 거대과학 연구와 달리 국제적 협력체제와 미국내 여러 연구센터의 연계를 통하여 분산형 연구체제로 진행되었다. 다원화된 연구 주체들의 자율적이면서도 독자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연구가 이뤄진 것이다. 냉전이 종식되고 자본주의적 원리가 한층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 거대과학 역시 연구활동과 조직의 형태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이는 거대과학이 사회적ㆍ제도적ㆍ경제적ㆍ정치적 복합체라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거대과학은 정부의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대규모 투자와 정책이 과학기술발전에 얼마나 필수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과학이 고도화되고 발전속도가 가속화될수록, 점차 과학에 대해 대중이 접근하기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대중의 이해와 일치하는 과학발전에의 지원을 표방하던 미국의 특성상,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19세기 이후로부터 미국의 과학대중화 활동은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즉, 19세기 초ㆍ중반에 과학대중화 운동을 업으로 삼는 그룹이 생겼으며, 그 이외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과학대중화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우선 주목할 것은 가정이 과학문화 전달의 매개가 되었던 점이다. 어린이의 교육권이 전통적으로 교회라는 종교기관의 영향 하에 있었던 초창기와는 달리 19세기 이후로는 부모 개개인이 자녀 교육의 중요한 주체로 떠오르게 되었다. 가정의 응접실은 가족 성원간의 일상적인 대화와 교류의 공간일 뿐 아니라 과학표본의 전시, 과학을 주제로 한 논쟁이 이루어지는 과학교육의 최전선이 되었다. 또한 가정 바깥에서는 잡지, 신문, 도서와 같은 출판매체, 강연과 같은 대중화 모임, 박물관, 중ㆍ고등 및 대학교와 같은 공적인 문화조직체 등이 대중사이에서 과학 담론을 형성시키고 쟁점을 확산시켜 가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특히, 공교육 차원에서 체계적인 과학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교육에서 교과과정의 개혁, 교사의 독창적인 교육방식 개발 독려, 학부모 의견의 교육 프로그램에의 반영 등을 통하여 과학교육 및 대중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발표 당시 전세계적으로 10명 내외의 전문가만이 이해 가능했던 난해한 이론이자 실용주의를 표방한 미국과학의 성격과는 무관하기까지 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중에게 센세이션을 안겨주며 널리 확산된 것을 보더라도, 20세기 전반 미국대중의 과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대와 50년대를 거쳐 과학의 고도화와 첨단화에 힘입어 과학은 더 이상 대중의 이해와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소수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되어갔으며, 이러한 과학과 대중의 괴리는 곧 국가정책 수행의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대규모 투자나 정책이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해 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일신시킨 것은 학교과학 운동과 지방자치단체의 과학축전 등의 과학대중화 운동이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미국과학의 발달과 진흥은 경험주의 과학관이라는 문화적 가치에 입각한 과학의 실용주의 노선이 불러일으키는 대립과 반목, 과학의 엘리트주의와 대중적 인식의 괴리 등, 과학의 발전 방향과 전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에 의해 언제라도 위기에 봉착할 잠재적 소지가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계, 산업계, 언론계, 정부가 이러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갈등 및 대립을 조정, 조화시키기 위한 변증법적 해결책을 모색함으로써 현재의 과학기술의 강국을 일구어 냈던 것이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맞물려 발전하는 것임
이면우(춘천교육대학교)
일본은 일찍부터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강력한 쇄국정책이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큐슈 서쪽의 나가사키(長岐)에서는 네덜란드인과의 교역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덜란드어를 공부하는 일부 일본인이 생겨났다. 이들은 네덜란드어로 된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을 읽고 이해했으며, 일부는 번역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네덜란드 학문이 싹트기 시작하는데 이를 난학(蘭學)이라 한다. 난학은 곧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뜻한다. 난학의 시작으로 보는 번역서로는 흔히 스키타(1733-1817)가 번역한 『해체신서』를 들고 있다. 이와 같이 난학의 융성으로, 1811년 토쿠가와 막부는 서양책을 번역하는 전담 기구를 설치한 바 있다. 또한 ‘洋學塾’이라는 이름으로 서양 학문을 교수하는 곳도 생겨난 바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의 경우는 당시 중국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서구 문명을 도입하였으며, 외국인의 초빙과 유학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나라나 중국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이 연구에서는 ‘난학’을 통한 서구의 과학기술을 일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어떠한 맥락에서 해석하였고, 또한 일본인 스스로는 어떠한 인식을 가졌는가를 살펴본다. 먼저 과학이라는 신조어의 탄생과정과 일본에서의 서양 과학기술 도입하게 된 배경을 다루고, 이어 명치유신 이후부터 명치 후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이전 전통과학과 비교적 친숙한 의학, 천문학, 지리학 분야와 오늘날 과학의 중요 분야인 물리학, 화학 분야의 도입과 정착 과정 및 특징을 다룬다.
