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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이여 봉기하자
증언자: 박정열(남)
생년월일: 1960. 12. 10(당시 나이 20세)
직 업: 대학생(현재 기자)
조사일시: 1988. 12
개 요
5·18 이전부터 어용교수 퇴진과 병영집체 거부 등에 관한 유인물 제작과 팜플렛, 대자보 등을 작성하였다. 5·18 때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 23일부터는 도청에 들어가 궐기대회를 준비하고 대자보 작성 및 차량을 타고 다니며 홍보방송 등을 함.
학원민주화투쟁
1980년 5월 당시 나는 전남대학교 인문사회대 철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총학생회가 부활되고 나서 인사대 학생회 간부로 있었기 때문에 학원자율화 활동 방침에 따라 선배들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했다. 당시만 하여도 학생운동의 층이 얕았기 때문에 선배들이 할 일도 2학년인 학생회 임원이 떠맡다시피 하였다. 주로 어용교수 퇴진과 병영집체 거부 등에 관한 유인물 제작과 팜플렛, 대자보를 작성하느라 골몰하였다.
화염병 제작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리고 계엄이 확대실시되었다는 방송을 듣고서 나는 학교로 가지 않고 바로 시내로 나갔다. 충장로 4, 5가와 조흥은행 앞에서 투석전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 틈에 끼여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이 호응해 주길 바랐다. 오후 1시경 조흥은행 앞에서 시민들도 합세한 시위가 벌어졌다. 금남로 4가에서 군용트럭이 멈추어 서더니 군인들이 내려 시위대 쪽으로 참검하고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이에 상관하지 않고 돌을 던졌다. 나는 선두에 서서 구호를 외치며 물러서지 말자고 외친 뒤 계엄군과 20미터 거리로 접근하여 돌을 던졌다. 한참 동안 돌진해 나가다 뒤를 돌아보니 함께 시위하던 시민과 학생들은 저 뒤로 밀려갔고 나만 동떨어져 있었다.
충장로 3가로 재빨리 몸을 숨겨야만 했다. 공수부대원이 내가 주동인 줄 알고 충장로로 들어간 나를 쫓아왔다. 충장로는 이때 셔터를 내린 곳도 있었고 내리지 않은 곳도 있었다. 나는 순간 내리지 않은 곳으로 도망갔다. 그곳은 금은방이었 는데 7-8명의 계엄군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다이빙 캐치를 하듯 가게로 들어갔다 . 금은방 주인은 내가 쫓기는 것을 알자 셔터를 내렸다. 그러면서 뒷문으로 나가 라고 해서 뒷문으로 올라가니 지붕이 나왔다. 지붕으로 올라가 건물들을 뛰어 빠 져나간 곳은 현대극장 쪽이었다. 현대극장 앞에는 공수가 없었으나 시민들과 전 경이 대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상대 경영학과 2학년인 친구를 만났다. 함께 투석 전을 하다 현대극장 쪽에 있는 주유소로 가서 화염병을 만들자고 하였다. 전경들 과 싸움을 하는 중에 화염병이 모자랐다. 주유소 주인에게 석유 좀 달라고 하였 더니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사정을 해도 주지 않아 석유를 주지 않으면 불지르 겠다고 시민들과 다그쳤더니 휘발유통 세 개를 내놓았다. 주유소 맞은편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가서 박카스병과 음료수 병을 얻어 화염병을 만들었다. 시민들은 모두 400-500명 정도 모였으며 구호는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해제 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구속자 석방하라'등이었다. 전경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투석 을 계속하였다. 여기서 약 서너 시간 정도 치열하게 싸운 뒤 밀리고 흩어지는 바 람에 충장로 우체국으로 가게 되었다. 우체국에는 계엄군이 7-8명씩 서 있었다.
나는 의외로 태연한 척하며 그곳을 지나갔다. 공수부대원이 젊은 청년을 잡아 신 원을 확인하는 것을 보고 우체국에서 금남로로 나왔다. 시위대열도 보이지 않아 그날 저녁 일곱 시경 집으로 돌아왔다.
