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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63)
2024.09.11
<러시아 정교회와 공산주의>
1. 동서 교회의 분열(1054년)
1054년 기독교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은 1517년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분열이 교리적인 문제로 인한 분열인데 비해 동서교회 분열은 정치적인 문제 즉 서방로마교회와 동방 콘스탄티노플교회의 주도권싸움이 분열의 주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박해하던 그 당시 로마제국에 콘스탄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함으로 인하여 기독교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며 또한 그 중심에 있던 로마교회가 자연히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의 이스탄불)로 옮기면서(330년)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지위가 격상되며 로마교구와 콘스탄티노플교구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395년 데오도시우스황제의 두아들에 의하여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리되고 이들 교회의 거리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서로마제국이 먼저 망하고(476년) 동로마는 그 세력이 커지므로 인해서 콘스탄티노플교회의 영향력이 크게 신장(伸張)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에 와서 교회수위권(교황) 문제와 성상숭배문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문제 등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며 다른 주장을 하다가 1054년에 결국 서로를 파문하면서 기독교회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정교회로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이를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부른다.
-988년 그리스 정교회의 선교로 블라디미르 1세가 세례를 받으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멸망하자 모스크바 대공국은 스스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이므로 모스크바 대공 역시 로마 황제의 후계자를 자처하였다.
-1472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동로마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소피아 팔래올로기나와 결혼하고, 동로마 제국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아 그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차르(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시 루스(러시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구심점을 잃은 정교회를 사수하라는 하느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제3의 로마라는 신념의 기원이 되었다.
-표트르 1세 재위기간 섭정이었던 보리스 고두노프는 한발 더 나아가 모스크바 관구장 주교의 지위를 총대주교로 격상시켰다.
-자신들의 총대주교에 의해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기를 염원했던 러시아인들은 이에 모두 환호하였다. 1589년 러시아에 총대주교좌가 신설되어 모스크바 관구장 주교는 전체 루스 총대주교로 승격되었다.
-1593년에는 4대 초대교회 총대주교들(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회합하여 모스크바 총대주교구에 교회 서열상 5번째 총대주교좌를 부여함으로써 승인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1645년 알렉세이 로마노프는 아버지 미하일 로마노프에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러시아의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열성신도의 운동에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러시아 전역은 일대 정신적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나 1653년 황제가 신임하고 비호한 니콘이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되자 분란이 일어났다. 신임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십자성호를 긋는 방식(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 것)을 포함한 교회 의식을 새로운 그리스 교회식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아직도 10세기 개종 당시 전수받은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그리스 교회의 변화된 전례를 받아들이기를 반대하며, 러시아인의 정교회 전통은 다른 지역교회들의 전통보다 훨씬 우월하므로 절대 바뀌어선 안된다고 하였다.
-이로써 1656년 러시아 정교회는 신의식파(新儀式派)와 고의식파(古儀式派)로 분열되었으며, 전통을 고수하는 고의식파가 박해받기 시작했다. 이때 분열된 고의식파는 다시 둘로 나뉘었다.
-그외 분파로는 두호보르파가 있는데, 의미는 '영혼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다. 이들은 폭력에 반대하는 기독교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고, 하느님 외에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러시아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캐나다로 집단이민을 가야만 했다. 오늘날 서부 캐나다에 거주하는 두호보르파는 약 2만에서 4만 명이다.
-1682년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 대제가 제위에 올랐다. 서구화를 지향하고 황제권을 나라 곳곳에 미치게 하여 강대국으로 만들기를 원했던 표트르는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새로이 러시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그는 자율적인 세력을 구축하던 교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교회를 국가권력 아래 두게 하였다.
-뒤이어 1721년 표트르 대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관구장주교로 격하하고 전 러시아의 교회에 대한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하여 새로이 설립된 국가기관 신성 종무회의로 이전하였다.
