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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저주받은 혁명가 - 카를 마르크스(2)
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중요한 저서를 집필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획하는 것조차 부라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본론> 조차도 일련의 에세이를 한데 이어붙인,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저서였다. 그렇지만 그는 어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담은 짤막하고 날카로운 글을 꽤 잘 썼다. 그의 시적 상상력이 그에게 속삭인 것처럼,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 직전에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거의 모든 대형 사건들을 이런 보편적 주장과 관련을 맺을 수 있었고, 그 덕에 그의 저널리즘은 놀랄 만한 일관성을 보였다. 1851년 8월, 초창기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언의 추종자로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고위 임원이 된 찰스 앤더슨 데이너가 그에게 유럽 정치 통신원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편당 1파운드의 원고료에 일주일에 2편의 기사를 쓰는 조건이었다. 마르크스는 이후 10년 동안 거의 500편의 기사를 기고했는데, 그중 약 125편은 엥겔스가 대신 쓴 것이었다. 뉴욕에서는 기사를 심하게 수정하고 고쳐 썼지만, 기사에 담긴 힘이 넘치는 주장은 순전히 마르크스의 것이었으며, 기사의 위력은 모두 거기에서 비롯됐다. 사실 그의 뛰어난 재능 중에서는 논쟁적인 저널리스트로서의 재능이 으뜸이었다. 그는 경구와 격언을 멋들어지게 활용했다. 그런데 그중 상당수는 그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마라는 “노동자에게는 국가가 없다”와 “프롤레타리아는 쇠사슬밖에 읽을 것이 없다”는 문구를 지어냈다. 부르주아지는 볼끼짝에 봉건적 문장(紋章)이 박힌 덧옷을 걸치고 있다는 유명한 농담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하이네가 한 말이었다. 루이 블랑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문구를 제공했다. 카를 샤퍼에게서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블랑키에게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문구를 얻었다. 그러나 마르크스 본인도 문장을 지어낼 능력은 있었다. “다른 나라가 행하는 정치적 행동을 독일인은 생각만 해 왔다.” 종교는 인간이 자신들 주위를 회전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 주위를 회전하는 허위의 태양일 뿐이다.” “부르주아지 결혼은 아내들의 공동체다.” “혁명의 대담성은 적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나는 전부가 돼야만 한다’는 도전적인 언사를 퍼부을 수 있다는 데 있다.” “각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 계급의 사상이다.” 더군다나 그는 남들이 한 말을 끄집어내 논쟁 중의 가장 적절한 단계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조합해서 사용하는 보기 드문 재주가 있었다.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세 문장을 능가하는 글을 그 어떤 정치적 작가도 써내지 못했다. “노동자는 쇠사슬밖에 잃ㅇ르 것이 없다. 그들에게는 획득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동안 잊힐 수도 있었던 마르크스의 철학 전체를 구해 낸 것은, 그 무엇보다도 짤막하고 박력 있는 문장을 써내는 마르크스의 저널리스트적인 관찰력이었다.