5월 19일은 부모님들께서 시내에 나가면 젊은이들은 계엄군에게 붙들려가 몰매 맞아 죽는다고 나가는 것을 엄하게 막았다. 그날은 죽은 듯 집에 있었다.
밤을 새우는 시위대
5월 20일 오후 동생들과 함께 7시경 집 밖으로 나왔다. 택시기사들이 금남로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양동에서 도청 쪽으로 걸어갔다. 금남로에서 차량행렬을 보고 나서 MBC 방송국 앞으로 갔더니 수만 명의 시민이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 었다. 공수부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노동청과 청산학원 앞 도청 길목을 막고 있 었다. 시민들은 그쪽에서 대인시장 쪽까지 운집해 있었고 투석전을 벌이며 서로 밀고 밀리고 있었다. 계엄군들은 장갑차를 시민들 틈으로 드르륵 밀고 나왔다.
아마 그때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었을 것이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터지고 서로 밀리는 동안 계엄군에게 쫓기게 되어 MBC 방송국 옆에 있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7-8명의 부상자가 내가 들어간 병원으로 들어왔다. 어떤 아저씨는 곤봉으 로 맞아 머리가 움푹 패져 있었다. 이것을 보고 흥분한 나는 다른 사람은 어떠냐 고 다그쳐 물었더니 중학생이 죽어 있다고 하였다. 보자고 하였더니 `시민들이 흥분할 테니 보여줄 수 없다'고 의사가 거부하였다. 나는 실제 보지 않았으나 병 원에서 나와 이 사실을 시민에게 알렸다. `계엄군이 시민을 죽였다, 지금 중학생 이 죽어 병원에 있다'고 외쳤다. 장갑차가 왔다갔다하는 중에 20-30명이 죽었다 는 말도 나돌고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대치중에 있던 시민들이 MBC 방 송국을 불태우자고 하였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광주시내의 상황은 알리지 않고 쇼나 보여주는 관제 어용방송을 불사르자고 덤벼들어 불을 질렀다.
나도 동생들과 함께 7-8개 정도의 화염병을 MBC 방송국 건물에 던졌으며 동생 들은 나무와 돌을 구해 와서 그것도 함께 던졌다. 계엄군에게 밀리는 상황에 MBC 옆으로 나 있는 막다른 골목으로 나와 동생이 뛰어들어갔다. 계엄군 서너 명이 쫓아와 `너희들 꼼짝 말고 서 있어'하고 소리치더니 총을 다른 곳으로 내밀었다 .
그 틈을 놓칠세라 담을 넘어 어느 한옥 집으로 뛰어내려갔다. 불이 켜 있지 않 은 집은 쥐죽은 듯 적막하기만 하였다. 그 집에서 슬며시 대문을 열고 다시 나와 MBC 방송국을 장악한 시민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새벽녘까지 그곳에서 MBC 방송국 건물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았고, 시위대가 도청을 향해 석유통에 불을 질 러 굴려 보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계엄군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도청으로 차 츰 철수해 들어갔다. 아마도 문화방송 앞에서 대인시장 쪽까지 운집한 무수한 시 민들의 시위와 투석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시민들은 흩어 질 줄 모르고 밤새워 계엄군을 몰아내고자 하는 분위기가 충천해 있었다.
온 시내가 불길에 휩싸여
노동청 앞에서는 7-8대의 크고 작은 버스와 지프차에 석유를 뿌려 도청 쪽을 향하여 밀어붙이는 시민도 있었다. 조선대, 전남대 의대 길목 쪽에서도 시민들이 기름통을 굴려 계엄군이 있는 도청 쪽을 향해 불길을 터뜨렸다. 계엄군들은 시민 들의 공격에도 끄덕하지 않고 도청 건물에 불을 밝힌 채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 다.
새벽 1-2시경쯤 시위대의 공격력이 차츰 드세어지는 것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 동생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어떻게 되었는지 염려되었으나 큰 걱정은 하지 않았 다. 이미 계엄군이 도청으로 철수한 뒤였기 때문이었다.