-172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러시아 정교회 신성 종무회의를 공식 승인하였고, 러시아 황제는 이 신성 종무회의의 의장을 비롯한 구성원들을 자신의 충복들로 채움으로써 교회를 국가의 지배아래에 확고히 내려놓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수립되자 러시아 정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소련 이전의 러시아 제국은 영국의 성공회처럼 황제(차르)가 교회의 수장인 구조를 지니고 있음으로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 있는 수준이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도 차르의 승인 하에 선출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차르를 상대로 투쟁이 발생하면 교회도 탄압당하고 권력을 빼앗기는 과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소련에서는 극단적으로 종교를 배척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방법으로 정부가 세워지는 바람에 소련 치하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그야말로 대재앙을 맞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의 상황을 보면 종교개혁이나 군주들과의 대립에서 많은 마찰을 겪은 가톨릭, 개신교와 달리 러시아 정교회는 대대적으로 교회구조를 완전히 청산해야만 하는 중대한 사회적 폭발은 없었다.
-이 덕분에 러시아 정교회는 기독교의 전통을 보존하고 수호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대신 시간이 쌓여 오면서 부패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교회는 각 지역 교회가 거의 개별적인 총대주교 휘하에 속해 있는 구조였고 교회가 군주의 권위 아래있었기 때문에 교회개혁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러시아 정교회가 가진 심각한 부패와 세속화 문제는 당대 지식인이나 귀족들이 이미 공공연하게 인지하고 혐오했던 상태였다.
-1917년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자 정교회를 종속시키던 황제가 사라졌고, 레닌과 트로츠키에 의해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뒤, 공산당은 정교회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주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설교 금지, 성당 파괴, 교회재산 몰수등 으로 제정 시절 교회가 누리던 특권박탈 등으로 고난을 겪었다.
-교회의 생존을 위해 소련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러시아 정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나치 독일과 소련 간에 전쟁을 벌어지자, 소련군을 열렬히 지원하였다.
-스탈린은 레닌, 트로츠키와 달리 러시아 민족적 모습을 지닌 러시아 정교회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신앙을 가질 것을 장려하였다. 물론 스탈린 본인은 무신론자였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지도자 세르기 모스코바 주교는 교회를 존속시킨다는 명목으로 소련 정부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이후 정부 비판을 일체 중단했다.
-스탈린은 이러한 교회의 애국심을 높이 사 세르기를 신임 총대주교로 선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외형적 박해는 완화시켰으며, 신학교육기관 설립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신부들은 정상적인 목회 활동을 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도 기독교 교육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순종적인 태도는 국내의 많은 신도들의 반발을 샀으며, 혁명 이후 해외에 망명해 활동하던 미국과 서유럽 등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와 관계를 단절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국제사회의 인식을 고려하여 공개적인 종교 탄압을 지양했다. 예를 들어 공직자들이나 고위당 간부들은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거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일반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종교활동에 참석이 가능했다.
-스탈린 이후 소련 사회에서 종교 탄압은 은밀한 형태로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KGB는 성직자들의 임명과정에 개입하여 조금이라도 이념적으로 불온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사찰 대상으로 관리했고 심지어 신자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정보원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공산주의 시절 박해를 받던 러시아 정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1990년 10월의 소련 최고회의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이후부터이다. 현재 러시아 대통령 푸틴도 정교회 교인으로 알려져있다.
-소련 붕괴 후, 현재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재기하고 있는 중이다. 파괴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복구를 기점으로 러시아 각지에서 소련 시대에 파괴된 성당과 교회조직의 재건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어서, 출근길에 성당과 공공 장소 등 기도할 수 있는 장소에서 기도를 드리고 직장에 가는 시민들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 승천 대축일인 2007년 5월 17일, 공산주의 혁명 이후 분열되었던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80년 만에 재통합했다.
-알렉시 2세 총대주교가 타계하자 키릴 총대주교가 뒤를 잇게 되었다. 키릴 총대주교는 로마 교황청과의 역사적인 화해를 도모할 수 있을 만한 개혁 성향의 성직자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구 러시아 제국과 소련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캐나다, 중남미, 일본 등 기타 일부 지역에도 전파되어 있다. 한국 정교회도 1900년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건립하였다.
