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에서 이르시길, “일체중생은 모두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망상 집착으로 인해 증득할 수 없느니라.” 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지혜 덕상은 중생과 부처에게 평등한 것이니 곧 성덕性德이다. 망상집착이 있으면 중생이고 망상집착을 여의면 부처로 중생과 부처님은 완전히 다르니 곧 수덕修德이다. 수덕에는 수순함도 있고 거스름도 있다. 성덕에 수순하여 닦으면 닦을수록 가까워지고, 수행이 절정에 달하여 확철대오하니, 비록 증득할지라도 무소득을 요달한다(증득함이 없어 증득한다). 성덕에 거역하여 닦으면 닦을수록 멀어지고 수행이 절정에 달하여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니, 비록 떨어질지라도 무소실을 요달한다(성덕을 잃지 않는다).
【강설】 《화엄경》에서 이르시길, “일체중생은 모두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증득할 수 없느니라.” 하셨다.
이 경문은 불타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불과를 증득하실 때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인광대사께서는 이 지혜와 덕상은 중생과 부처에게 평등한 것(生佛所同)으로 부처님에게도 있고 우리들에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중생은 단지 사람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모든 동물은 영을 가졌으니, 다 불성이 있다 그래서 왜 중생을 해쳐서는 안 되는가?
중생을 해침은 바로 부처님을 죽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래 구족하고 있는 성덕은 중생 한 분 한 분마다 모두 불성이 있기에, 모두 성덕이 있다. 그래서 육조대사께서 법문하실 때 첫 번째 문구는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줄, 본래 스스로 (모든 것을) 구족하고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오!” 였다. 본래 청정함과 본래 구족함은 바로 성덕이다. 당신은 언제 미혹을 돌이켜 깨달음으로 돌아가고 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이루어서 당신의 성덕을 회복하겠는가? 그래서 수행은 곧 미혹을 바꾸어 깨달음으로 돌아감이고, 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이룸이다. 수덕을 빌려 성덕을 드러내니, 성덕과 수덕은 마지막에 성덕과 수덕이 둘 아님으로 바뀐다. 우리가 삼귀의, 오계, 삼학, 육도를 받아들임은 곧 덕행을 닦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망상과 집착이 있다면 부처님과 중생은 하늘땅만큼 다르다.
그래서 덕행을 닦아야 한다. 그러나 인광대사께서는 수행의 과정에서 성덕을 수순함도 있고 거스름도 있다고 하셨다. 성덕에 수순하여 닦음이 순수順修이고, 성덕에 위배하여 본각을 등지고 육진경계에 합하면 곧 성덕에 거스름이다. 성덕에 수순하여 닦음은 말하자면 언제나 탐진치를 끊고, 부지런히 계정혜를 닦으며, 자비희사와 육도만행을 닦는 것이 곧 법신훈습(혹은 법성훈습)이다. 이렇게 닦을수록 당신의 불성과 가까워지고, 닦을 수록 당신의 성덕이 드러난다.
마지막에는 견사혹을 깨뜨리고 진사혹을 깨뜨리며 나아가 일품의 근본무명을 깨뜨리면 법신을 증득하니, 이것을 「수행이 절정에 달해 확철대오함」이라 한다.
일분의 법신을 분증하고, 41품 무명을 다 깨뜨리면 구경불을 이루어 상적광 정토에 들어간다. 41품 무명을 다 깨뜨려 상적광 정토에 들어가면 무소득을 요달한다. 이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한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無智亦無得)」 이다. 닦은 후에는 무상보리가 원만하니 원래 우리의 자성에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무소득을 요달함」이라 한다. 당신에게 여전히 얻을 바가 있으면 여전히 아我와 아소我所가 있어 성덕이 아니고, 원만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인광대사께서는 “비록 증득할지라도 무소득을 요달한다.”고 말씀하셨으니, 당신의 성덕으로 회복할 뿐이다.
「역성逆性」은 본각을 등지고 육진경계에 합함이다. 당신의 성덕을 위배하고 탐진치와 상응하면 당신의 불성과 어긋나게 된다. 닦은 후 영원히 삼악도에 빠진다. 비록 삼악도에 떨어질지라도 불성은 여전히 잃지 않는다. 「무소실을 요달함」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청정하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면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가 될 수 있고, 현명한 이도 어리석은 이가 될 수 있으며, 장수할 운명도 요절할 수 있고, 요절할 운명도 장수할 수 있다.
부귀빈천 및 자손의 번성과 멸족,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스스로 운명을 주재할 수 있다.
그러면(부귀 멸족의) 증거가 있어도 증거가 없어질 수 있고, 증거가 없어도 증거가 생길 수 있다. 높은 산을 오를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암벽을 뚫고 계단을 놓아 길을 낸다면 높은 산의 정상까지도 또한 곧장 오를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이치, 이러한 진리를 명백히 이해하면(了此) 우매한 사람은 현명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성덕에 거슬러 닦으면 당신의 근기는 틀림없이 마지막에 타락하고 만다. 성덕에 수순하여 닦으면 단명이 장수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성덕에 거슬러 닦으면 장수할 수명이 마지막에 단명하고 만다. 당신이 성덕에 수순하여 닦으면 부귀를 얻을 수 있다. 성덕에 수순하여 닦으면 후대의 자손이 모두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며 번창한다. 그러나 성덕에 거슬러 닦으면 자손이 끊어지고 심지어 삼대에도 내려가지 못하고 일대에 끝난다.
