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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인도에서 성립되었지만 인도에서는 그 학문이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동아시아에서 크게 발달한 내용이 있습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종파가 성립되고 교학이 형성. 발달된 것입니다. 그것에 우선 유식불교학唯識佛敎學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화엄불교학華嚴佛敎學이 있습니다. 화엄학도 인도에는 없습니다. 『화엄경』은 인도에서 편찬되었지만 화엄학은 중국불교화엄학과 한국불교화엄학이 있습니다. 특히 신라의 화엄학은 중국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고 독특합니다. 그런데 고려 이후로 잘 전해지지 않다가, 요즘 다시 신라불교화엄학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엇습니다. 그리고 선불교도 인도의 선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마음 도리를 잘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 문명사나 사상사적으로 화엄학이나 선학이나 유식학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불교학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인연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심행心行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우주의 존재는 마음의 움직임뿐이다. 존재가 아니고 생각이다.' 라는 이야기를 벌써부터 해 왔는데, 세계 사상사적으로는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고정불변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있을뿐입니다. 옛날에는 우주의 근원이 불이냐, 물이냐, 빛이냐 등을 가지고 계속 골몰했는데, 요즘은 생각일 뿐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일찍이 '일체법이 오직 식識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존재가 아니라 생각임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예를 들어 찻잔을 보고 '이것이 물질적 존재이다. 이것은 찻잔이다.' 라고 생각이 머무는 곳이 심행처心行處입니다. 이것 자체는 있다고 정의할 수 없고, 없다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해결하는 것이 인생 문제의 해결입니다. 그 생각을 깨달아서 생각에 자재하는 것이 인생문제 해결입니다. 그래서 심행처가 중요합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느냐?' 하는 마음의 움직임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죽는다.' 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행복하다.' 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것이 유식무경唯識無境, 즉 오직 인식이 있을 뿐 경계는 없는 유식불교학입니다. 오직 인식이 있을 뿐이고, 경계 존재는 인식의 그림자입니다. 연못가에는 나뿐인데, 연못 안에 내가 또 보입니다. 그것은 나의 그림자입니다. 이것 또한 내가 찻잔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찻잔인 것도 아니고 찻잔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정의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화엄에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선禪에서는 정의할 수 없는데 자재自在를 합니다. 설명을 생략하고 정의할 수 없는데, 자유자재하는 것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유식무경이라는 유식에서는 식을 전5식前五識, 제6의식第六意識, 제7말라식第七末那識 그리고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의 8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전오식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다섯 가지에서 나오는 인식입니다. 이 전오식은 세상만 보는 것[觀世]입니다. 비. 설. 신 세 가지는 합해서 관세를 합니다. 즉 코와 혀와 몸은 합해서 부딪쳐야 합니다. 또 눈과 귀는 떨어져서 관세를 합니다. 합삼이이관진세合三離二觀塵世라, 세 가지는 합하고 둘은 떨어져서 티끌세상을 봅니다. 아무튼 이 다섯 가지는 순전히 밖으로만 보는 관세식觀世識입니다. 다음 제6식第六識은 동신발어독위최動身發語獨爲最라고, 항상 몸을 움직이는 식입니다. 말도 하게 하고, 보게도 하고, 기억하게도 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전부 제6식에서 담당합니다. 그 다음 제7식第七識은 아집식我執識입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행동한 것을 전부 나라고 집착합니다. 이것 때문에 자기가 경험한 것은 다 옳다고 믿습니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지만, 다른 사람은 여러 사람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를 생각하는 기준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기준이 다른 것이 아집입니다. 어디든지 가서 인연 따라서 자기를 집착하는데, 그 생각하는 기준응ㄴ 다 잘못된 것입니다[隨緣執我量爲非]. 왜냐하면 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8식第八識은 장식藏識으로, 자기가 들었던 것, 보았던 것, 행동했던 것, 경험했던 것을 전부 모아서 저장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 경험했던 것을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갈 때는 다른 것은 다 먼저 가 버리고 제팔 아뢰야식만 제일 늦게 갑니다. 그리고 어디 태어날 때는 그것이 제일 먼저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 집장식集藏識은 거후래선작주공去後來先作主公이라, 갈 때는 뒤에 가고 올 때는 먼저 와서 항상 주인공이 됩니다. 이것이 심행心行입니다. 이 세상에는 심행뿐입니다. 제행이 무상하니 모든 행이 심행뿐입니다. '저기 물이 흐른다.' 라고 할 때, 물이 흐르는 게 아니고 내가 물이 흐른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내가 늙는 게 아니라 내가 늙었다고 보는 것이고, 죽는 게 아니라 죽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심행대로 나타납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 그림을 그리는 대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화엄경』「여래출현품」에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이러이러하게 한량없이 나타난다[以如是如是 思惟分別 如是如是 無量頭現]." 고 했습니다. 존재하는 데서 생각하는 것은 미혹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것이지 있는 대로 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고[一切唯心造], 마음이 곧 법[心外無法]" 입니다. 일체가 오직 마음이요 마음 밖에는 존재가 없습니다. 1978년 6월에 운조홍법雲照弘法1930~1978큰스님께서 돌아가셔서 49재를 모셨습니다. 그때 49재 법문을 석암昔巖1911~1987 큰스님께서 하셨습니다. 석암 큰스님께서 법상에 올라가셔서 "홍법 스님! 홍법 스님!" 두 번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사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스님이 도의 스님한테 물었습니다. "사람은 왜 태어납니까?" "지금 네 묻는 마음에서 태어났다." "그러면 생사가 왜 있습니까?" "네 묻는 마음에서 생사가 일어난다." "생사가 어디서 옵니까?" "생사를 묻는 곳에서 일어난다." "생사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 묻는 생각에서 일어난다." 