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가 바로
네가 말하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니(요4:26) 아! 이분이
바로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메시아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게 바로 창조의 근본이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부르심을 받은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신기한 매커니즘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거시면 듣는 자들은 듣는 중에 구원을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표현합니다.
이 여인이 주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안 후에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확실한 Turning point입니다.
물동이를 버리는 것은 육신의 욕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 이 여인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께 다가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요4:42)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주님의
양식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요4:34) 우리가 주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 것도 주님의 양식이 되므로 이를 두고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하십니다(계3:20)
그럼에도 예수만 알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지식뿐이기 때문에 양식이 안 되어 결국 예배가 안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요4:4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확연하게 보여주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요4:50)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즉시 이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저와 모든 독자들이 항상 염두에 둬야 할 말씀은 요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이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3일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시고 그 이름으로 진리의 성령을 보내셔서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만물을 지으신 말씀 곧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언젠가 도올이란 사람이 말씀(道)이 하나님 보다
선재 한다고 방송에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 말을 한지 20년이나 지났음에도 아직 이 道를 몰라요.
이 사람은 이 호 로고스의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신 줄 모릅니다.
지금도 말하는 걸 보면 예수와 현재 교회모습에 대해 비판만 합니다.
참 안돼 보이고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시온 산에 선 144,000을 보이는 대로 믿음으로 어린 양과 함께
선 것을 확신하면 될 일을 12지파를 창조한다거나 창설한다거나
하는 늙은이와 불쌍하고 안쓰럽기는 도개지간이라 보입니다.
이 사람은 세상 잡다한 것에는 똑똑한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야 말로 돌(도올)이요 돌아올(?) 사람입니다.
천하가 천번 만번 바뀌어도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만유이시며(골3:11) 만유의 주재이십니다(유1:4)
이 분이 우리 안에 계시니 우주의 주재를 모신 우리가 소우주입니다.
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는데 까지 붙좇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성난 파도가 잔잔해졌네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되더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창조의 말씀 자체이시므로 말씀하시니 말씀대로 되고 마는 겁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살아나는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제나 그대로 이루어지는 창조의 말씀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생명이요 그게 바로 복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을 먼저 거실 때에 실패한 일이 있는가요?
구약과 신약을 다 찾아 봐도 인간의 말은 결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아무리 외치고 결단을 해도 자신의 사망과 어두움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지 않으면 회(悔)는 되는데 개(改)가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이 깨달아져야만 회를 하고 그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는 항상 세례(침례)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전 곧 말씀과 세례와 성찬이라 말하는 겁니다.
아무리 형편과 사정이 좋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 길은 복된 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인 야곱을 보고 요셉을 보세요.
그리고 다윗을 보세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23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에게 지팡이나 막대기처럼 위로가 되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는 믿음의 배짱입니다. 우리도 그래야합니다.
욥이 고난당할 때에 빌닷, 엘리바스, 소발 이 세 사람이 한 말은
합당하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다 인간의 말들로 욥에게 다가갔으나
엘리후가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욥에게 다가갔습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네가 하나님보다 더 세냐? 네 인생이 네 손에 달렸냐?
네가 너를 책임 질 수 있어?' 이렇게 직격하고 나오니 욥이 그만 수그러듭니다.
사람의 말은 아무리 잘 전해도 상대방의 약만 올리고 설득이 안 됩니다.
시16편 7절에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 꾸짖기도 하고 바로잡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하다고 푹 쓰러져 자는 것보다 가슴이 뜨끔뜨끔하도록
하루 일을 되돌아보고 회(悔)와 개(改)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사실 주님이 그 집에 가서 말씀을 좀 전하라고 할 분위기가 되어야만
그 집이 주의 구원과 복이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얘 그 집은 가지마라
마이동풍이야 내가 가도 안 돼 네가 가봐야 헛일이야 이러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건다는 것은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간 요나에게도, 자신이 의롭다고
철석같이 믿는 욥에게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택한 백성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롬10장)
에서에게는 하나님이 평생토록 한 마디의 말씀도 안 하시지만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따라다니면서 계속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천사를 보내 씨름까지 시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말을 걸어 바로잡아 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밥 먹었어요? 커피나 한 잔 합시다 정도의
말을 하고 말아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느냐
그렇지 아니하느냐는 복과 저주의 바로미터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바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하신 그 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