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르의 변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범죄 수사극을 빙자한 순수 연애 멜로물이라면 비상선언은 비행기 테러사건을 빙자한 재난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범죄스릴러 장르에서 갑자기 돌변하여 사회의 윤리관과 철학의 타당성을 조명해 보는 사회비판 영화로 성격이 변화한다. 한 영화에서 장르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들 수 있다. 가족영화에서 호러물 범죄물등의 장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제가 일관되기에 기생충은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휩쓸 수가 있었다.
과연 비상선언, 이 영화는 장르의 변화를 훌륭하게 수행했을까?
2. 전반부 비행기 테러 – 범죄스릴러 장르
이 영화의 전반부는 비행기 테러사건을 다룬다.
진석(임시완)은 죽음의 전염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천식 예방 도구에 넣고 화장실 안에서 자신의 겨드랑이를 찢어 천식 예방 도구를 숨겨 출국 심사대를 통과한다. 그는 화장실에 바이러스를 살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바이러스테러를 자행한다. 천식 예방 도구를 풀어 바이러스를 비행기 전체에 살포한다.
그런데 비상선언은 이전의 하이재킹(비행기 납치)를 다루던 영화들과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를 납치하여 돈이나 정치적 요구사항을 관철하려던 이전의 하이재킹 영화들과 달리 비상선언에서 유진석(임시완)은 죽음의 전염병을 유발하는 초강력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비행기 테러의 범인, 수법, 그 결과는 이제 밝혀졌기에 관객은 당연히 범행의 원인 내지 동기와 목적이 이제 밝혀지겠지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기대를 야심차게 배반한다.
대개 범죄에는 원인과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불만 내지 재물욕이거나 정치적 욕망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진석에게는 뚜렷한 원인도 목적도 없다. 그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추궁에 진석은 자신은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이 전부 죽었으면 좋겠으며, 거기서 쥐새끼들처럼 살아남으려고 하는 모습이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미국물을 먹은 최고 금수저 지식인으로서 어머니의 가혹한 가정교육에 대한 반발심,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그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싸이코 패스라는 설명으로 퉁쳐 버린다. 그저 죽고 싶고 죽이고 싶을 뿐이라는 것이다.
맹목적 반사회성, 맹목적 악마성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아무런 원인도 없는 증오범죄는 현실에 많이 있지만 그것은 영화적 소재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보는 이유는 어떠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탐구하고 거기에서 감동을 받으려는 이유가 큰데, 아무런 원인이 없으며 그저 이런 증오범죄가 있었다고 퉁치는 것은 사랑없는 결혼 만큼이나 의미없고 위험한 일일 것이다.
백배 양보하여 일단 이를 반사회성 소시오 패스로 퉁친다 하여도, 이유도 목적도 없는 최악의 빌런으로서 임시완은 베트맨 다크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서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조커의 악마성에 전혀 근접하지 못한다. 이는 그의 연기의 부족이기도 하고 감독의 역량의 부족이기도 하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게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며 막을 내린다.
3. 후반부- 재난물 장르
테러범 진석이 죽고 나자 영화는 갑자기 재난물로 둔갑한다. 범행의 원인과 그 대책은 이제 관심없고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비행기 승객들을 어떻게 치료하고 어떻게 대우하느냐?의 문제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 과정에 미국과 일본 한국민의 대응이 이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
1) 미국 일본의 대응
진석이 퍼뜨린 바이러스가 치명적이라는 점, 백신이 아직 없다는 점을 들어 미국과 일본은 자국내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국제법과 관련 조항을 모르기는 하나 감독의 지나친 오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 이런 위급한 상황이 있다면 미국과 일본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착륙을 허가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아무 관련없는 미국과 일본을 끌여들여 붚필요한 증오심을 자극한 것은 감독의 커다란 패착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현실성 없는 장면을 본 미국인과 일본인이 과연 이런 영화를 환영할까?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이런 식의 접근은 찬성할 수 없다. 이처럼 비상상황이면 미국이건 일본이건 아프리카건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등 그 어느 나라 건 비상착륙은 허락할 것이고 그들은 봉쇄한 상태에서 치료해주는 것이 국제법과 인도주의 견지에서 타당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 대해 맹목적 적대감을 심어주었다는 비난에서 감독은 자유스럽지 못할 것이다.
2) 한국 정부와 국민의 대응- 공리주의의 문제점
한국정부와 국민 역시 치명적인 전염병 덩어리인 비행기의 착륙을 거부한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죽음을 요구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 철학, 그 철학을 이어 받아 다수결 원리를 확립한 현 민주주의의 원칙상 당연한 것 이리라. 공리주의와 민주주의는 철저히 소수의 피를 먹고 자란다. 철저히 소수를 짓밟고서야만 성장할 수 있는 철학이고 원리이다. 공리주의와 민주주의의 민낯인 셈이다.
감독은 이점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점을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이 영화가 의미있다면 오로지 이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백신이 없다고 절망한 비행기의 임시기장 재혁(이병헌)은 승객들의 중지를 모아 착륙을 거부하고 공중에서 전원 자살할 것임을 통보한다. 참 가상한 결단이나 현실성 없는 영화적 결단임이 분명하다. 좀 어처구니가 없는 신파임이 분명하다.