일부 시민들과 합세하여 서광주세무서로 갔다. 세무서에는 군인이 보초를 서 있지 않았다. 시민들이 `부당세금 징수하는 세무서를 불태우자. 세금을 징수하여 독재권력과 살인 공수부대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고 외쳤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시민들은 평소 적대감을 느끼고 있던 분풀이를 하듯 너도나 도 석유를 뿌려 성냥을 그어댔고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세무서 건물에 던졌다.
이런 경황에도 세무서 안에 있는 직원들을 나오라고 한 뒤 기물을 부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시민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처음엔 MBC 방송국 쪽에 있는 사람들만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굉장히 많이 모여들었다. 순식간 에 불길이 치솟아오르는 건물 안은 용광로처럼 불꽃이 튀겼다. 나도 이곳에서 몇 개의 화염병을 던졌다. 불길이 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시민들과 함께 노동청으 로 나왔다. 그곳이 그날 저녁 최고 격전지였다. 도청 쪽을 향하여 솜방망이를 던 졌고 차량 기름통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불을 질렀다. 며칠간의 싸움이 계속되 는 동안 무수한 시민이 계엄군에게 붙들려 맞고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본 시민들 은 죽어가는 형제자매의 낭자한 피를 보며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결의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시위대를 따라 공원으로 갔던 때는 21일 새벽, 해가 발신거리며 떠오르는 6시 경이었다. 시민들은 차를 타고 다니며 각목을 든 채 구호를 외쳤다. `계엄군은 물러가라', `광주시민을 죽이는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2.5톤의 트럭에 탄 20여 명이 각목을 들고 수건으로 가리고 차에 탔다. 그 차 안의 운전수는 화 정동 로터리 공단 입구로 차를 몰았다. 차에 탈 사람을 태우고 도청으로 간다고 했다. 가다가 차에 오르고자 한 사람은 차에 오르곤 하였다. 나는 배가 고파 아 세아극장 앞에서 내려 집으로 갔다. 9시가 조금 넘어 있었고 동생들도 집에 있었 다. 부모님이 나를 보더니 호되게 나무랐다. 지금이 어느때라고 함부로 나돌아다 니냐면서 떼죽음을 당하려고 그러냐고 엄중한 주의를 주었으며, 밖에 나가지 못 하게 철저히 규제하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 김영민이 찾아 왔어도 집에서 는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밖의 상황이 몹시 궁금하였다. 공수부대의 잔 학한 행위에 불길같이 타오르는 시민들의 행동은 어디까지 번졌는지 가장 궁금하 였다.
5월 23일 오전 10시경 도저히 이대로 집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서 식구들 모르게 집에서 빠져나와 도청으로 갔다. 학생들은 YWCA에서 모인다는 말 을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 입에 전해진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더니 학생들과 동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모여 있는 학생들은 거의가 광주시 내에 있는 대학교 재학생들이었다. 18일부터 전개된 시내의 상황과 시민들의 대 응방침, 하루하루 변화되는 양상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였고 긴장과 흥분된 어조 로 어떻게 해야 적극적인 항쟁의 대열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계획하였다.
현재 조직적으로 싸움을 지도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엇보다 학생 들간의 규합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나는 학우들에게 말하였다. 우선 학우들에게 연락하여 도청에 모이는 것이 급선무이니 연락되는 대로 YWCA에서 모이자고 서둘 렀다.
시민궐기대회
또한 광주시내의 상황을 알리고, 계엄군이 도청을 떠나고, 시민군들이 어떻게 싸울 것이며, 이제까지 잔학한 계엄군에게 희생된 시민들의 투쟁방식과 광주민중 항쟁의 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서로 이야기하는 궐기대회를 갖기로 했 다. 그 대회를 시민에게 알리는 작업을 홍보부가 맡았다. 홍보부는 투사회보를 작정하여 시민들의 투쟁을 알리던 들불야학 팀과 몇 명의 학생, 시민 그리고 노 동자들도 있었다. 대학생부의 홍보부 활동은 플래카드와 대자보를 작성하는 것이 었다. 나는 플래카드에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철폐하라, 피의 대가를 보상하 라, 살인마를 처단하라'는 문구를 빨간 페인트로 썼다. 그때 같은 학교에 다니 던 서대석, 한정만, 김광호, 손남승 친구들과 함께 대자보도 작성하였다.