○ 1542년 9월 3인의 포루투칼인이 種子島에 표착한 것이 첫 시작임.
ꠂ 이 때 종자도 영주였던 토키타카(時堯)가 2정의 鐵砲와 함께 보고함.
ꠂ 총이 전해짐, 총은 전쟁방식을 바꾸었고 일본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옴.
ꠂ 기술 전이의 조건은 기술의 격차가 작고 사회적 수요가 왕성해야 함.
ꠂ 일본의 경우 일본도를 연마하는 금속가공 기술이 있었고 총의 발명으로 전법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급속도로 발전함.
ꠂ 외국과의 접촉이 섬나라의 발전에 불연속성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음.
ꠂ 일본의 서구문명 이식 메커니즘(紫藤貞昭 외 편, 『近代日本 その科學と技術 : 原典への招待 』, 弘學出版, 1990).
ꠂ 외래 문명이나 지식을 접하고 매료당함 -> 도입하려고 노력함 -> 노력만으로 불가능, 고가의 수업료를 지불하여 외국인 교사 고용 -> 초빙한 외국인 교사에게 수업료에 상응하는 공부를 함 -> 그 사이에 엘리트를 해외로 유학보냄 -> 유학생 귀국 외국인 교사의 후임으로 자리잡음(교체함).
ꠂ 한자문화권에서 사용하는 “科學”이라는 일본인 학자 西周가 1874년 『明六雜誌』에 연재한 “知說”이라는 제목의 논설 속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니시 아마네는 哲學이라는 한자어도 만든 근대학자였다. 여기서 과학은 홀리스틱한 동양의 학문에 비교하여 서양의 학문이 분과적이나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었다.(辻哲夫, 『日本の科學思想 : その自立への摸索』, 中央公論社, 1973, 176-184.).
ꠂ 자연에 동화(매몰)되고 자여과 정서적으로 공감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일본인
<-> 자연을 대상화하고, 논리적인 지름길을 찾아 그것을 해석하려는 서양의 과학과 철함.
ꠂ 책 내용은 쇄국주의 이념과 막부체제를 몰아내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에 유학과 시찰 이상으로 영향을 많이 준 것이 번역서의 유례없는 홍수라고 볼 수 있다.
ꠂ 그것은 ‘일본적 현상'으로 당시 중국이나 조선 등과 사뭇 달랐던 발빠른 대응방식이었다.
ꠂ 일본은 만국법률 등 국제법분야가 가장 먼저 홍수를 이뤘고, 이후 서양사로 관심이 넘어갔으며, 다시 유별났던 화학 등 자연과학을 거쳐 문화예술 분야 번역홍수로 이어졌다는 것이 마루야마의 분석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임성모 역,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원책1998).
ꠂ 마루야마에 따르면 막부 말기의 2대 베스트셀러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 과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을 든다.
3. 과학 분야에서의 수용과 전개 : 에도시대 말부터 명치시대까지
ꠂ Luis de Almeida(1517?- 1583) : 포루투칼인, 원래 개신교, 천주교로 개종, 예수회 입회.
ⓐ 1555년 사비를 들여 고아원 세움, 젖소 2마리 사육하고 기독교도 유모를 둠
ꠂ 1558년 알메이다가 이 병원에서 일본인에게 의학교육을 실시함.
ꠂ 여러 곳에 선교사와 신도를 위한 의료시설이 만들어짐.
ꠂ 포루투칼인, Christovao Ferreira (1580-1654) 20년 정도 일본에서 포교활동, 구속됨. 개종하고 일본여성과 결혼한 다음 개명함. 남만류 외과를 교수함. 의학전서인 『南蠻流外科秘傳』.
ꠂ 남만의학을 벗어나 네덜란드로부터 의학을 받아들이게 됨.
ꠂ 17세기 중엽 長岐의 네덜란드의 商館醫(蘭館醫)에 전해진 것.
ꠂ 스키타겜바쿠 杉田玄白(1733-1817) : 네덜란드식 외과를 공부하여 외과의가 됨, 『解體新書』 번역함.
ꠂ 1720년 8대 장군 德川吉宗 개력의 필요에 따라 종교서 이외 양서 수입을 허락함.
ꠂ 通詞의 楢林鎭山(1648-1711) : 파레(Amproise Pare, 1510-1590 ; 프랑스 외과의)의 외과서와 그림을 전재하여 『紅夷外科宗傳』을 저술.
ꠂ 通詞의 本木良意(1628-1697) : 독일인 Johann Remmelin의 해부서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암스테르담판(1667)을 중역하여.
ꠂ 1774년 『解體新書』 출간됨. 여기에 “神經”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나나탐.