그래서 인광대사께서는 사람마다 모두 성덕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에 수순함과 거스름만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한결같이 자신이 운명을 주재할 수 있다. 불법은 대단히 과학적이다, 「(부귀 멸족의)증거가 있어도 증거가 없어질 수 있고, 증거가 없어도 증거가 생길 수 있다.」 이는 바로 당신의 복보가 큰 것은 전생에 닦아서 복덕과 복보를 갖추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수행할 줄 모르면 마지막에 복보를 다 쓰면 삼악도에 떨어지고 만다. 「증거가 없어질 수 있다」는 말은 당신이 전생에 잘 닦지 못했지만 금생에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원요범거사를 따라 배우면, 마지막에 한결같이 수덕한 공부가 있을 때 성덕이 바야흐로 드러나 업력을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아뿔싸, 당신은 “나는 업장이 무거워 복보를 누릴 수 없고 지혜가 열리지 않으니, 아무리 닦아도 잘 닦을 수 없다.” 말한다. 매우 많은 연우들이 나에게 불평한다. “나는 아무리 닦아도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왜 당신이 발원하면 영험이 있는데 내가 발원하면 영험이 없는가?” 나는 늘 그들에게 당신은 정말 보살이므로, 발원하면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래도 매우 많은 사람이 나에게 불평한다. “사형, 나도 발원이 있고, 나도 예배하고 있으며 나도 염불하고 있어요.”
내가 그날 방생을 하러 갔을 때, 한 연우가 내가 끝내려고 할 때 달려와서 나에게 말했다. “사형, 나도 채식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방생을 완료한 후 언제나 인과 이야기와 이치를 이야기하며 대중과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 말이 아주 일리가 있습니다. 나도 아주 오랫동안 방생했고, 채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갈수록 불보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나는 갈수록 방생에 대한 믿음도 감응이 없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이러한 이치를 물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망상과 집착이 많습니다. 분별. 집착이 많고, 병통의 습기가 무겁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만약 당신이 근본부터 닦고 심지로부터 시작하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원요범 거사의 사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요범사훈》과 《유정의공우조신기》, 그 속에 강설한 참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인광대사께서는 이 단락에서 일러주신다. 「높은 산은 오를 수 없다」. 여기서 「높은 산」은 부처를 비유한 것이다. 우리는 늘 부귀와 장수 등 세간법을 말한다. 출세간법으로 지혜와 덕행을 구하고 싶지만 「높은 산은 오를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어. 범부이니까. 사람은 어쩔 수 없어. 당신은 높은 산에 올라가라 하지만, 나는 기어 올라갈 수도 없다. 길이 없으니까.” 그래서 인광대사께서는 「벽을 뚫어 계단을 만드는 것도 괜찮다」 말씀하신다.
이는 현재 유행하는 무엇과 비교할 수 있나?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하는 야외 스포츠는 암벽등반이다. 암벽등반은 무엇인가? 길이 없다. 그럼 고난도에 도전해야 한다.
암벽등반을 하는 장비를 사용하여 몸에 로프를 묶는다. 그런 로프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보호작용이 있다. 그런 후에 또 하나의 운동기구를 사용해서 그것을 던져 올리고서 그 암벽에 잠근 이후 다시 로프를 당긴다. 이렇게 당겨서 올라가면 히말라야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수많은 사람이 이런 고난도의 준령에 도전해 고난을 극복하고 끝내 정상에 올랐다.
인광대사께서 「암벽을 뚫고 계단을 만드는 것도 괜찮다」 하신 말씀은 곧 암벽에서 올라갓 루 있는 한 곳을 잘라내고, 꼭 붙잡을 수 있는 한 곳을 만든 후 한 걸음 한 걸음씩 기어 올라가면 「높은 산의 정상까지도 또한 곧장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절정」은 곧 산의 정상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오를 수 있다. 해현 노화상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노화상께서는 글자를 전혀 몰라도 염불하여 명심견성하셨고, 염불하여 112세로 자재왕생하셨다. 또한 염불하여 인욕바라밀을 닦아 전기공이 그에게 침을 뱉자 “(그대 덕분에)얼굴을 씻었다.” 하셨고, 전기공이 그의 뺨을 때리자 “가려운 데를 긁었다.” 하셨다.
노화상께서는 아상도 없었고, 인상도 없었고,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다.
글자도 전혀 모르는 황야 속 암자의 한 노인이 수행하여 성불하였다. 그가 가는 때를 미리 알라고 왕생한 이후 전 세계 사람이 모두 알게 되었다. 「절정絶頂」은 곧 성불이다.
그는 마침내 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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