-오늘날 러시아 정교회,시리아 정교회, 이집트 정교회, 알바니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등 이 모두를 포함하여 동방 정교회라고 부른다.
<스탈린 주도하에 삼두체제>
-1918년 8월 30일 블라디미르 레닌은 모스크바의 한 공장을 방문했다.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파니 카플란(Fanny Kaplan)이란 사회혁명당 소속 여성 테러리스트가 볼셰비키 일당독재에 불만을 품고 레닌을 저격한 것이다. 레닌은 총탄이 몸에 박혔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때 레닌의 나이는 48세였다. 저격사건 이후 레닌은 왕성하게 일을 했다. 하지만 1921년이 되면서 그에게 질환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두통과 피로를 하소연했다.
-이때부터 레닌은 후계자를 구체화했고, 볼셰비키 지도부 사이에 차기 권력을 둘러싼 음모와 각축전이 벌어졌다. 레닌의 후계자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와 요셉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좁혀졌다. 레닌은 사후에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대립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혁명의 원조는 트로츠키였다.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Lev Davidovich Bronstein)으로 1879년 우크라이나 유대인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데사 실업학교에서 공부하며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실력을 쌓았다.
-처음에 트로츠키는 농민해방운동에 심취했다가 17살에 사회주의자로 변신했다. 그는 흑해연안 항구에서 노동자 단체를 조직하면서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트로츠키는 19살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혁명가들과 접촉했고 이때 레닌의 저서를 탐독했다고 한다. 감옥에서 사회주의자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한후 1900년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 4년형을 받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바이칼호 근처로 추방되었다가 탈출해 런던으로 도주했다. 런던에서, 레닌, 율리우스 마르토프 등 혁명가들과 합류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발하자 그는 곧바로 귀국해 시위를 주도하다가 또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는 또다시 탈출해 서유럽으로 건너갔다.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또다시 귀국해 혁명운동을 지도했다. 그는 소비에트 의장이 되어 케렌스키 정부와 대립했다.
-이번에 그는 레닌의 볼셰비키와 호흡을 맞춰, 10월 혁명을 주도했다. 내전기에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를 이끌고 반혁명 백군을 제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트로츠키에겐 유대인이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는 유대인이 러시아를 이끌어가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혁명 직후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새 정부의 수반 자리를 제의했지만 사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1878년 그루지아(조지아)의 가난한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트빌리시의 신학교를 다니다가 증퇴한 이후 혁명운동에 뛰어들어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을 거듭했다. 1901년 사회민주당에 가입하고 레닌의 책에 심취하여 볼셰비키 당에 가입하였다.
-1905년에는 핀란드에서 열린 볼셰비키 대회에 참석했고, 이 때 레닌을 만나 그에게서 ‘강철의 인간’이란 의미의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스탈린도 어려서부터 혁명운동을 했지만 그 역할은 트로츠키에 견줄바 되지 못했다. 스탈린은 여러 직책을 맡으면서 평당원 지지자들을 많이 확보했다.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서로를 경멸했다. 스탈린의 눈에는 트로츠키가 거만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대해 실천력이 있지만 정치적 시야가 좁고 2류, 3류에 불과한 사나이 정도로 보았다.
-레닌의 결정적 실수는 그의 뇌졸중이 시작된 직후인 1922년 6월에 스탈린을 공산당 제1서기로 지명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그 지위를 충분히 활용했다. 그해 스탈린은 1만명 이상의 지방관리들을 임명했다. 이들은 자신을 임명해준 스탈린을 적극 지지했다.
- 레닌이 지병으로 정치적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스탈린 혼자만으로 트로츠키와 대적하기는 어려워 카메네프,지노비예프와 함께 삼두체제를 형성하였다.
-카메네프의 부인 올가는 트로츠키의 여동생이다. 하지만 카메네프는 처형보다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함께 보낸 스탈린을 더 좋아했다.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트로츠키에 대한 개인적 반감으로 스탈린과 손을 잡았다.