시는 비전을 제공했고, 저널리스트 특유의 격언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돋보이게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마르크스 저작이 밑바닥에 깔린 것은 학술적 전문 용어들이었다. 마르크는 학자였다. 아니, 나쁘게 말해 실패한 학자였다. 훗날 격분을 특징으로 하는 학파의 우두머리 자리에 오르게 될 마르크스는 새로운 철학 학파를 창시하는 것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싶어 했는데, 이것 역시 그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세운 작전이었다. 그 결과,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독일어 2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솔직히 선언한다.” 그리고 <자본론>에서 “가치 이론을 논할 때 헤겔의 용어들을 활용하며 희롱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변증법”이 헤겔의 변증법과 “정반대”라고 밝힌다. 헤겔이 보기에는 사고 과정이 현실 세계의 창조자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관념이 인간의 머릿속에 옮겨지고 해석될 때 그 관념은 물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는 “헤겔의 저작에서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다. 신비화의 포장 안에 감춰져 있는 이상적인 핵심을 발견해 내고 싶다면 여러분은 변증법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돌려 놓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방법이 안고 있는 치명적 약점을 찾아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발견을 통해 헤겔의 사상 체계 전체를 새로운 철학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서 학문적 명성을 구하려 들었다. 그의 새로운 철학은 기존의 모든 철학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최고급의 철학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헤겔의 변증법을 “인간의 지성을 향한 열쇠”라면서 계속 받아들였다. 그는 헤겔을 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헤겔의 포로로 남아 있었다. 변증법과 “모순”이 그가 10대 시절에 품었던 시적 비전인 세계적인 위기의 절정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년(1873년 1월 14일)에 쓴 것처럼, 경기 순환은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모순”을 보여 주며, “이들 순환 주기의 정점은 세계적인 위기”를 낳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신흥 독일제국의 졸부들”의 머릿속에도 “변증법을 심어 넣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현실 세계의 정치, 경제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르크스 철학의 뿌리가 시적 비전에 있었던 것처럼, 그 구체적인 전개는 난해한 학술적 용어를 갈고 닦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지성이라는 기계를 작동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도덕적 추진력이었다. 마르크스는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증오심에서 추진력을 찾았는데, 그 증오심은 (앞으로 보게 될) 마르크스 자신이 겪은 금전적 어려움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격정적인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에 대한 표현은 마르크스 최초의 진지한 서술인, 1844년에 <독일-프랑스 연보>에 게재된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라는 두 편의 에세이에서 발견된다. 헤겔의 추종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유대주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1843년에 헤겔 좌파의 반유대주의 지도자 브루노 바우어는 유대인에게 유대교를 완전히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에세이를 출판했다. 마르크스의 에세이는 그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바우어의 반유대주의는 반대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바우어와 생각을 같이하고, 바우어의 주장을 뒷받침했으며, 찬성한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바우어의 해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반사회적인 본성은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며, 유대인을 그들의 신앙에서 갈라놓는 것으로 그런 본성을 치유할 수 있다는 바우어의 믿음을 마르크스는 부인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유대인의 죄악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현실 세계의 유대인을 생각해 보자. 안식일만 지키는 유대인 말고….하루하루를 유대인으로 사는 유대인들을 말이다.” 그는 물었다. “유대교의 불경스러운 원칙은 무엇인가? 실제적인 욕구인 사리사욕이다. 유대인은 세속적으로 무엇을 숭배하는가? 상업이다. 그가 믿는 세속적인 신은 무엇인가? 돈이다.” 유대인들은 이 “실제적인” 종교를 사회에 지속적으로 퍼뜨려 왔다.
“돈은 이스라엘의 시기심 많은 신이다. 돈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돈은 인류가 모시는 모든 신의 품격을 떨어뜨리며, 그 신들을 상품으로 바꿔 놓는다. 돈은 만물의 자기 충족적인 가치이다. 그러므로 돈은 전체 세계, 인간계와 자연계 모두에게서 그들 나름의 정당한 가치를 빼앗는다. 돈은 인간의 노동력과 생존의 소외된 실재이다. 이 실재는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이 실재를 숭배한다. 유대인의 신은 세속화하여 세계의 신이 됐다.”
