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영파를 닮아 있다.
영파부, 최부는 그곳에서 해적을 만나 목숨이 달아날 번 하였으니 좋은 추억은 없으련만 영파부는 글에 있듯이 고려까지만 해도 명주라고 하던 곳인데 '명'자가 명나라와 겹치다보니 영파로 개명을 한 것이고 지금은 또 닝보로 개명을 하였다. 물을 낀 홍문 사이로 거룻배가 다니고 장사를 하며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선한 느낌의 곳인데 지금의 닝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다. 상하이 때문 가려지긴 했지만 아니 지금도 상해 출신 부자들 절반은 모두 닝보출신들이라고 한다. 상하이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저장성 닝보시. 중국에서도 최초로 대외에 문호를 개방한 항구도시 중 하나다. 현재 닝보가 물동량 기준으로 중국 2위, 세계 4위를 차지하는 콘테이너 항구라 하면 믿을 텐가. 그동안 상하이에 치여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지만 수심이 깊어 30만t급 화물선이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천혜의 항구다. 경제 성장 둔화에도 계속 들락거리는 컨테이너선으로 인해 항만 근로자들은 24시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배후에 상하이와 항저우 등 대도시를 두고 있는데다 다른 항만으로 보내지는 환적화물로 쉴 샐 틈이 없는 것이다. 닝보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국 기업들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 요즘도 사업설명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다. 사실 닝보는 우리와 역사의 뿌리가 깊다.
고려시대 사신들은 닝보를 통해 당시 북송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북송은 고려에서 오는 사신들을 융숭하게 대접하고자 영빈관격인 고려사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 사관은 지금도 닝보시내 한복판에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송나라와 교류하던 고려 초기는 주로 황해도 연안의 웅진 항구에서 바다를 건너 산동성 등주나 밀주 등지로 상륙하는 항로를 이용했다. 그러다 고려 문종 28년(1074)에 사신 김양감이 거란을 피해 명주로 들어가고 싶다고 송나라에 요청하자 황제 신종이 이를 허락했다.
이후 명주는 송나라와 고려 무역의 중요한 항구로 떠올랐다. 고려사신은 통상 예성강에서 배를 출항해 명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송나라 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명주로 들어가 수도 변주(우리는 포청천 덕에 개봉이라 해야 잘 안다. 카이펑.)로 향하는 길에 금나라 군사들에 의해 차단을 당해 명주에서 머물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그것으로만 이름이 난 것이 아니다. 바로 최부가 헤매던 영파부 하산근처에 보타섬이라는 곳은 절강성 주산군도에 속하는 곳으로 주산군도 1300개나 되는 섬 중의 하나로 문수보살을 모신 산서성의 오대산, 보현보살을 모신 사천성의 아미산, 자장보살을 모신 안휘성의 구화산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4대 명산이다. 요즘은 상해와 묶어서 패키지로 불교신자들이 그곳을 드나드는 관광코스로 유명하다. 우리의 장보고는 신라시절의 청해진 대사이고 고대 해상왕으로서 오늘의 산동반도에 중국땅 연해 신라방의 주축을 이루는 적산법화원을 세운 인물로 유명한데 절강 주산군도 보타산에도 신라초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장보고는 필시 명주와 주산군도 쪽에서도 활동한 역사적 인물이었을 테다.
영파에 이를 무렵에는 백발노인에게 천태산하고 안탕산이 어디쯤이냐고 물었던 바로 그 천태산이 나온다. 이는 고려시대 불교를 알아 차려 물어 본 것은 아닐까 싶다. 고려 명승 의통(927~988)은 명주에 와서 불법을 전수하다가 그 시절 명주군 주사이고 고려와 친선관계를 가지고 있던 오월국 국왕 전숙의 아들인 전유치의 거듭된 만류로 귀국을 포기하고 명주에 남아 포교의 삶을 살아간다. 9
68년에 송나라 관리 고승휘는 의통에게 주택을 기증하여 살게 하는데 이 주택이 《전교원》이라는 사찰이고 의통은 이 사찰에서 주지로 활약한다. 982년에 송태종이 《보운선원》이란 편액을 하사하자 전교원은 보운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사찰의 유적지는 오늘의 녕파시 문물고고연구소에 의해 현재 녕파시 제1병원 서쪽의 거주지역으로 밝혀져 있다. 의통은 20년간이나 명주에서 불교의 천대종 교리를 펼치다가 988년 62살에 세상을 하직했다. 또한 고려 명승이며 대각국사인 의천은 한국 불교 천대종의 시조로서 송나라에 와서 14개월이나 있으면서 항주와 소흥 가까이 천태산 불교성지, 명주 등지에서 활동모습을 보인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부는 일절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가 이러한 사실을 몰라서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알지만 다만 말을 안 하는 것 일 텐데 열하일기에서도 보면 청나라 황제의 만수절에 참석한 사신들에게 건륭황제가 라마승을 만나라고 하는데 기겁을 한다. 결국 만나보기는 하지만 판첸라마가 준 불상은 가져오다가 묘향산에 놓고 정조대왕을 알현 한다. 조선에서는 불교를 언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파부를 지난 최부 일행은 2월 1일 자계현을 지나고 밤새 걸어 3일에는 상우현을 지나 4일 소흥부에 도착을 했다.
2월 4일 배를 저어 올라갔는데, 경호(鏡湖)의 한 지류로부터 흘러와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해가 뜰 무렵에 소흥부에 도착하였고, 성의 남쪽에서부터 감수를 거슬러 동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올라 창안포(昌安鋪)를 지나 노를 저어 성으로 들어갔다. 성은 수구에 해당하는 홍문이 있었는데 대개 4중으로 되어있고, 모두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10여 리 쯤에 관부가 있었는데, 천호 적용이 강기슭에 인도하였다. 소흥부는 영파부보다 큰 도시였다고 최부는 적고 있다.
<거리의 도로 또는 시정(市井)의 번성함과 사람·물자의 풍성함은 영파부보다 3배나 되는 듯 하였습니다. 총감비왜도지휘첨사(總督備倭都指揮僉事) 황종(黃宗),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 오문원(吳文元), 포정사분수우참의(布政司分守右參義) 진담(陳潭) 등이 징청당(澄淸堂) 북벽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무장한 병사, 태(笞)·장(杖)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중국 소흥지도
그런 지체의 위세에 놀랄 최부가 아니다. 오히려 잘되었다 싶었던 모양이다. 지난 번 진술을 다했는데 자기들한테 불리한 사항들 일부는 빼버리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덧붙여 하산에서 적을 만난 일과 선암리에서 곤장을 맞은 사실 그리고 가지고 온 행장에 말안장 한 개를 추가하여 기재했다. 그러자 세 사상(使相)은 곧 파총관으로 부터 보고된 공술서를 보여주면서 어째서 공술서의 전후가 상세하고 간략함이 서로 같지 않느냐고 하면서 공술서에 차이가 나면 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아 할 수없이 최부는 다시 베껴 썼다. 세 사상은 못 미더웠던지 항주의 진수태감(鎭守太監)·삼사대인(三司大人) ·도사(都司 : 도지휘사사)·안찰사· 포정사, 북경의 병부·예부에서 또한 재차 정황을 심문할 때 공술한 대로 대답하고, 조금이라도 서로 다르면 안 된다고 거듭 말을 했다. 그러면서 정말 조선인인지 확인 하는 작업을 그들은 다시 시작했다. 아마 북경에 오를 때까지 심문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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