-1922년 9월에 레닌의 건강이 호전되어 업무에 복귀했다. 레닌은 세 사람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트로츠키에게 “관료주의에 맞서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2월에 레닌이 두 번째 뇌졸중에 빠지면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부터 레닌은 1년 이상 반신불구의 상태를 이어간다. 스탈린은 심복 두 사람을 레닌 수행비서관으로 파견해 병상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다.
-레닌은 1922년 12월말 전당대회에 보낼 문건을 정리하면서 유언을 구술하고 아내가 받아적었다.
-레닌의 유언은 크게 세 챕터로 되어 있다. 첫째는 민족문제, 둘째는 당의 조직문제, 셋째는 후계자들의 인물평이다. 레닌은 세 번째 챕터에서 스탈린에 대해 “나는 동지들이 스탈린을 그 직위에서 몰아 내고, 넓은 아량과 높은 충성심, 동료들에 대한 배려심을 가진 인물로 교체하는 방안을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고 하여 레닌이 스탈린을 당에서 축출하려고 결심한 것이였다.
- 스탈린은 눈앞에 놓인 권력을 놓치기 싫었다. 스탈린은 병상에 있는 레닌에게도 무례한 폭언을 퍼부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레닌은 세 번째 뇌졸중을 앓으면서 말을 잃어버렸다.
-1923년 3월에 12차 당대회가 열렸다. 레닌의 서한은 대의원대회에서 낭독되지 않았다. 3명의 지도부는 레닌의 편지를 내부적으로 처리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스탈린은 레닌의 과업을 충실히 계승하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5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에 맞춰 레닌의 부인 크루프스카야는 스탈린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남편의 서한을 낭독하게 했다. 하지만 이때엔 스탈린 휘하의 삼두체제가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한 뒤였다.
-스탈린은 레닌의 서한이 공개되자, 물러나겠다고 시늉했다. 하지만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의 뜻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중앙위원들을 설득했다. 중앙위원의 대부분은 스탈린이 임명한 자들이었다. 트로츠키는 회의에서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미 대세가 스탈린에게 넘어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스탈린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 1889.4.20 – 1945.4.30>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의 소도시 브라우나우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관 고위공무원인 아버지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클라라 히틀러가 어머니이다. 현모양처의 전형인 어머니는 몇 명의 자녀를 유아기에 잃은 뒤 얻은 히틀러를 애지중지 키웠다.
-불 같은 성격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낙제생인 아들을 엄하고 무섭게 다루었고,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로부터 귀한 아들을 보호했다. 어린 시절 히틀러는 ‘목적’ 없는 아이였지만,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고 그의 영혼에 강력한 천둥번개가 쳤다.
-실업학교를 겨우 졸업한 히틀러는 화가가 되고 싶은 심정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시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그에게 화가의 운명을 주지 않았다. 여러 차례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생계를 위해 그림엽서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순수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던 몽환적인 청년인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인생의 전환점은 어머니의 죽음과 1차 세계 대전이었다.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침상에 몸을 던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이불과 베개에 묻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그날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독일에 치명적인 존재라는 것이라 자각하였다. 히틀러는 승전 독일에 대한 열망으로 독일 군에 입대했으며, 무공을 올려 1급 철십자장을 받고 제대했다.
-그는 탁월한 대중연설가로 변신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추종자를 만들어 나갔다. 연설은 대부분 유대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유대인과 그들을 돕는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은 전후 비참한 독일의 속죄양을 찾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화가로서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비슷했다.
- 1920년 2월 기존의 독일노동자당과 툴레회 그리고 31살의 히틀러가 결합하여 나치당이 탄생했다.
-정치는 말(speech)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실증한 대표적인 인물이 히틀러였으며, 그의 정치적 레토릭과 웅변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에 당수였던 드렉슬러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당을 떠났다. 히틀러가 이제 나치당의 당수가 된 것이다. 뮌헨의 허름한 맥주집에서 드렉슬러의 눈에 띄어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년 만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떠돌고 있던 반유대주의는 오스트리아 빈의 정치선동가 카를 뤼거(Karl Lueger)에 의해 잘 드러난다. 그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유대인의 손에 있고 언론계의 상당 부분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자본, 특히 거대자본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나라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테러를 행하고 있다’고 연설했다.