도쿠가와 막부시절 에도의 의사 스기타겜파쿠는 죄수의 해부된 인체를 보고 나가사키의 통역관을 통해 입수한 네덜란드어 해부서의 정밀성을 확인한다. 해부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은 그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은 변변한 사전도 없이 마에노 료타쿠 등과 함께 3년만에 그 책을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해낸다. 1774년의 일이다. 일본의 ‘번역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본이 서양 과학을 배워들이기에 성공한 모습을 가장 잘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특히 쇄국주의와 막부체제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1868)을 단행한 이후 일본에 외국유학과 시찰 그 이상으로 영향을 많이 준 것이 번역서의 홍수다
ⓐ 大槻玄澤(1757-1827) 등 1788년 『蘭學階梯』를 편참함.
ⓑ 大槻玄澤은 “芝蘭堂” 1786년 에도에 개설함 -> 난학, 난의학이 발전함.
ꠂ 동양 전래의 천문학은 일식이나 혜성을 관측하여 국가의 안위를 점치는 천문과 해와 달과 오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역법의 두가지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 중국역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사용했던 일본은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서양천문학을 접하게 된다.
862년 宣明曆 개력
1685년 貞享曆 완성(授時曆을 실제로 일본 체제에 맞춘 것임)
ꠂ 동양에서는 물리학이라는 분야가 없었다. 기본적인 자연관은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
예를 들어 貝原益軒(1630-1714)의 『大和本草』(1709)에는 “物理之學”이라는 용어가 있으나 오늘날의 물리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코텔레스의 피지카와 비슷(?) :
ꠂ 16세기 기독교인에 의한 서양문화 도입,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들어왔지만, 곧이어 금교, 쇄국이 됨.
ꠂ 진정한 물리학 분야는 난학과 양학시대가 되면서 가능해짐.
ꠂ 메이지유신 이후 계몽활동, 공학과 물리학 교육과 연구, 이후 자립과정을 거치게 됨.
ꠂ 동양에서는 연단술 등은 있었지만, 물질을 다루는 현대 의미의 화학은 없었다.
ꠂ 서양화학의 이식이 바로 일본에서 화학의 시작이 된다.
ꠂ 化學이라는 한자어는 일본에서는 1860년 川本幸民의 『萬有化學』(1860년 2월)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학이라는 용어는 이미 중국에서 먼저 사용했다.
ꠂ 예를 들면 1857년 1월에서 1858년 2월까지 발행된 월간잡지 『六合叢談』에 화학이라는 용어가 보인다.(坂出祥伸, “『六合叢談』に見える化學記事” 『科學史硏究』93호, 38p, 1970).
ꠂ 화합물에 대한 명명법을 라보아지에식을 한 것은 宇田川榕菴의 『舍密開宗』부터이다.
ꠂ 이상에서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의 전반부까지 남방문화 -> 난학 -> 양학으로의 전개과정을 살펴봄.
ꠂ 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분야를 나누어 살펴봄.
ꠂ 과학교육적인 차원에서 계몽서 수준의 전반적인 과학서 도입 경로와 이해 정도 파악.
ꠂ 일본 특유의 모방문화, 외래선진문명의 도입 경향, 새로운 것에 대한 대응방법 등을 이해할 수 있었음.
중국, 특히 실패했던 우리나라의 과학문화인식과의 비교가 필요함.
일본의 근대과학 이해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
ꠂ 道家達將 外, 『二十世紀科學の原流』 NHKブックス, 1968.
ꠂ 山田慶兒, 『科學と技術の近代』, 朝日新聞社, 1982.
ꠂ 辻哲夫, 『日本の科學思想 : その自立への摸索』, 中央公論社, 1973, 176-184.)
ꠂ 伊東俊太郞, 村上陽一郞 編, 『日本科學史の射程』, 培風館, 1989.
ꠂ 紫藤貞昭 外 編, 『近代日本 その科學と技術 : 原典への招待 』, 弘學出版, 1990.
ꠂ 佐藤昌介, 『洋學史硏究序說』, 岩波書店, 1964.
ꠂ 中山茂, 『歷史としての學問』, 中央公論社, 1974。
ꠂ 荒川淸秀, 『近代日中學術用語の形成と傳播 - 地理學用語を中心に-』, 白帝社, 1997.
ꠂ 黑岩俊郞, 『日本技術論』, 東洋經濟新報社, 1976.
ꠂ 丸山眞男, 加藤周一, 임성모 역,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이상원(포항공과대학교)
○ 과학기술과 관련된 공유된 삶의 양식 및 가치의 총체
ꠂ 과학기술과 관련하여 인간이 획득한 지식, 법률, 관습, 사유 등 행동양식의 전체.
ꠂ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긍정적 측면을 지속시키고, 부정적 측면의 치유하거나 최소화하여 인류 문명의 올바른 가이드 역할을 수행.
ꠂ 서구 과학의 외형만을 수입하고 아직 체화되어 있지 않음.
