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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다보탑' 유사품이 세워진 이유
도쿄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부근에
`일한합방기념탑'이라는 것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한 건축잡지(<조선과 건축>, 1934.10, 46쪽)에 실려있다. 그 탑이 세워진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일한 합방이 이뤄진 지 25주년이 지나는 때, 내선융화는 동양평화의 초석을 놓았는데 지금까지 일한 합방을 기념하는
시설이 하나도 없는 것은 유감이다.
도우야마 미쓰루(頭山滿), 우치다 료우헤이(內田良平),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제씨가 각 방면의
찬성을 얻어 1934년 합방 25주년을 맞는 때 합방을 기념하는 `일한합방기념탑'을 건설하게 되었다.
기념탑은 메이지 신궁 오모데산도(表參道) 진구바시(神宮橋) 앞 약 80평의 땅에 건설된다. 지진제(地鎭祭)는 9월 17일 집행, 11월 3일 메이지절(明治節)에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공사비는 10만원이다. 높이 30자의 장미(壯美)한 것으로 탑 가운데는 이토(伊藤), 산현(山縣), 가쓰라(桂) 공 등 초기 일선(日鮮)의 제씨 4백여 명을 새겨 오래도록 그 공로를 칭찬하게 할 예정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의 이 기록에 관심을 갖고 그 현장을
찾아 나섰다.
먼저 메이지 신궁 앞 하라주쿠(原宿)역에서 지하철을 버렸다. 하라주쿠는 패션과 유행의 거리라고 한다. 메이지
거리(明治通)가 그 메인 스트리트이다. 일요일 오후 이 거리에는 `다케노코 족(竹의 子族)'이라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떠들썩하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춤추고 노래한다. 구경꾼들보다 그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또하나 다케시타 거리(竹下通)는 싸고 작은 가게가 많아 발 디딜 틈도 없다.
머리에 노랑 물들인 젊은이가 흘러 넘친다. 10대의 거리답다. 탑이 세워져 있던 오모테산도(表參道) 거리는 지금 일본의 샹제리제라고 불릴 정도가
되어 있다. 한 1km가 되는 이 거리를 게야키(느티나무)라는 가로수(나미키, 竝木)가 늘어서 있다. 참으로 부러운 거리였다.
이 거리
초입 진구바시 부근에 한일합방기념탑이 걸맞지 않게 한동안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탑은 그 자리에 없다.
낭인들의 침략 미화
그후 몇 년 지나 도쿄의 한 헌 책방에서 우연히 `일한합방 기념탑사진첩'이란 책을 보게 되었다. 흑룡회(黑龍會)에서 1934년 출판한 것이었다. 65년 전의 것이다.
그 탑을 세운 사람들이 흑룡회 멤버들이었는데, 당시
흑룡회라는 것은 일본 극우파 단체로서 주로 낭인(浪人)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낭인들이 메이지 시대를 맞으며 우리 나라에 흘러들어 왔다.
그들이 뒤에서 획책한 전쟁이 바로 청일·러일전쟁이었다.
후쿠오카는 대륙침략정책주의자, 즉 대한 침략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배태된 곳인데 그중
도우야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와 우치다 료우헤이(內田良平, 1874-1937)가 대표적이었다. 도우야마는 현양사(玄洋社),
우치다는 흑룡회의 우두머리였다.
우치다는 1894년 동학란을 부채질하기 위해
천우협(天佑俠)이란 단체를 먼저 만들고 조선에 침투했다. 천우협은 1901년 흑룡회로 변신한다. 흑룡회는 한일합방의 첨병이 되어 일진회와
친일파들을 선동한다(한상일, 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 까치, 1980). 그 침략주의자들을 지금 일본에서는 국가주의자라고 미화해 부른다.
낭인조직은 남자들로 이뤄졌는데 그들은 원래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들이었고 메이지 시대에는 무직자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살 길을 대한침략에서 찾았던 것이다.
최근 대실업 시대를 맞는
일본에서는 `낭인정신'이란 말이 다시 돌고 있다. 에도 시대 사무라이가 직업을 잃고 무직자가 되어 새로운 직업을 찾아 나섰던 정신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프론티어 정신'이란 말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면 흑룡회는 뭐가 그리 기뻐 이런 책까지 만들었을까. 책을 다시 뒤져보자.
책은 앨범 형태로 만들어진 70쪽 분량인데 그중 약 30쪽은 준공된 탑, 현장 사진, 그 외 공사 관련 사진 등으로 채워져 있고, 후반
40쪽 가량은 `일한합방기념탑 건설에 대하여' 등 설립 과정에 관한 내용이 붙어 있다. 여기에 친일파의 이름이 깨알같이 적혀 있는
것이다.
이 탑에 대한 내용은 이미 우리 나라에도 알려져 있다. 서지학자 이종학 씨가 이 비에 각인되어 있는 친일파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고(한국일보, 1986.7.22), <순국> 잡지(1990.7-8)에 그 내용이, 이어 <아리랑>(1994.9)에서는 그
탑의 현재 상태를 알린 바 있다.
메이지 천황의 위업(?)
여기서는 탑의 내용, 그 뒤처리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치다(內田良平)가 쓴 한일합방기념탑 건설 취지를 보면, 한일합방 25년 후 메이지 천황의 위업을 기리는 것이 그 설립의
주목적이라 하고 있다. 우치다는 이어,
“그 대업을 기념할 물건이 하나도 없음을 안타까워하여 영세불망탑(永世不忘塔)을 세우게 된 것이다."
고 하고 있다. 그는 이어 친일파 “이용구(李容九, 1868-1912) 서거 23주기, 송병준(宋秉畯, 1858-1925) 서거 10주기를 맞아 이 탑을 세운다"고 덧붙이고 있다.