유대인은 기독교를 타락시켰으며 “이웃보다 더욱 부자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운명이 없다”는 것, 그리고 “세계는 주식 중개인 조합”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정치권력은 금권 권력의 “보증인”이 됐다. 따라서 해결책은 경제적인 것이다. “탐욕스러운 유대인”은 “현시대 보편적으로 퍼진 반 사회적 요소”가 됐고, “유대인을 무능하게 만들러면” 유대인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금전적 활동의 “바로 그 가능성”인 “전제 조건”을 폐지할 필요가 있었다. 돈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를 없애면 유대인과 유대교, 그들이 세계에 강요했던 기독교의 타락은 사라질 것이다. “상업과 돈에서 스스로 해방되고, 그에 따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유대교에서 스스로 해방되면 우리의 시대도 스스로 해방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학생들이 모인 카페에서 논의되는 반유대주의와 루소의 조합물이다. 이후 그는 1844년부터 1846년까지 3년 동안 자신의 이론을 성숙한 철학으로 확장시켰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사회의 사악한 요소, 그가 반감을 가졌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금권의 대리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부르주아지 계급 전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확장을 위해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세련되게 활용했다. 한쪽에는 금권과 부, 자본, 부르주아지 계급의 도구가 있었다. 다른 쪽에는 새로운 구원의 프롤레타리가 있었다. 학술적으로는 최악이라 할 독일철학의 전문용어들을 모조리 활용한 마르크스는 엄격한 헤겔적 관점에서 주장을 펼치지만, 기저에 깔린 추진력은 분명히 도덕적인 것이며 궁극적인 비전(묵시론적인 위기)은 여전히 시적이다. 결론은 혁명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혁명은 독일에서는 철학적인 혁명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계급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지 않은 계급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 간단히 말해 인간성의 총체적 손실은 인류의 총체적 구원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를 해체시키는 것은 특정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계급이 아닌 계급, 계급과 계급들의 용해제인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구원 세력이 되어 역사적 법칙에 구속받지 않으면서 종국에는 역사를 끝맺는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아주 기이할 정도로 유대적인 개념인 프롤레타리아는 메시아나 구원자가 된다. 혁명은 두 요소로 구성된다.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고, 해방의 심장은 프롤레타리아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엘리트와 장성을 형성하게 될 것이고, 노동자들은 보병이 될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부를 부르주아지 계급 전체로 확장된 유대인의 금권으로 규정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새로운 철학적 관념으로 규정한 마르크스는 이제 그의 철학의 정수를 향해, 세계를 거대한 파국으로 몰고갈 사건들을 향해 나아간다. 핵심 문단은 이렇게 끝난다.
“임노동이 다른 계급을 위해 부를 창출하고 자신들을 위해서는 곤궁만을 가져옴으로써 스스로 선고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는 사유 재산이 프롤레타리아를 낳음으로써 스스로 선고한 형벌을 집행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한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의 절대적인 권력이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그 자신과 적대자들의 해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와, 효력을 상실해 가는 적대자의 사유 재산은 사라진다.”
마르크스는 그가 시적 비전으로 처음 목격했던 격변을 정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정의는 독일의 학술 용어들로 행해졌다. 대학 강의실을 넘어선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정의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마르크스는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룰 때조차도 여전히 철학적 전문용어를 사용한다. “사회주의는 혁명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조직적 활동이 시작되고 영혼이라는 물(物) 자체가 출현하면, 사회주의는 모든 정치적 베일을 내던질 수 있다.” 