○ 영국의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 : 유용한 기계적 발명과 진보를 소개하고 과학적 지식의 확산을 목적으로 1799년 창립
ꠂ Humphry Davy, Michael Faraday, Tyndall, Bragg.
ꠂ Friday Evening Discourse, 크리스마스 강연.
○ 영국과학진흥협회(BAAS): 과학의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과학자들 사이의 토의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1831년 창립
ꠂ 대표적인 논쟁: 헉슬리-윌버포스 주교의 진화론 논쟁.
○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과학자들의 상호협력과 연구 활동 고양, 인류 복지 증진을 위한 과학의 효율성 제고,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목적으로 1847년 설립된 민간단체.
ꠂ <Science>, <Science Books & Film> 출간.
ꠂ Education and Human Resource Program에서 다양한 과학대중화 사업 전개 : 예를 들어 2061 프로젝트.
○ 외국의 과학대중화 관련 단체는 과학기술인들의 단체로서 과학기술인 스스로가 과학대중화에 노력하고 있음.
○ 일반인들도 과학에 대한 관심을 광범위하게 가지고 있음
ꠂ 풀뿌리 과학 대중화 기반이 넓음: 과학관이 도처에 산재.
○ 따라서 우리나라의 과학문화재단과 같은 기관은 외국에는 없어도 됨.
○ 과학기술자들이 사회적 책임감의 결여로 대중화 작업에 소홀함.
ꠂ 과학기술 전문 학술 단체도 대중화 운동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음.
ꠂ 과학대중화 사업은 2류 과학자들이나 하는 일로 폄하하는 경향.
□ 현재 정부는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처하기 위한 중단기적 대책을 마련하고 있음.
○ 하지만 과학기술인의 사기 진작과 처우 개선을 위한 광범위한 지원 대책 이외에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이 이루어져야 이공계 기피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됨.
ꠂ 과학기술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생활과 밀접한 것이라는 인식 변화가 사회 저변에서 나타나야 함.
ꠂ 과학기술을 모르고는 돈을 벌거나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통념이 퍼져야 함.
○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혜택 확대뿐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책임의식 제고 노력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
○ 미래의 과학기술 인력수급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분석이 없이 막연한 차원에서 전통적인 과학대중화 운동만을 추진할 경우 훗날 도태된 분야에서 종사하게 될 미래의 과학기술자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임.
○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대책과 사기진작책도 21세기를 관통하는 새로운 사회적 흐름과 조화를 이룰 때만이 현실 속에서 올바르게 구현될 수 있음.
ꠂ 단기적인 치유만을 강조하여 다원화되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미래 사회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대책은 오히려 국가 발전에 해가 됨.
ꠂ 이공계 기피 현상의 배경에는 전통적인 이공계 전문 직업인이 커다란 역할을 했던 전통적인 굴뚝산업의 위치가 새로운 욕구에 맞추어 성장한 새로운 지식기반 사회의 서비스 업종에 침식된 요소가 있음.
ꠂ 이들 사이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발전해서는 안되며, 서로 보완되면서 미래 사회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어야 함.
○ 지식기반 사회 속의 과학기술의 올바른 자리매김 필요.
ꠂ 정보화사회에서 나타나는 반과학적인 경향인 신비주의, 감성주의를 과학기술 마인드와 조화를 이루게 유도할 필요가 있음.
ꠂ 생명윤리운동은 과학의 무분별한 오용을 막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에 은연중 반과학성을 내포하기도 함.
○ 생명윤리운동이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을 정책에 적극 반영하고, 반과학성을 사회적 계도를 통해 차단하며,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책임의식 고취를 근원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음.
○ 민주적 절차 및 의사 결정에 대한 합리적 사고 및 과학적 방법이 생활화되도록 육성.
○ 스포츠, 영화, 오락, 경제, 예술, 놀이 등 다양한 일상생활 속에서 과학기술의 의미를 인식하도록 유도.
○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올바른 가이드로서 과학문화를 육성
ꠂ 과학만능주의 및 반과학주의적 편향을 극복한 올바른 과학마인드를 함양.
ꠂ 청소년 문화에서 탈피하여 모든 계층을 포괄하는 문화가 되어야 함.
ꠂ 전시기획 단계부터 전문가뿐만이 아니라 교사, 어린이, 학생, 주부, 학부모, 정치인, 상공인, 노년층을 총망라하는 교육, 레저, 놀이, 창조 및 연구의 장으로 만들어야 함.
ꠂ 정보화사회 및 장수사회에 대비한 과학문화 연구 및 확산.
ꠂ 전통문화와 연결되고 변화하는 사회의 새로운 가치관과 욕구에 부응하는 과학기술 문화 육성.
○ 청소년 이공계 기피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과학문화를 국민문화로 승화시킬 때 비로소 가능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