-히틀러는 뤼거의 대중선동에 공감했다. 그리고 소시민들이 전후 빈곤과 사회주의에 대해 불안해 하는 원인을 유대인들에게서 찾았다. 그는 병적인 상상력으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을 인종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선동은 대중이 우매하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다. 대중은 합리적인 이성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애매한 선전에 움직인다고 확신했으며 그 확신은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이 논리를 실행에 옮겨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히틀러를 선지자로 모신 요세프 괴벨스였다.
-1923년 11월 9일 이에 히틀러도 자신의 우상인 파시즘의 원조 무솔리니를 본받아, 나치 독격대와 베르사유조약에 불만이 컸던 참전군인 연합과 그리고 전쟁 영웅인 루덴도르프와 결탁하여 뮌헨을 접수하기 위해 거리에 집결하고 경찰과 대치한다. 돌격 앞으로! 를 외친 히틀러의 명령으로 뮌헨은 폭동에 휩싸이고 결국 나치당원 1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체포된다.
-도주하던 히틀러도 체포되어 쿠데타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된다. 사실 하루 만에 진압된 그 사건은 쿠데타이기보다는 불장난에 불과한 호전적인 극우정당의 어설픈 폭동 수준이었다.
-베르사유조약의 후유증으로 독일 국민이 피폐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며, 이에 애국적인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쿠데타를 도모했고, 당연히 쿠데타는 정상적인 정치적 행위라는 내용으로 설파를 했다. 히틀러의 압도하는 언변과 맞물린 이런 주장은 재판관들도 호의적으로 돌아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재판 과정을 언론들이 기사화하면서 히틀러라는 이름이 정치 중심지 베를린과 전국에 퍼져나갔다. 바로 군중은 독일의 자존심을 히틀러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5년형을 선고받은 후 8개월 만에 가석방되고, 나치당도 해체되고, 히틀러에게 연설 금지명령을 내렸지만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이득은 히틀러의 전국구 데뷔였다.
- 가속도가 붙은 눈 덩어리처럼 점점 크게 굴러 떨어지는 히틀러를 견제할 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정책도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다가 1935년 9월 5일에 통과된 ‘뉘른베르크 법’에 의해 독일 내 유대인들을 독일인들과 격리시켰다.
-즉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사안에 대한 모든 투표권을 박탈하고, 관직에서 배제시켰으며 심지어 유대인과 아리아인의 결혼과 성관계마저 금지시켰다. 독일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도 일부 학생과 지식인 정치인들이 광적인 독재자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 무명작가인 요제프 괴벨스가 신문에서 히틀러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바로 자신의 우상을 만난 것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영혼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몸과 영혼을 받친다. 그리고 나치 정권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나치 친위대(SS)의 사령관이면서 홀로코스트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도 쿠데타를 계기로 히틀러를 교주로 모시게 된다. 그들은 훗날 나치독일의 개국공신이 되어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당시 나치당의 지지율을 분석해 보면 50%가 넘는 지지층이 놀랍게도 중산층이었다. 그중에서도 교사들이 핵심층이었다. 하층민에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반면, 중산층에겐 강한 아리아인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공감을 얻어낸 것이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국가를 만드는 데 중산층은 적극 동조했다.
-1932년 3월 드디어 히틀러가 대통령에 출마한다. 비록 힌덴부르크가 재선에 성공하지만 히틀러는 30% 이상 득표율을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7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나치당이 37.3% 240석을 획득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제1당에 오른다. 사민당을 2위로 끌어내리고 1위를 탈환한 것이다. 창당 후 13년 만에 이룬 기적이었다.
-삼류 화가 출신의 히틀러와 아웃사이더적 성향을 가진 중산층 세력이 만든 60명에 불과했던 독일노동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권력 바로 앞에 도달한 것이다.