4. 해결책
감독이 제시한 해결책역시 옹색하기 그지없다. 공리주의 원칙은 파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으면서도 공리주의 내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내놓은 해결책이라는 것은 구인호(송강호)의 비현실적인 개인적 결단이다.
그는 스스로 바이러스 전염병에 걸리고 백신이 효과 있음을 입증시켜서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킨다는 것이다. 공중에서 맴도는 비행기의 연료는 떨어져 가는데 인호는 스스로 전염병에 걸리고 백신 치료를 받고 그것이 효과가 있어 깨어난다. 모두가 예측할 수 있는 시나리오대로 척척 진행되고 결국 재혁은 비행기를 안전하게 착륙시킨다. 백신이 효과 있으므로 착륙은 당연한 것이고 공리주의적 결단은 옳은 것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백신의 발견이 공리주의와 민주주의를 살린 셈이다. 구인호의 계획은 착착 맞아들어 비행기는 안전하게 착륙하고 영화는 끝난다.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감독의 입장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졸렬하고 비현실적인 결말을 내놓은 이 영화는 아무리 관객이 많이 들더라도 실패작이 분명하다.
5. 결
공리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점은 소수, 약자의 보호이다. 이 문제에 칼을 빼들었으면 다수의 행복 보다는 의무의 수행을 전면에 내세워야 만 했다. 그러나 감독은 그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즉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상착륙시키고 그들을 치료해야만 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공리주의를 치료하는 첩경인 셈이었으리라. 이것이야 말로 오히려 현실적인 해결책 이었으리라. 그들도 우리 국민이고 우리 가족이기에 치료하고 살려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코로나 19에 걸린 해외동포들을 충북 진천에 과감히 수용함으로써 함께 고통을 짊어진 자랑스러운 전력이 우리에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의 수행, 그 의무가 아무리 불리하고 어렵더라도 그 자랑스런 의무를 수행하는 정부이고 국민이어야만 그런 다수에게 희망이 있는 법이다. 감독의 역량과 철학의 부재가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은 영화가 될 것 같다.
첫댓글 무패왕님
어제 보았는데
공감을 함께 합니다
서울 행사에 맞추어 저도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초 호화배역진을 못 살린 점이 못내 아쉬었구요.
근정님을 뵈온지 몇년은 된거 같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감각이 무뎌지고 모든것이 그저 오래된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뵈오날을 기대하며 무더위 잘 이겨내시길
안뇽~^^
존경하는 필향님!
무더위가 장난이 아니네요
올해 열대야는 무척이나 길고 지루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도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건강 건투하시길
저도 영화를 잘 보았습니다.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조금은 억지적인 연결도 있고
그럼에도 확실한 메시지는 있었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과연 무엇이 최선의 선택일까?
통상 사람들은 최상(Best)을 꿈꾸면서
최악의 상황(Worst)을 피하려고 준비하고
최적의 상황(Most)에서 타협을 하는 듯합니다.
단지 시원한 아니 추운 극장에서 한여름의 무더위를 보냈답니다.
그것만으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16명의 동행친구들과의
멋진 뒷풀이가 즐거운 시간이었답니다. 멋진 영화평 잘봤습니다.
Most 에서 타협하는 것이 정의 이다
새겨들어야할 명언인것 같습니다.
정의의 관점에서 영화를 해석해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관점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무패왕님의 감상평을 읽어보니
한국의 항공 재난영화 제작 시도는 아직 역부족인 듯 싶네요.
스토리의 동기와 전개에 있어 섬세한 심리묘사와 각 상황 간의 개연성 부족.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바닥이 훤히 보이는 작위적인 장면 설정 등
그동안 한국영화를 보며 항상 느껴왔던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나타난 영화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안 보았고 앞으로 볼 생각도 없는 영화지만
게다가 어설픈 반일, 반미감정까지 내용 안에 버무려 보려 했다면
Too much였네요.
이미 바이러스에 관한 한 준전문가 수준이 되어버린 국민들을 상대로
앞으로 바이러스 감염을 주제로 나오는 영화들은 상당히 디테일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코웃음만 사게 될 졸작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을 거예요.
한국영화의 발전을 기대해 봅니다.
이 영화를 코로나 이전에 제작했다 합니다.
감독의 예지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저도 하이재킹 영화인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아연 실색하고 돌아 왔습니다.
감독이 한국사회에 대해 할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대 사회적 메세지는 세련되고 우아해야합니다.
님의 평가대로 한국의 항공 재난영화는 아직 역부족인듯하고
개연성 없는 전개에 억지 신파등
....
한국 관객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한 영화는 이제 설자리가 없을 듯 합니다.
지성미인 라일락님!
어제 봉사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회원님들과 함께하신 점 높이 평가합니다.
이제 우리 까페의 주연으로 등극하신 것 같습니다.
영화평등 님이 올려주신 좋은 글들도 잘 보고 있습니다.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종종 오프에서 만나뵙기를 기원합니다.
무더위에 건강하시길...
무패왕님 의 영화평은 전문가적 수준임에
늘 감탄 하면서 읽고 있어요.
언젠가 오프모임 에서 뵐 기회가 온다면 꼭 술한잔
나누고 싶은분 이기도 합니다 ㅎ
남은 여름도 건강하고 활기차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
아침숲님!
항상 챙겨주시고 신경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 또한 님을 뵙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저도 오프모임에 자주 참여 하려 합니다.
조만간 뵙기를 희망합니다.
무더위에 건강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