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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서 세 번 살아온 사람 푸대접하는 건 부산 시민에 대한 예의 아니다”
부산서 3선 성공한 민주통합당 조경태 의원
강원도 함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영남 내륙을 돌고 돌아 부산을 동서로 나누며 바다로 흘러든다. 낙동강 모래사장의 위쪽은 사상(沙上)이고, 아래쪽은 사하(沙下)다. 낙동강의 서쪽은 강서구다.
4·11 총선 기간 중 전국적 관심을 끈 지역은 문재인 후보가 출마한 사상구였다. 북구강서을 역시 문성근 후보가 출마해 관심을 모았다. 야권은 이 지역을 ‘낙동강벨트’라고 이름 붙이고 정권교체를 위해 이곳에서의 승리가 필요하다며 안간힘을 썼다.
4·11 총선 이후의 최고의 관심지는 사하구로 달라졌다. 사하갑은 문대성 새누리당 당선자의 학위 논문 표절 의혹 때문이고, 사하을은 민주통합당 조경태 후보가 새누리당 텃밭인 부산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4·11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 문재인 후보는 사하을구에 한 번도 지원유세를 하지 않은 반면 박근혜 위원장은 두 번씩이나 사하을에 다녀갔다. 그럼에도 조 의원은 여론조사에서도 줄곧 1위를 유지했고 방송사 출구조사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결국 그는 58.2%로 당선됐다. 2위인 안준태 새누리당 후보(41.8%)와는 16.6%포인트 차였다. 사상구의 문재인 당선자는 득표율 55.0%로 2위인 손수조 후보와의 격차는 14.3%포인트였다. 민주당이 사상구에 당력을 집중시켰던 점에 비춰 조 의원의 성적표는 문재인 당선자의 그것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노무현 “조경태 학습관 지어야 한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텃밭에서 3선도 힘든 마당에. 한 번 정도는 운이 좋아 당선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적지(敵地)에서 내리 3선을 한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비밀이 있다. 조경태 의원의 3선 성공은 오로지 개인 역량으로 이뤄낸 것이다. 이런저런 궁금증을 갖고 지난 4월 17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조 의원 사무실에서 조경태 의원을 만났다.
기자는 조 의원과는 초면이었다. 가까이서 본 조 의원은 맑고 투명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욕심을 비우고 검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직자 같은 인상을 주었다.
- 지역주의 바람이 왜 사하을구에선 통하지 않았나. “지역주의 바람이 세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지역주민들과 호흡하고 소통한 덕분이라고 본다.”
- 유권자들은 겉으로는 당을 떠나 일 잘하는 사람을 뽑는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지역주의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1996년 스물여덟 살 때 ‘꼬마 민주당’으로 처음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으로 나섰지만 역시 낙선했다. 그때 내가 배운 게 있다. 겸손하게 지역구민과 호흡하고 봉사하는 정치인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 4년간 그렇게 지역에서 봉사해왔다.”
- 그게 2004년 총선 때 부산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유일하게 당선된 요인이란 뜻인가. “그렇다. 조경태에게 맡겨 보면 잘하지 않겠나 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선되었다. 배지를 달고 열심히 노력하니까 지역에서 조경태를 뽑으니 다르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 어떤 사람은 2004년 당선을 ‘소가 뒷걸음질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라고 했던데. “(웃음) 선거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 않나. 정치는 운이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조경태냐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다 시도했는데. 노무현·김정길도 부산에서 민주당으로 도전했지만 안 됐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내가 부산에서 유일하게 당선되어 청와대에 들어가자 ‘조경태 학습관’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 2004년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자 빨갱이가 당선되었다고 술렁거렸다고 하던데. “부산의 다른 지역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사하을구가 빨갱이가 사는 지역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사하을구 주민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하을구 주민의 자긍심은 최고였다.”
2000년 총선 당시 노무현 의원은 종로를 떠나 북구강서을에 도전했지만 결국 낙선했다. 김정길씨는 4·11 총선에서도 부산진을구에 출마했으나 2위에 그쳤다. 김씨는 야권단일 후보로 2010년에는 부산시장 후보로 나섰지만 역시 지역주의 바람을 이기지 못했다.