마르크스는 진정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이 친필 편지에서 그랬던 것만큼이나 자주 단어들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의 강조 행위는 그가 뜻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가 뜻하는 바는 독일 강단 철학의 모호하기 그지없는 개념들 속에 침몰해 버린 상태로 남아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을 거듭 반복하여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묘사하는 과정의 세계적 특징을 강조하는 식으로 습관적인 허풍에 의지하지만, 학술적 전문 용어는 이런 작업을 하기에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웠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세계-역사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공산주의와 공산주의. 활동이 세계-역사적 존재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는 “경험적으로, 공산주의는 지배 계급의 통일된 동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행동은 생산력과 거기에 의존한 세계 교역의 보편적 발전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뜻하는 바가 뚜렷하더라도, 그의 주장이 필연적으로 타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도덕적 철학자의 의견에 불과하다. 위에서 인용한 몇몇 문장은 정반대의 의미로 바꿔 놓더라도 그럴듯하거나 아니면 그럴듯하지 않거나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철학자의 이런 예언적 발언과 폭로를 과학으로 탈바꿈시킬, 현실 세계에서 얻은 사실과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사실에 대해서도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인생의 수십 년 사실을 축적하면서 보냈는데, 그렇게 쌓인 사실은 공책 100권이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청서[영국 의회나 정부의 보고서]에 나오는 사실들이었다. 자신의 눈과 귀로 세계와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구제 불능의 책상물림이었다. 세상 어느 것도 그를 도서관과 공부에서 끌어낼 수 없었다. 빈곤과 착취에 대한 그의 관심은 1842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물네 살인 그는 지방 소작농들의 벌목 권한을 다룬 법률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쓰고 있었다. 엥겔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그에게 “나의 관심을 단순한 정치학에서 경제적 조건으로, 결국에는 사회주의로 돌려 놓은 것은 목재 강탈과 관련한 법률 연구, 그리고 모젤 지역 소작농에 대한 나의 연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소작농과 지주와 실제로 얘기를 나눳다는 증거, 그리고 해당 지역의 실태를 관찰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또 1844년에 주간 경제지 <전진>을 위해 실레지아 직공들의 곤궁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런데 그는 셀레지아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고, 직공과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직공과 얘기를 나누는 것은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이다. 마르크스는 평생 동안 재정과 산업에 대해 글을 썼지만,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이와 관련된 일을 한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한 명은 네덜란드에 사는 삼촌 리온 필립스였는데, 훗날 대기업 필립스 전기회사를 창립한 성공적인 사업가였다. 자본주의의 총체적 과정에 대한 필립스 삼촌의 관점은 박식했고, 마르크스가 그걸 탐구해 보려는 수고만 했었다면 그런 관점은 흥미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고급 재정과 관련한 기술적 문제에 대해 삼촌에게 딱 한 번 의견을 물었을 뿐이다. 그는 필립스를 네 번이나 찾아갔지만, 방문의 목적은 집안 재산과 관련한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다른 전문가는 엥겔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같이 방적공장에 가자는 엥겔스의 초청을 거절했다. 우리가 아는 한, ,마르크스는 일생을 통틀어 제분소, 공장, 광산이나 다른 작업장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런 경험을 했던 동료 혁명가, 즉 정치의식을 갖게된 노동자들을 향한 마르크스의 적개심이다. 1845년에 런던을 잠깐 방문했을 때 그런 사람들을 처음 만난 그는 독일인 노동자 교육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 대부분은 숙련 노동자, 시계 제조공, 인쇄 기술자, 제화공이었고, 모임의 지도자는 임업노동자였다. 독학을 한 그들은 자제심과 위엄이 있었고, 예의 발랐으며, 자유분방한 삶을 반대했고, 사회를 변혁시키고 싶어 했지만 목표 달성을 위한 현실적인 단계에 대해서는 온건한 입장을 보였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묵시론적 비전에 의견을 같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마르크스의 학술적 전문 용어들을 사용할 줄 몰랐다. 마르크스는 그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혁명의 병사들, 그 이상의 존재는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늘 자신과 비슷한 중산층 지식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했다. 