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데 앞장섰던 친일파 송병준이
그 대가로 일본에 1억5000만엔을 요구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대학 동양문화연구소가 최근 펴낸
'미공개자료 조선총독부 관계자 녹음기록'에서 확인됐다.
기록은 조선총독부 전직 관리들의 증언이 녹음된 테이프를 정리한 것이다.
연구소는 이 녹음기록을 2000년부터 4년여에 걸쳐
자체 연구지 등에 게재해 왔다.
◇송병준의 매국=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가쓰라 다로(桂太郞)일본 총리에게
"넓은 땅과 이천수백만명의 인구를 모두 일본의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조금도 비싼 게 아니다"라며
1억5000만엔을 줄 것을 서너 차례 요구했다.
송병준은 합병 후에는
"합병 때 일본이 한국에 지급한 돈이 너무 적다"며
100만엔을 추가로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그 후 송병준은 총독부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계산=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소로 하얼빈역을 택한 것은
당시 하얼빈이 중국 주권이 미치지 않아
러시아에 신병이 인도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간도(間島) 일본 총영사관 경찰부장을 지낸 아이바 기요시(相場淸)는
"'이토 살해범은 국사범(國事犯)이고 국사범은 처형되지 않는다'는 것까지
계산한 끝에 하얼빈을 범행 장소로 택했다고 안중근이 증언했다"고 밝혔다.
◇김구 사살 명령=
함경북도 경찰부장 쓰쓰이 다케오(筒井竹雄)에 따르면
이봉창.윤봉길의 항일테러는 "원흉이 김구였다".
군과 외무성 등 모든 기관이 움직여 돈을 쏟아붓고 스파이 등을 썼으나
잡지 못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잡을 필요 없으니까 보는 즉시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윤치호 친일 변신=
윤치호에게 자숙할 것을 권고했다.
자숙하면 우리도 당신과 협력해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랬더니 그는 매우 흔쾌히 승낙했다.
아주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그 후 윤치호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
다양한 단체에도 스스로 머리를 내밀었다.
세상으로부터 다양한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은 매일신보 사장도 했다.
◇3.1 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새벽, 33명이 서명한 한 장의 독립선언서가 첩보망에 걸렸다.
그들을 찾고 있는데 명월관에서 전화가 왔다.
33명은 명월관이란 음식점에서 술을 놓고 글을 작성하고 있었다.
경무총감부가 33명을 차량에 태워 총감부로 수송하던 중
이들이 갑자기 차량 안에서 독립선언서를 종로 길거리에 뿌렸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조선 지주들 일본 국회 로비=
총독부의 식민정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약자의 편을 든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는
'농지령'을 저지하기 위해 당시 조선의 지주들이 대표를 뽑아
일본에 보내 방해활동을 했다.
농지령은 지주의 땅을 소작인에게 나눠주는 정책으로,
지주들이 일본 국회의 입법을 막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