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인 자연 자연인 사물
송 진
파란물통과 회색 벽돌의 상관관계는?
속이 텅 비어있는 무쇠가마솥과 직사각형 나무빨래판과의 연결고리는?
회색가스통이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노란 양은 세숫대야의 키스는 묽을까? 짙을까?
뒤집혀진 빨간 고무장갑의 속살은 물집이 생기고
진홍빛 호스에게 신내림을 받고 있는 빗방울
마음상태 결정지우기에 매몰되기 싫은 시인은 사물에게 말을 건다
그래 사물아 너 마음대로 해봐
너의 뒤틀림대로
너의 공손함대로
너의 직관력대로
너과 함께 흘러간다
너과 함께 걷고 먹고 자고 뛰고 땀을 흘리고 땀을 닦고
너인지 나인지 안인지 밖인지 잎인지 꽃인지
너는 마늘껍질 가득 버려진, 무쇠 가마솥이 놓인, 장작이 있는 부뚜막 앞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트럭의 바퀴가 자갈의 눈, 코, 입을 수천 개 짓밟아도 자갈은 살아있다
못처럼
빗자루처럼
불쏘시개처럼
텅 빈 마늘 껍질 옆을 어슬렁거릴 때 비파나무 익어가는 냄새도 없었다
이끼 낀 샘물 수도꼭지에 일 미터쯤 연결된 진홍빛 호스에서 툭,툭,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
미끄러운 이끼를 지나 벽에 붙은 바위틈에 핀 마흔 아홉 개의 긴 팔이 헝클어진 오직 하나의 풀을 지나 용처럼 승천할 듯 구겨진 휴지조각과 눈싸움이라도 할 듯 뭉쳐진 신문조각, 오른쪽 날개부터 닳아버린 몽달 빗자루와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검은 장갑을 낀 손잡이가 파랑과 초록의 속살을 부채처럼 펴들고 있는 플라스틱 빗자루 그에게 고단한 몸을 누이도록 허락한 가로 7센티미터 세로 40센티미터 낡은 조각보 같은 옷을 입은 대추나무토막, 두더지를 잡으려다 놓친 방울뱀의 입처럼 기어다니는 은빛 집게
그들을 지나치려할 때 허벅지에 금이 간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있던 텅 빈 마늘껍질들이 깃털처럼 냄새를 허공에 날리며 너에게 자신의 존재를 손짓했다
그것은 물방울이 콘크리트 바닥 이끼 위에 똑똑 떨어짐으로서 그들이 경쾌하거나 음울한 모습을 전달할 때보다, 수련이 조용한 얼굴로 오전의 산에서 올라오는 햇살을 맞이할 때보다 훨씬 더 경이로웠으며 너는 이 경이로움으로 너를 만날 것이며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혀를 나누고 몸을 나눌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너에게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기이한 너의 짧고도 긴 사정이 될 것이다
Ⅰ. 식물의 암호 또는 사물의 암호
계요등 넝쿨을 따라 마주나기 잎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면 (이미 너도 모르는 사이 암호가 해독되어 실핏줄의 한 구석에 저장되어 있겠지만)너는 이미 식물의 암호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잎을 만지다든지 잎을 쓰다듬는다든지 잎을 뜯는다든지 잎을 핥아본다든지 말이다
너는 너의 지시의 힘을 해독하며 살아간다 새벽에 꾼 꿈이 미래를 발현하듯 이름 모를 나무 잎사귀 위에 떨어진 보랏빛 칡꽃 한 송이
가 하루의 욕망을 그대로 발현한 것이고 너는 발현된 욕망대로 움직인다
Ⅱ. 줌 그리고 인
한줌의 햇살 한줌의 구름 한줌의 바람 이것은 모두 유효한 언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누가 다가설 것인가 용기 있는 자가 시를 얻는다
설익은 단호박을 반으로 자른다
씨가 팥으로 가득채워진 것 같다
젓가락으로 팥을 빼낸다면
젓가락에게 예의가 없다 할 것인가
턱시도를 입고 검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격식을 갖추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젓가락을 사용한 손가락에게
손가락의 못갖춘마디에게
손가락의 못갖춘 손톱에게
턱시도를 입힐 것인가
Ⅲ. 물 속에 잠긴 시
붉은 기둥 뒤에 앉아있는 쓰레받기
함석지붕을 이고 선 자판기
끈, 매듭, 종에서 너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가
시멘트로 물체를 고정시키는 편리함을 거부한다
나사로 조우는 잔인함을 거부한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집착하는 순간접착제의 가혹행위를 거부한다
사물은 사물대로 흘러간다
시는 흘러간 아름다움을 수장한다
Ⅳ. 석류
에스컬레이트에서 승차권을 놓치는건 너무 위험해 승차권을 잡는 순간 너의 손가락은 긴 혀 속에 빨려들어가 으깨어지지
이제 맨홀 뚜껑이 열렸어
드디어
드디어
맨홀뚜껑이 열렸다구
사다리를 빠르게 내려가서
시궁창에 발을 담궈야지
발바닥에 날개가 달리는 순간
귀에서 혀가 산길에 지네처럼 기어나오는 순간
얼마나 간절했던지
얼마나 간절했던지
강가에 누워 애인 어깨에 매달려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지
전차가 우뢰같은 소리를 내며 내 머리통 위를 지나갔지
Ⅴ. 목성공포증
잠자리가 되어버린 잠자리
죽음은 물결을 따라 흘러가고