지금까지의 시위전개 발단 내용 및 정치적 상황, 피해상황,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 또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자는 결의 및 죽은 영령들의 원수를 갚자, 개인재산을 일체 파손하지 말자, 공공시설을 파괴하지 말고 거리질 서를 깨끗이 정리하자는 등 시민들의 정치의식 고취 및 치안질서를 지킴으로써 자체내의 안녕을 기하는 유인물과 대자보 작성을 주로 했으며, 신문 초안도 작성 하였다.
5월 19일부터 나오기 시작한 민주시민회보에 광주시의 상황정리 및 행동강령이 정리되어 시민들에게 배포되었고, 5월 21일부터 투사회보로 개제되어 그날그날의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5월 23일까지 투사회보로 5호, 6호, 7호까지 나오다가 24일부터 민주시민회보로 8,9호가 나와 홍보사항으로서 궐기대회, 대학생 집결처 , 도청내의 진행상황을 외곽지역의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민주시민회보는 들 불야학을 이끄는 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같은 대학에 다니던 박효 선, 김태종, 박용준과도 함께 만들었다.
대학부의 홍보부팀은 오후 2시경 남도예술회관으로 가서 홍보담당대표를 맡은 내가 `대학생 집결소'라고 빨간 글씨로 써놓았다. 여기서 대학생연합회를 발족하 였다. 그곳에 모인 70-80명의 학생들에게 대학생의 조직화와 소대를 편성하여 부 서를 나누고 임무활동 계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결의로 연설을 하였다.
홍보부 대학팀은 각 동별로 대자보, 유인물, 플래카드를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 였다. 저녁에는 밤을 새워 다음날 활동계획을 토론하였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대 중이 결집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24일 홍보부에서는 시민궐기대회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책임졌기 때문에 시민에 게 알리는 작업에 주력했다. 학생 팀은 전남대 스쿨버스로 가두방송을 하고 다녔 다. 처음에는 몇 명 타지 않았던 버스에 도청에서 벗어나 광주시내로 나아가면서 20-30명이 오르내리며 도청의 상황을 듣고 다녔다. 스피커장치는 상태가 좋지 못 하여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올바른 홍보가 되지 않겠다고 생 각하고 전남대로 들어갔다. 학생회 지하실로 가서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영선기 를 빼내어 왔다. 영선기에 스피커를 작동시키니 훨씬 성능이 좋았다. 가두방송을 할 때는 주로 전두환이 항복할 때까지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는 내용을 주 로 했다. 또 시민들에게 공공시설을 파괴하지 말고 피해상황을 목격하면 도청 상 황실에 알려줄 것을 호소하고, 가까운 친인척을 수시로 확인하여 보자는 선전을 하며 온종일 시내 전역으로 돌아다녔다. 또한 같은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으며 플 래카드에 `민중들이여 봉기하자!'고 빨간 글씨로 써서 차에 달고 다녔다.
저녁에는 도청에서 총을 받기 위해서 주민등록증을 확인받았다. 도청에 있는 상황실장이 총기류 소지를 규제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M1 한 자루와 실탄 8발을 받았으며,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친구 김광호와 함께 노동청 맞은편에 있는 향군 회관에서 보초를 섰다. 밤을 새운 후 도청에 총을 반납하였다.
계엄군의 시내진입
26일 아침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 YMCA 건물 안에 있었는데 화정동 경 계선으로 계엄군이 돌진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날 시 민궐기대회를 12시에 개최하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나니 갑자기 상황이 급 박해 짐을 느꼈다. 궐기대회는 홍보부 주관이었으므로 상황이 급박해지자 9시로 앞당겨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우선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새벽 6시경 3명이 지프차 에 올랐다. 시청 직원에게 민방위 방송차량인 포니차에 스피커 4개가 있어 그것 을 달라고 하였더니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함께 간 2명이 총을 들이대고 `지 금 광주에 계엄군이 들어와 쑥밭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판인데 차를 내주지 않 으면 잡아 가둬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시청 직원이 기겁을 하여 차량 열쇠를 주며 민방위 방송차를 가져가라고 하여 그 차를 가져왔다.
