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절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의 예대로 하더라도 확정된 언약 곧 계약서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합니다. 동화속의 이야기지만 청개구리도 유언은 듣습니다. 요14-16장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산상수훈(마5-7장)은
최초설교이며 다락방강화는 고별설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14-16장을 100번만
읽으면 성경의 깨달음이 굉장할 거라고 말하며 다이내믹한 사역을 하려면
매일 읽으라고 권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도 요14-16장을 영어로 매일 듣습니다.
16절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정하여진 약속인 3장 14절의
성령의 약속이며 그 다음에는 자손인데 오직 하나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새 언약이 이루어지면 책에 기록된 성경이 ‘안에 기록되는 약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임하신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입니다(창18:10)
17절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미리 정하여진 언약이신 그리스도보다 430년 후의 율법이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컨대 시중에 유통되는 수표를 보면 액수와 지급일자와 지급을 보증하는
은행 이름과 소지한 자에게 지급하라는 문구와 발행자의 인장이나 사인이 있습니다.
믿음은 뱅킹 시스템과 방불합니다. 현금 카드로 돈을 인출하려면 은행과 약속이
된 카드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원하는 금액을 따라 인출하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심은 그 약속에 따라 믿고 구하라는 뜻입니다.
화폐를 만들어 한국은행장의 직인을 찍으면 유통이 되는 건 국가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성령이 보증하시면 하나님이 오케이하십니다.
18절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그 유업 곧 상속은 약속으로 주어진 겁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겁니다. 만약 율법이면 조건이 붙을 텐데 약속이므로 은혜가 됩니다.
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은 인간이 범법한 것 때문에 추가된 것입니다. 사람이 악해져서 중간에
율법으로 혼을 내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옆길로 가지 못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가두는 보호막으로 주셨습니다. 언제까지냐? 약속하신 자손(단수 ‘씨’독생자)이
오시기까지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이제 육체를 따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성령을 좇아 살므로 영생을 거두는 새 언약의 때까지입니다.
과일을 비유로 들면 율법은 과일 껍질과 같고 은혜는 과육과 같으며 진리는
생명의 씨와 같습니다. 껍질과 과육은 썩어지지만 씨는 새로운 형체의 싹을 틔웁니다.
중보자의 손은 천사 곧 시내산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베푸신 것이란 지정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엔 아들로 말씀하시는 겁니다(히1:2) 아들의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스며들므로 생명이 되어 믿음에 의해 살아지게 되는 겁니다.
20절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중보는 양쪽을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중보도 한 분이십니다(딤전2:5)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실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마5:17)
지금의 세상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종교통합을 꾀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현저하게 욕보이는 배도의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은 신불신간
어느 종교든지 창조주로서 같은 분이시지만 중보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원시적인 종교관으로 누구나 하나님을 다양하게 찾지만 인간을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중보는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그 길과 그 진리와 그 생명이십니다(요14:6)
21절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반대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나 살게 하는 율법이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겁니다.
그러나 아닌 겁니다. 율법이 인간을 살게 할 방향은 제시하는 건 맡지만 인간의
육신이 연약하므로 결국 죽이는 율법이 되고 맙니다. 이를 두고 칼빈은 필연이라고
말하므로 방향은 맞아서 마음은 원하지만 연약한 육신이 끝내 주저앉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through faith in Jesus Christ)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죄 아래에서 수용소와
같이 가두었습니다. 그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에
올라 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 안에서도 율법은 유효합니다.
다만 그 집행은 진리로 가는 조건으로 유예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죄인으로
말미암아 이 길만이 살길이라는 알고 딴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보호막인 겁니다.
진리를 따르는 그 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십니다(롬8:4)
먼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으심(항상 현재)으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인 사랑을 이루어 가십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