-선거 전후 히틀러는 자신의 친위대와 돌격대를 동원하여 제1당으로서의 권력을 배경 삼아 공산당을 무력으로 공격한다.
-이런 불법적인 폭력에 나치당과 공산당은 극한 대립을 하고 결국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후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된다. 독일에서 우선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세력은 공산당이었다.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만들기 위해 히틀러는 국회의 민주적인 절차를 방해하고 정국의 혼란을 조장한다. 1당이지만 득표율이 4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한계를 통감하고 있었다.
-이에 국회를 해산하기 위해 정국을 혼돈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해 11월 히틀러의 뜻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다시 총선이 치러진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33% 196석을 얻어 오히려 의석수가 줄어드는 성적표를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잠시 쉬어가는 것일 뿐 히틀러의 정치적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독일은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 지형으로 볼 때 나치당이 사민당과 연합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더더욱 3당인 공산당과는 연합할 수 없었다. 또한 그 외의 소수당도 나치당과의 연합을 회피하였다.
-이미 80살이 넘은 고령의 힌덴부르크는 허수아비 대통령이었고 권력의 핵심은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광기를 알고 있던 지식인들은 그에게서 ‘피의 냄새’가 진동한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칠 것 같은 전운이 감돌았다.
-아직도 망나니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득권층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설마, 이 위대한 독일이 그따위 망나니한테 어찌 되겠는가...
-하지만 대중에겐 히틀러는 자신들을 구원할 구세주였다. ‘유대인에게 죽음’을 외치며 증오의 수치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 광기에 대중은 위대한 아리아인만이 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노라고 외쳤고, 이에 폭력과 선동 그리고 전체주의와 독재는 합당한 것이라고 공식화했다.
-1933년 1월에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다음 달 2월에 독일 의사당 화재 사건이 발생한다. 히틀러 정부는 의사당 화재는 공산당의 소행이며 이는 혁명을 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발표를 하고 힌덴브르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대대적인 공산당 사냥에 나선다. 당시 공산당 당수였던 에른스크 텔만을 비룻한 당 간부 등 4천여 명이 체포된다.
-그리고 3월 히틀러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입법부를 장악하기 위한 집요한 획책을 꾸몄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대 실망이었다. 전체 의석에 44% 288석을 획득하여 과반수 달성에 또 실패한 것이다.
-이런 결과에 당황한 히틀러는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민주적인 선거로 의회를 장악하는 것을 포기하고, 행정 권력으로 의회 권력을 삼켜버리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행정력으로 입법부를 무너트리는 쿠데타의 일종이었다. 그로부터 11월까지 이르는 기간은 독일 역사에서 가장 폭력과 선동이 난무한 시기였으며, 유대인 탄압도 행동으로 본격 시작된다.
-결국 히틀러는 공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한 법원을 이용하여 공산당을 불법 정당으로 만들어 해산시킨다. 그리고 소수 정당들도 해산시키고 마지막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킨 기득권의 상징인 사회민주당도 숨통을 끊어놓는다.
-강하고 새로운 독일을 위해서라면 대중에겐 민주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독재정권으로 인한 폭력과 공포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 상황에서 반나치 운동을 전개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나치의 선동정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하여튼 이제 독일에서 합법적인 정당은 나치당 하나밖에 없었다.
-그해 7월에 열등한 사람, 정신지체자와 정신병자와 기타 장애인들을 강제적으로 불임을 해야 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 법에 적용되어 실질적으로 불임하는 사람들이 40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유대인은 의사, 법률가, 농장 경영자 등을 할 수 없는 법안인 전문 공무회복에 관한 법이 통과되는 데, 그 법은 나치 독일이 태어난 후 첫 번째 반유대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언론은 이런 히틀러를 향해 맹비난했다. 그동안 독일의 정국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유럽 언론은 폭력과 공포의 칼날을 휘두르며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히틀러의 욕망을 간파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강하게 토해냈다.