그 차를 타고 다니며 `계엄군이 화정동 로터리로 진입해 오고 있으니 시민들은 9시까지 도청으로 모여달라'고 홍보방송을 외치고 다녔다.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시민들과 함께 싸워야만 최후까지 광주를 지킬 수 있다는 강박감이 생겨 무척 흥 분한 상태에서 방송을 하였다. 8시경 내가 살고 있는 양동으로 갔더니 어머니와 가족들이 중앙여고 앞에서 차를 가로 막고 다짜고짜 나를 끌어내리며 죽으려고 환장했냐며 욕을 했다. 지금이 어느땐데 돌아다니냐면서 나를 집에 가뒀다. 방문 을 밖에서 잠가버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26일 시민궐기대회의 사회를 보기 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나갈 수가 없어 안절부절 못하고 나갈 궁리를 하 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5월 27일 계엄군의 광주진압 소식을 듣고 나중에 잡히면 큰일이라 여기며 오치 너머에 살고 계시는 이모집에 있기로 하였다. 염주동에 있는 외가와 발산동에 사 는 누님집을 왔다갔다하면서 시내상황을 전해 들었다. 나중에 가두방송을 함께 했던 운전기사 김상집 씨가 잡혀 고문을 당하며 가두방송을 함께 했던 사람을 대 라고 문초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모른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복 학
1981년 학교에 복학했다. 7월부터 시위를 통해 5·18 진상에 관한 내용을 발표 하자는 계획을 친구들과 의논하여 2학기 개학하자마자 싸움을 하기로 하였다. 당 시만 해도 전면적인 학원탄압시기였고 1980년 이후 전두환 정권의 민주주의 말살 정책으로 인해 학원내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고 집회나 시위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왜곡보도로 인해 생긴 시민들의 불만과 저항 을 알리고 전두환 정권의 광주시민 탄압과 미국의 배후조종을 알리는 것이 학생 들의 양심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2학기부터 싸우기로 했으나 방학에 들어갈 무렵인 7월초에 학내시위를 하였다.
극소수의 모임에 불과했지만 이때부터 군부세력에 대한 시민과 학생의 의지를 관 철시키려는 시도에 의의가 있었다. 학내시위가 끝난 뒤 친구 정병규가 경찰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에 못 이겨 나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하여 7월 11일 연행되어 8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 풀려났다.
그 이후에도 1986년 3월 30일 신민당의 개헌현판식에 참석하여 행사를 모두 끝 내고 학우들과 일반 시민이 합세하여 시위를 했다. 당시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해 논란이 되었는데 군사독재정권의 정권수호를 위해 전두환 일당은 간접선거 개헌 을 하려던 때였다. 이에 분개한 학생들은 직접선거를 통한 개헌을 요구하는 내용 의 유인물을 작성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제5공화국 전두환 군사정권이 간선제 개헌을 하려고 하는 것은 군부독재를 온존시키고 노동자.농민의 생활을 옭아죄려 는 술수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 그때 다시 경찰에 연행되 어 징역 1년을 살고 집행유예 2년으로 석방되었다.
끝나지 않은 투쟁
1987년 8월에 코스모스 졸업을 하였다. 학교를 나와 사회활동을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다 평소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 일월서 각 편집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객지생활이 의외로 어려워 1년도 채 못 돼 직장을 그만두고 광주로 왔다. 1988년 6월에 산업경제신문사 산업부 기자 로 들어가 시청이나 금융기관의 경제동향에 관한 경제뉴스를 전담하였다. 그리고 민족문학작가 회의에 가입하여 광주, 전남 지역의 문인들이 민족문학작품을 쓸 수 있는 역사적 인식의 토대와 민중생활 정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사와 체험담을 비롯하여 생활풍습 및 대중의 의식과 가치관의 변화 에 중점을 두고 소설을 쓰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체험한 후 민중을 억압하는 군부독재와 미국의 처 신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생활과 관련해 우리들이 해야 할 민족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올바른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 보 았지만 여전히 군부독재의 보이지 않는 권력은 종횡무진 뻗어나가고 있다. 이에 한 치의 두리번거림 없이 민중의 생활 저변에까지 뿌리박힌 민주주의 수호에 주 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양홍진)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