예전의 너는 나
지금의 너도 나
앞으로의 너도 나
그러니 울 수밖에
그러니 웃을 수밖에
우편배달부가 전보를 전해주어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바뀐 아기가 곧 도착한다고
우리는 곧 도착할 바뀐 아기를 위해 화덕 위에 비루나무스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Ⅵ. 반야사 요가
하얀 팥빙수를 사각사각 비비는 소리
새벽 호박잎을 만지면 그런 소리가 들린다
잎사귀를 떼서 손바닥에 펴서 들고오면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전에 팥빙수 비비는 소리는 죽음의 턱을 넘어 손끝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 순간 아득해진다
생과 죽음의 간격이 너무 짧다
횡단보도만한 거리도 안된다
저 깜박이는 신호등의 저장주머니만큼도 안된다
그런데 난 살아있다
몇 초 전에도 살아있었고
몇 초 후에도 살아있다
몇 초 전에 살아있던 사람이
몇 초 후에 죽은 사람이 되어 가족 품에 안긴다
Ⅶ. 웜홀
지렁이가 시멘트 바닥에 길게 늘어져 죽어있다
몸이 세군데 절단되어 개미떼들에게 둘러 쌓여있다
축축한 흙이 있는 그늘진 곳으로 옮겨준다
지렁이는 죽는다
블랙홀이 끌어당겨도
화이트홀이 밀어내어도
한 발자국이 수억광년을 오갈수있다해도
지렁이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씁쓸한 웃음을 남기고 사라진다
지렁이 밥그릇에 대추방울토마토 한 알 담아준다
길쭉한 대추방울토마토가 잘 씹히지 않는지
오른쪽 왼쪽 어금니로 씹어보다가 뱉어낸다
길죽한 얼굴이 찌그러져 있다
이빨자국 투성이다
피가 베어져 나온다
창자가 바흐의 무반주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지렁이는 다시 입에 넣고 씹는다
그래도 먹힌다
그래도 먹는다
살아있어라 어떤 모습이든
대추방울토마토를 죽었다고 말 할 수 없다
살아있다
풀숲에 벗겨진 신발 속에 자라는 도라지꽃처럼
단지, 풀지 못한 함수의 꽃봉오리를 하나씩 머리에 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것이다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호박잎이 말했다
나는 새로운 역사를 쓸거야
팥빙수처럼 사각사각 고운 소리를 가진 가시들의 눈과 입과 귀를 쓸거야
칠천만개의 혓바늘이 장맛비와 함께 빨갛게 부풀어올랐다
고집은 세 시
너는 일곱 시
나는 다섯 시
피 묻은 머리카락은 네 시
찢어진 항문은 열일곱 시
어깨를 움츠리는 건 열 시
군화에 짓밟힌 꽃무늬 팬티를 입는 건 열네 시
짓이겨진 자두를 보지가 삼키는 건 열 한시
친환경 페인트를 항문에 주물처럼 쏟아 붓는 건 스물두 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신세계신석기가 열리고 있다
Ⅷ. 사물의 인식론에 관한 연구
내가 현재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분야는 사물에 관한 고양이의 반응이야
축처진 자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냐는거지
불안, 초초, 너그로움 어느쪽일까
없다고?
없으면 말고
주차장 입구에 붙어있는 출차주의
그 안내표지판에 대해
화가 나느냐
조심스러우냐
뭔 소리냐구?
그럼말구
화장실에 붙어있는 휴지를 아껴씁시다
라는 문구에 고개를 끄덕이느냐
고개를 옆으로 세차게 흔들다 고개가 고개를 고개에서 고개너머 세차게 날려버리느냐
아니면 문구의 목을 짓밟아버리고 싶으냐
문구의 축 처진 자지를 힐로 뭉개버리고 싶으냐
하얀 벽에 패대기를 치고 싶으냐
세면대를 강아지로
변기를 밥그릇으로
그리고는
인식의 인식을 버리고
면식범을 찾아가지
상수리나무에 세로로 길게 패인 보지를 벌리고
Ⅸ. 겨드랑이에 깃든 황금새
비가 내린다
장맛비
비속으로 손가락을 내민다
비야 너 속으로 들어와
너를 맛보는 비
너를 간보는 비
깨진 화분 속에 꽃이 자란다
굽어진 나뭇가지 옆으로 잎이 자란다
한 입 베어진 채 길가에 버려진 자두의 종아리
툭, 떨어지자 곪아들어가는 모과의 새끼손가락
벌레들이 뜯어먹다 남겨둔 붉은그물버섯들의 플랫슈즈
맥주거품이 간신히 붙어 숨을 몰아쉬는 소주잔
여치날치숨새들이 겨드랑이로 모여든다
겨드랑이는 지붕을 엮어 처마를 눕힌다
눕혀진 처마의 치마 아래로 지렁이들이 모여든다
허리잘린, 목도리 두른, 세토막난, 개미들이 까맣게 올라타고 있는, 물에 퉁퉁 불은,
너가 양배추를 모자처럼 뒤집어쓰고
침대시트처럼 웃고 있다
문득 컵이 웃음이 생각났다는 듯 웃는다
Ⅹ. 모리스 참외
벨벨벨벨벨
딜딜딜딜딜
루루루루루
(간주 중)
기타 연주..누구의 연주?
곡명은? 정확히 기재할 것
흐흐흐흐흐
헐헐헐헐헐
히히히히히
럴럴럴럴럴
추추추추추
(간주 중)
피아노 연주..누구의?
곡명은? 정확히 기재할 것
또또또또또
료료료료료
뉴뉴뉴뉴뉴뉴
르르르르르
커커커커커
(간주 중)
첼로-누구의? 어떤 곳?
같이 흘러간다
때론 별똥별처럼
때론 토네이도처럼
때론 너처럼
때론 콜팝처럼
너는 창백한 결벽증상에
너는 가벼운 간질증상이라고
문의사는 오진진단서를 두꺼운 윗입술과 가느다란 아랫입술사이에 넣어 씹으며
비문증 물고기눈을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깊이 사정을 했다
2014년 시와미학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