- 새누리당 후보를 17%포인트 차로 누른 배경은 어디 있나. “나는 의정활동에서 친서민적 발언을 많이 했고, 실제로 친서민적 정책을 입안했다. 2009년 정유사의 LPG 가격담합을 고발해 정유사에 6600억원의 과징금을 물게 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대해 누구보다 택시기사분들이 고마워하신다. 그리고 중소유통상인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전국중소유통상인연합회에서 18대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내게 우수의원상 기념패를 주었다.(웃음)”
그는 지역구에서 신평~다대 지하철 공사를 착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신평이 종점인 지하철을 다대까지 연장시키는 공사로 2015년에 개통 예정이다. 7800억원 규모의 공사로 현재 공정률은 24% 선이다.
- 새누리당 박근혜 위원장이 두 번씩이나 지원유세를 했는데도 그게 안 먹혔다니 놀랍다. “두 번이나 오셨다.(웃음) 하지만 우리 지역에선 지역주의 반향이 일어나지 않았다. 지역을 위해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이 최고라는 생각을 주민들이 갖고 계셨다. 선거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예비후보가 8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다 포기했다. 그래서 부산 부시장 출신인 새누리당 후보와 내가 1 대 1로 맞붙었다. 그런데도 내가 17%포인트 차로 이겼다.”
- 지역구 의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뭐라고 보나. “지역구 의원은 국책사업을 잘 이해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구청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구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국정 전반을 살피며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박근혜도 뚫지 못한 조경태의 저력
- 지역구에는 주말에 내려가나. “주말에 가면 누가 좋아하나. 그 사람들도 쉬어야지. 나는 주중에 한 번씩 내려간다. 다른 의원들이 보좌관을 대신 보내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가 직접 찾아가 지역민들을 만났다. 직접 민원 현장을 확인하면서 주민들과 공감하고 소통한다. 최대한 성의 있는 모습을 보인다.”
-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사실 이게 대단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그런데 민원이란 게 구의원, 시의원, 구청을 거쳐 나한테 오는 것이다. 민원이 해결되도록 성심껏 노력할 수밖에 없다. 나는 1996년부터 이렇게 지역민들과 공감하고 소통해왔다. 그래서 지역민들은 나를 진정한 벗, 진정한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하구 다대 1동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종규(57)씨는 경남 통영 사람이다. 1973년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줄곧 사하구에 살아왔다. 김종규씨와 전화통화로 조의원의 지역구활동의 특징을 물어보았다. 김종규씨의 설명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직접 지역민과 만나려 노력하고 애로사항을 빨리빨리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민원의 해결 과정을 설명해준다. 즉각 즉각 답장을 해준다. 어떤 경우도 폼을 잡지 않고 주민들과 밀착되어 있다. 20년 동안 똑같다. 이런 게 몸에 배어 있다. 다른 사람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것이다.”
조 의원은 정치권에선 보기 드물게 이공계 출신이다. 경남 고성 태생으로 두 살 때 집이 사하구로 이사갔다. 경남고를 거쳐 부산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 어릴 때 꿈은 어떤 것이었나. “원래 꿈은 자선사업가였다. 나 자신보다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보다 힘든 사람을 돌보는 자선사업가가 인생의 최종목표다.”
어릴 적 꿈은 대개 주변의 영향을 받는다. 가장 빈번한 예가 부모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 다음이 어린 시절의 독서를 통해서 영향을 받는다. 그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나는 도시 빈민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자갈치시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며 4형제를 키웠다. 내가 셋째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어릴 때 너무 가난해 학습지 살 형편도 못됐다. 그때 어렴풋하게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터득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폐결핵과 늑막염을 앓았다. 병을 앓으면서 나는 또래에 비해 성숙해졌다. 한 번뿐인 내 인생을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자선사업가 꿈꾼 빈민의 아들
그는 부산대 토목공학과 86학번이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대학가 시위가 끊이지 않을 때였다. 그 역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시위에 참석했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1988년 초부터는 자칭 ‘리버럴리스트’로 살았다.