-그해 1933년 11월 국회는 해산되고 다시 총선이 치러진다. 선거에 나선 당은 나치당 하나였다. 득표율 92%에 총 의원수 661명 중 602명이 당선된다. 바이마르 제국이 마감되고 나치 독일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시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전권 위임법도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한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히틀러는 그것을 전제로 국제연맹 탈퇴 건을 국민투표에 올리고, 역시 통과시킨다. 괴물 같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탄생한 것이다.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고부터 유대인 탄압은 말에서 행동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해 5월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등 유대인이 쓴 서적이 괴벨스의 선동에 의해 34개 대학에서 화형식이 거행되고, 유대인 작곡의 음악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1938년 브레히트는 당시 상황을 풍자한 ‘분서’라는 시를 미국에서 발표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20세기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영혼의 정화식이라 불린 이 분서 사건은 진시황의 분서 사건과 비교하며 두고두고 역사에 회자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독일 탈출이 시작된다. 현대판 출애굽기였다. 금융인 변호사 사업가 의사 등과 그리고 세계적 명성의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이 영국과 미국과 남미 등 세계 각지로 떠난다.
-독일에서 유대인이 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광기 가득한 분위기가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그런 압박감이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목을 죄고 있었다. 자신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 동화되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유대인은 해외 탈출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독일에 계속 남아 온갖 박해를 겪다가 게토라는 집단 거주지에 수용되었고 결국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된다.
-1933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미국 망명을 시작으로 유력한 유대인 과학자와 문화 예술인들의 탈 독일이 이어진다. 20기 초 양자역학의 새 장을 연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 중 막스 보른이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1954년 노벨 물리학 상을 받았다.
-1934년에는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1938년에는 원자핵 분열을 처음으로 발견한 여성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가 스웨덴으로 떠난다.
-이제 독일에는 하이젠베르크 외에 물리학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기존의 뉴튼 물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20세기 물리학계에서 함께 연구하던 유대인 물리학자들이 이제 히틀러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 이외도 독일과 유럽에서 살던 수많은 유대인 기술과학 문화예술인들이 미국 과 영국 등으로 탈출을 한다. 그렇게 탈유럽을 한 유대인들의 면면을 보면 각계에서 당대 최고의 대가들임을 알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의 최대 수혜국은 미국이며, 따라서 히틀러로 인해 미국이란 초강대국이 탄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있다.
-이제 유대인만 독일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 반나치 운동을 하던 정치인들도 박해를 받고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대표적인 인물이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하여 유대인 게토 추념탑에 무릎을 꿇었던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였다. 나치 독일 시절 젊은 정치 초년병이었던 브란트는 나치의 집요한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을 했다.
-그리고 종전 후 서베를린 시장을 지낸 에른스트 로이터, 사민당 당수였던 오토 벨즈, 1950년대 사민당 당수를 지낸 에리히 올렌하워 등이 망명을 하였다.
-유대인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반나치 운동을 하던 정치인들은 강력한 저항을 하면서 망명과 강제수용소와 가택 연금과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하이 히틀러’를 외쳤다.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만들어지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고, 1941년 본격적인 홀로코스트가 시작되고, 그리고 1945년 4월 30 일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그 광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600만 명의 유대인과 200만 명의 소련 포로, 숫자도 파악할 수 없는 동유럽 슬라브인과 그리고 수많은 집시와 장애인과 동성애자 등이 이유도 없이 학살당하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끝났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의 멸망과 열등한 인종에 대한 청소를 실행에 옳긴 ‘최종 해결’이 집행되고 ‘죽음의 행군’을 거쳐 그렇게 꿈이 거의 다 실현될 무렵, 악도 무너졌다.
-21세기 현재도 유럽에서 극우당이 득세하고, 그 당을 추종하는 극우단체들에 의해 폭력적 인종차별 현상이 백주 대낮에 나타나고, 특히 축구장에서 벌어지는 노골적 인종차별 행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럽에서는 일상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거대하게 집단화 된다면 그리고 그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또다시 잠재되어 있던 집단적 광기가 폭발하여 세계를 휩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