그 한 생각,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심행처입니다. 생사가 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증도가證道歌」의 "당처를 여의지 않고 담연하니 찾으려고 하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不離 當處常湛然 覓卽知君不可見]." 라는 게송을 읊고 법상에서 내려가셨습니다. 당처란 걸어다니면 걸어다니는 그곳이 당처이고, 밥을 먹으면 밥을 먹는 그곳이 당처입니다. 일상생활을 하면 일상생활을 하는 그곳이 바로 해당되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나 오나 당처를 여의지 않고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생사 없는 그 세계가, 보고 듣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당처는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려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생각, 심행뿐이라는 것입니다. '인류가 생각을 어떻게 깨닫고, 깨달은 뒤에 어떻게 사느냐.' 까지는 아직 모릅니다. 근대철학이 가장 발달된 곳이 유럽인데, 유럽철학이 거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미 그뿐만 아니라 '생각을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생각을 깨달은 분은 어떻게 살았느냐?'를 고민합니다. 불교도가 세계 문명사에 이바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능엄경』에 "청정해서 본래 그대로인데, 어찌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는가[淸淨本然 云何忽生山河大地]?"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 뒤를 읽어 보면 우리 생각으로부터 산하대지가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허망한 들뜬 마음이 쓸데없는 생각이 많다[虛妄浮心 多諸巧見]." 라고 했습니다. 산하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산하대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왜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하는 그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그 생각이 산하대지입니다. 생각을 떠나서 산하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불교입니다. '밉다.' 하면 미운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미운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있다,' 라는 것이 생각이 흘러가는 곳, 심행처입니다. 심행처가 있을 뿐이지, 불변의 존재가 고정적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 고정적 존재는 없는 세계가 무엇인가? 거기에 가는 방법도 모르고, 간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아직 모릅니다. 여기까지가 가사의세계可思議世界, 즉 생각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보고, 움직이고, 나라고 집착하고, 경험한 것을 전부 모아서 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중생이 생각할 수 있는 가사의세계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부사의세계不思議世界가 있습니다. 부사의세계는 심성心性의 세계인데, 심행처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심心을 물이라고 했을 때, 심행은 구름. 파도. 빗방울. 얼음 등으로 비유합니다. 빗방울에도 물이 있고, 구름에도 물이 있고, 얼음에도 물이 있고, 파도에도 물이 있지만, 심행처는 그 모양만 따라가기 때문에 물 자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은 빗방울 모양이나 구름 모양과는 상관없습니다. 물 자체는 보지 못하고 모양만 보는 것이 심행처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물은 빗방울이 아니지만 빗방울을 떠나 있는 게 아닙니다. 불리당처不離當處입니다. 그런데 그 떨어지는 방울방울 모양은 물과 상관이 없습니다.물 자체는 빗방울로 생각할 수 없고, 얼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구름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부사의세계입니다. 그러니까 빗방울이다, 구름이다, 얼음이다 하는 것은 가사의세계입니다. 깨달음은 부사의세계를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사의세계를 어떻게 가르치느냐? 신라 화엄에서는 증분證分과 교분敎分을 이야기합니다. 물의 세계를 바로 깨달은 자기 체험 세계를 증분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깨달은 증명된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때는 알리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교분이라고 합니다. 가르치려면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설명을 해야 합니다. 증분은 내가 깨달은 것이고, 교분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체 언어가 다 교분이고, 교분은 증분에서 나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것은 증분입니다. 부처님이 생사없는 해탈세계를 스스로 증명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그들도 깨치게 하려면 많은 교설敎說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교분입니다. 거기는 비유도 필요하고, 순서도 필요하고, 논리나 체계가 필요합니다. 화엄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하는 것은 다 교분입니다. 우리는 이 몸만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자기 생각이 완전한 것으로 집착합니다. 이것이 아집我執입니다. 그런데 신라 화엄에서는 어떻게 부사의세계를 설명하느냐? 내 몸이라는 것은 "온 허공법계가 나의 몸이요, 마음이다[虛空法界 爲身心]." 라고 했습니다. 이 몸이 형성된 것이 처음이 아니라 억만 년 전부터 원인이 있었습니다. 또 한두 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있음으로써 몸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몸이 사라지는 게 마지막이 아니라 이 몸 이후에도 억만 년 존재하게 됩니다. 이 몸 생길 때가 절대로 처음이 아니고, 이 몸 사라질 때가 절대로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집으로 나를 보면 몸이 생길 때가 처음이고, 몸이 사라질 때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아집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 '나라야 어찌되든 말든 나만 좋으면 된다.' 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아집입니다. 나라가 잘되는 게 우선이지 어느 지역에서 대통령이 나오느냐가 문제가 아닌데, 아집 때문에 지역패권을 쥐려고 애씁니다. 허공과 내 몸이 다른 것이 아닌데, 아집으로 보니까 이 몸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주좌와염상속行住坐臥念想續이라, 가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데 찰나찰나에 계속 이어집니다. 이 몸이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어제 것이 사라지고, 오늘 것이 사라지고, 내일 것이 사라지며 상속해서 존재합니다. 