- 구체적으로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언제였나. “1995년이었다. 부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노점상을 단속하는 현장을 지나게 되었다. 완장을 찬 단속반원들이 노점을 철거하자 아주머니들이 쓰러져 통곡하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약자들이 사회에서 밀려나는 현장을 보면서 서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치를 하겠다고 혼자 결심은 했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1월, 그는 우연히 신문기사를 읽었다. 신문기사에는 총선을 앞두고 부산 사하을구에 출마하는 서석제씨 이야기가 실렸다. 서석제씨의 인터뷰가 불을 질렀다.
“당시 YS 정부의 핵심 실세였던 서석제씨가 사하을에 출마를 선언하면서 전국 최다 득표를 노린다는 얘기가 신문에 실렸다. 나는 그때 속에서 어떤 게 치밀어올랐다. 4선을 하는 동안 사하을에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최다 득표를 얘기할까? 나는 그때 노회한 정치인을 심판하겠다는 생각으로 출마했다. 그럼에도 서석제씨는 5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전국 최다 득표에는 실패했다.”
그의 정치 입문은 노무현·김정길 두 사람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남은 노무현·김정길·이철 등이 만든 정당이 속칭 ‘꼬마민주당’이다. 그는 출마를 위해 김정길을 처음 만났고, 김정길을 통해 노무현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1996년 꼬마민주당으로, 2000년도에는 새천년민주당으로 각각 출마했다.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나는 지역주의 청산을 위해 맞서 싸워온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정치를 해왔다”고 말했다.
정치 효율성 따지는 이공계 출신
문과 출신이 잡고 있는 정치판에서 조 의원은 이공계 출신이다. 문과 출신과 이과 출신은 사고의 출발점이 다르다. 그에게 이공계 출신의 장점을 물어보았다.
“정치를 효율성이 높게 한다는 것이다. 국회는 비효율적인 게 너무 많다. 의사 일정에서 시간 낭비가 많다. 빨리 처리해야 할 민생법률안 같은 것도 현안이 생기면 올스톱 되기 일쑤다. 일반적으로 문과 출신은 수치에 약한 면이 있는데 나는 이과 출신이라 수치에 강하다. 예산안에 대한 효율적 심사를 할 수 있다.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적지에서 당선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4·11 총선에서 또 한번 확인되었다. 조 의원은 재선의원 시절 변변한 당직 한번 맡아본 일이 없다. 인터뷰 도중 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정책위 부의장”이라고 했다. 그와 함께 17대에 당선되어 18대에 재선이 된 어느 수도권 의원은 대변인, 정책위의장 등 주요 당직을 다 맡았다.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과 부산 중 어느 곳에서 당선되기가 어려운가. 적지에서 두 번씩이나 살아온 사람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1996년 총선에서 충남은 김종필(JP)씨가 이끄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휩쓸었다. 그때 충남에서 신한국당 당선자가 딱 한 명 나왔다. 청양·홍성의 이완구였다. 신한국당은 곧바로 그를 대표 비서실장에 발탁했다. JP 텃밭에서 신한국당 의원을 당선시켜준 충남도민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메시지였다.
조 의원이 중앙 정치무대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 까닭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민주당 내 특정 계파에 속해 있지 않았다. 민주당에는 한 가지 통념이 존재한다. 호남이나 운동권 출신이 아니면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호남도 운동권 출신도 아니었다.
- 어느 계파에 소속하지 않아서 피해를 본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은 계파 벽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능력을 보고 중용했다. 계파 정치는 패거리 정치고 결국 정당 정치를 퇴보시키는 것이다.”
- 민주당이 새 지도부를 구성하면 이번에는 당직을 주지 않겠나. “중앙당이 명령하면 문지기 역할도 마다하지 않겠다. (잠시 생각하다가) 이번에 새누리당 후보가 호남에서 당선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 당장 새 지도부에 최고위원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내가 계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이런 대접을 하는 것은 나를 뽑아준 부산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게 과연 민주정당의 모습인가? 민주당이 나를 대접하는 것을 보면서 부산시민들은 민주당은 호남당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번에 그게 부메랑이 되어 당에 돌아갔다. 지역주의 바람이 다시 부산을 휩쓴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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