그와 엥겔스가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설했을 때, 그리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했을 때,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을 요직에서 배제시키고, 규정에 정해진 프롤레타리아 자격으로만 위원회에 앉을 수 있게 대책을 강구했다. 그런 행동을 한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지식인의 속물근성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공장 환경을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들은 폭력을 반대하면서 온건하고 점진적인 발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필수적일 뿐 아니라 불가피하다고 주장한 묵시론적 혁명에 두드러지게 회의적이었다. 마르크스의 악의 찬 비난의 상당수는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가해졌다. 1846년 3월, 브뤼셀에서 있을 공산주의자 동맹 회의에 앞서, 마르크스는 빌헬름 바이틀링을 일종의 재판에 회부했다. 세탁부의 사생아로 아버지의 이름도 모르는 불쌍한 바이틀링은 재봉사의 도제로 일하면서 고된 노동과 독학을 통해 독일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모았다. 재판의 목적은 정강 정책의 “옳음”을 역설하고, 마르크스가 필수적이라 판단했던 철학적 훈련이 결여된 주제넘은 노동자들을 처단하려는 것이었다. 바이틀링을 향한 마르크스의 공격은 가혹했다. 바이틀링은 정강 정책도 없이 선동을 했기 때문에 유죄라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이런 짓은 “멍청한 젊은이들과 사도들만으로도 성공적인 결사체를 구축할 수 있는”미개한 러시아에서라면 아주 훌륭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독일처럼 개화된 나라에서는 우리의 정강 정책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소.” 또한 “구체적인 정강 정책과 명료한 과학적 사상 없이 노동자, 특히 독일 노동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공허하고 파렴치한 선동 게임을 즐기는 것에 불과하오. 그런 짓은 영감을 받은 사도들과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얼빠진 멍청이들을 만들어 내는 데 그칠 것이오.” 바이틀링은 자신은 연구의 결과로 만들어낸 정강정책을 배우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자신은 실제 노동자를 대변하고 있으며, 노동자가 겪는 고통과는 거리가 먼 이론가들의 견해를 따르지는 않겠다고 대꾸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이 발언 때문에 “격분한 마르크스가 주먹으로 너무나 과격하게 책상을 내리치는 바람에 램프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무지는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도 돕지 못했소.’ 마르크스가 미친 듯이 화를 내며 방 이곳저곳을 오가는 가운데 회의는 끝이 났다.
이것이 이후 마르크스가 적들에게 가한 비난에서 그대로 재현된 패턴이었다. 노동 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와, 노동과 임금의 현실적 문제에 대해 이론적인 혁명 대신 실제적 해법을 설교해서 상당수의 노동자 추종자를 확보한 지도자 모두가 비난의 대상이었다. 마르크스는 식자공으로 일했던 피에르 요지프 프루동, 농업 개혁가 헤르만 크리게, 정말로 중요한 최초의 독일 사회민주주의자이며 노동운동가 페르디난트 라살을 비난했다. 농업에 대해 특히 크리게가 정착했던 미국의 농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마르크스는 <크리게를 반대하는 성명서>에서 농민 각자에게 공유지 160에이커를 제공하자는 크리케의 제안을 비난했다. 마르크스는 농민을 끌어들이려면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지만, 일단 공산주의 사회가 형성되고 나면 토지는 공공의 소유물이 돼야만 한다고 말했다. 프루동은 교조주의의 반대자였다. 그는 “모든 (종교적) 선험적 교조주의를 폐지한 후에는, 타인의 마음에 또 다른 도그마를 심으려 하지 말자…..우리는 새로운 편협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썼다. 마르크스는 이런 노선을 증오했다. 1846년 6월에 슨 프루동이 “유치하고” 경제학과 철학에 대해 심히 “무지하며” 그 무엇보다 헤겔의 사상과 기법을 오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프루동 씨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는 관용구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라살의 경우는 마르크스의 가장 잔혹한 반유대주의와 인종적 멸시의 희생자가 됐다. 라살은 “이치그[룩셈부르크의 도시 이름] 남작”, “유대인 깜둥이”, “광택 나는 옷감과 싸구려 보석 아래 잘잘 흐르는 기름기를 감춘 유대인”이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1862년 7월 30일자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제 내게는 모든 것이 완벽해졌네. 머리 모양이나 머리카락을 볼 때, 그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합류한 깜둥이의 피를 물려받았어(적어도 어머니나 친할머니가 깜둥이 피가 섞이지 않았다면). 깜둥이의 핏줄을 바탕으로 유대인과 독일인이 이런 식으로 섞이면 기이한 잡종이 태어나게 돼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