상속하는 존재이지 고정된 존재가 아닌데, 생각으로는 어릴 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집적 인식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 나였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내 안에 있을까? 사라졌을까? 어릴 때 모습이 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속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 살 때 모습이 사라지고 두 살 때 모습으로 이어지고, 두 살 때 모습이 사라지고 세 살 때 모습으로 이어져 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속입니다. 다른 것이 사라져서 이 몸이 되엇고, 다른 것이 또 생깁니다. 그래서 허공도 아니고 허공 아닌 것도 아니고, 끝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무진원통법無盡圓通法이라고 합니다. 다함이 없이 두루 통합니다.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함없이 끊임없이 다 통합니다. 무진원통법이 나입니다. 우리는 아집으로 인해서 무진원통법을 나라고 보지 못하고, 이 감각이 있는 몸만을 나라고 봅니다. 그런 심행이 있을 뿐이지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사의세계는 심행이고, 부사의세계는 무진원통법입니다. 이 세계를 화엄에서는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라고 합니다. 보인다고 불어나는 것이 아니고, 안 보인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생긴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안 생긴다고 다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장애법계를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무장애법계를 알고 무진원통법을 알면, 나고 죽는 생사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사없는 무진원통법, 생사없는 무장애법계 속에서 늘 죽고 사는 것을 걱정합니다. 이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전도몽상은 멀쩡한 땅에 머리 박고 고함지는 것입니다. 무장애법계는 모든 존재가 원융圓融한 법성法性이기 때문입니다. 법성이 원융하므로 하나의 티끌이 하나의 티끌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무진법계로 다 존재합니다. 미진이 시방이고 시방이 미진입니다. 이것이 원융이고 원통입니다. 불교가 이렇게 좋은데 이것을 또 세계에 알리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수명이 길어지면서 알게 되어 있습습니다. 2030년이 되면 130세까지 사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부분 탈이 나면 인공장기로 바꿔 끼우면 된답니다. 살다 살다가 이제 나는 그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면 갈아 끼우는 것을 멈추면 그만입니다. 출산을 조절했듯이 자기 생존을 자기 의지대로 조절하는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불교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학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앞으로 돈을 주면 우리 몸을 냉동시켜서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눈 속에 25일 동안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줄 알고 장례식을 치르려고 하는데 깨어났습니다. 어떻게 2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살 수 있었느냐? 냉동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면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가는데 200년이 걸려서 인류가 가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동면에 들어가서 가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200년 동안 동면해 있으면 몸은 20년 정도만 늙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신체기능이 덜 소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면한 1년이나 동면 아닌 10년이나 전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전부 가사의세계입니다. 부사의세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화성에 가도 한 생각이 그대로 남아 있고, 지구에 있어도 한 생각, 130년을 살아도 한 생각입니다. 130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130년이라는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이 역대 선지식의 세계입니다. 다들 살고 죽는 것을 걱정했는데, 그분들에게 살고 죽는 것은 꿈과 같은 것이고, 무장애법계 무진원통법 부사의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대로 생존을 연장하고 단축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 생각의 본질을 자기가 체험하기 전에는 영원히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생각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넘어선 것이 부사의세계이고 부사의세계에 들어가면 가사의세계와 부사의세계에 관계없이 무장애법계가 펼쳐집니다. 장애가 없어서 원통圓通입니다. 누가 만든 게 아니라 본래 그런 것인데, 생각의 세계에 묻혀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을 잘 닦아서 무장애법계에 들어가면 됩니다. 이것이 도에 드는 '입도入道' 입니다. 깨달음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닌데,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고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전깃불을 켤 때 스위치를 올리면 전기가 들어옵니다. 이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여기 전기가 와 있다고 믿어야 전기를 켭니다. 전기가 와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안 켭니다. 전기가 와 있는데 전기가 와 있지 않다고 믿고 켜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몸 자체가 무장애법계이고 우리 생각 자체가 무장애법계인데, 그것을 믿고 찾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전기가 오지 않아서 어둡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전기가 와 있다는 것을 못 믿고 켜지 않아서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이 가사의세계可思議世界입니까?" "아야, 아야!" "어떤 것이 부사의세계不思議世界입니까?" "아야, 아야!" "어떤 것이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입니까?" "아야, 아야!"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

첫댓글 생사 없는 그 세계가, 보고 듣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당처는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려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생각, 심행뿐이라는 것입니다...중략 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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