일제는 한일합방을 메이지 천황의 대업이라 하며 그
기념탑을 그가 죽어 만들어진 메이지 신궁 바로 앞에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여러 후보지가 들먹여졌다. 그 후보지들은 시바
이궁(芝離宮)과 메이지 신궁 외원(外苑), 그리고 요쓰야(四谷見附) 외원과 도쿄시 소속의 아자부(麻布) 공원 등이었다.
그러나 일본 궁내성(宮內省)은 메이지 신궁 앞
오모데도리 진구바시 우측 공지(空地)로 결정됐다. 현재 요요기 공원(代代木公園) 부근, JR 하라주쿠 역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이 일에는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가 앞장섰다. 그는 조선 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자였다.
이에 한국에서 떼돈을 번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스미토모(住友) 등 소위 재벌 3가(家)와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榮一), 야스다(安田), 제일은행 등이 찬조금을 냈다. 이토의
묘지인 곡수묘지(谷垂墓地)의 나무 두 그루를 옮겨심기도 했다. 당시 우가키 조선총독이 이 탑을 세우는 것을 유일하게 반대했는데 이것은 또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괜히 탑을 세워 조선인들의 신경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보탑을 복사한 것
원래 이 탑의 계획은 1934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기초공사 설계는 산리상행(山里尙行)이 맡았다.
탑은 계획 부지 80평보다 약간 적은 76평에 1934년 9월 17일 지진제를 지내며
시작되었다. 높이는 32자 즉, 10미터 정도로 3층 높이 정도 된다. 탑의 모양은 우리 불국사의 다보탑(多寶塔)을 그대로 본떠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 탑의 상징을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다보탑의 실측 도면도 갖고 있었다.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의 자료가 그것이었다.
기념탑은 대지가 약간 경사졌으므로 이에 맞추기 위해
기단을 하나 더 만들어 수평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보탑 그대로 만들어 세우기로 했다. 그 전체 부지가 도로에 면하는 길이는 30미터
정도였다.
기념비는 장전조(長田組)에서 토목공사를, 석공사는 석승조(石勝組)에서 각각 맡아했다.
다보탑을 만든 돌은 6천관(貫)이
들었다 하는데 이 화강석은 이바라키현(자성현, 茨城縣) 진벽군(眞壁郡) 화수촌(樺穗村) 가파산(加波山)에서 캐낸 것이었다. 이 돌을
도전촌(稻田村) 가공장에서 다듬었다.
지반은 콘크리트 타설을 하고 철근으로 탑의 축을 잡았다.
그리고 옮겨온 돌을 붙이는 형태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우리 탑 쌓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탑은 예정일보다 며칠 늦어졌다. 메이지절에
탑이 준공되지 못해 안달을 했으나 공사는 늦어져 11월 29일 제막되었던 것이다.
탑이 준공될 때 한국인 세 사람이 이곳에 나타난다.
초청자 8백 명 속에 든 것이다. 그들은 합방찬성 유지대표 이해천(李海天)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아들로 시천교(侍天敎) 대표였던
이현규(李顯奎), 그리고 일진회 평의장 유학주(兪鶴柱)의 아들 유동(兪丞) 등이었다.
쌍끌이 된 오적
이 합방기념탑 뒤에는 따로 부비(副碑)를 세웠다. 여기에는
한일합방 공로자들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약 423명의 이름이었다. 이중 일본인은 60명뿐이고 나머지 363명은 한국인이었다. 합방을 한국인이 더
원했다는 것이다.
그 명단에 친일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완용과 5적의 이름이 빠져 있다. 한일합방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그 무리들의
이름이 빠진 이유를 우치다는 따로 친절하게 부기(附記)까지 하고 있다.
`나열된 이름 중 일한 합방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현직당국(顯職當局)을 새기지 아니한 것은 대의를 바로 하기 위함이다.
일진회의 합방청원이 있자... 그들 당국은 처음에는 극력 반대했다.
그러나 데라우치 새 통감의 부임으로 별안간 조약에 조인했다. 그런데 이는 만약 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일진회에게 그 일을 잇게 하려는
통감의 결의를 알고, 정적에게 공로를 뺏길까 두려워해서였던 것이다.
이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판 것으로 동양 도덕의 근본인 신하의
도리를 버린 것이다.... 고로 삭제하기에 이른 것이다.'
합방을 확실하게 밀어준 이용구, 송병준은 고마웠으나 이완용 등 오적은 오히려 괘씸했다는 말이 된다. 이를 보면 이완용 등은 그 목적이 이뤄진 후 일본인에게서도 용도 폐기되었던 것이다. 목적을 채우는 데는 언제나 집요한 그들의 속성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쌍끌이'된 꼴이다.
이 탑이 세워진 후 그들은 이것도 모자라 다시
`일한선각지사비(日韓先覺志士碑)'라는 것을 세우기로 한다. 한일합방에 공로 많은 자들을 위한 비가 그 하나로는 모자란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후 사이토와 우치다가 차례로 죽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리며 미수에 끝났다.
잔해는 두 군데 나눠져 보관
이 오모데산도 거리 초입의 이 탑은 1934년에서
1975년경까지 존재했다. 다시 말해 해방 이후에도 계속 그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렸을 때 이 탑은 우리에게
처음 알려졌다. 올림픽이 마침 가까운 요요기 공원 일대에서 열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대표단 관계자 그리고 일부 관광객이 그곳에 가게 되었다.
그후 이 탑은 쓸데없는 화가 된다하여 일본 정부는 이를 우선 철거하여 다른 곳에 보관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그 탑의 원 땅 주인도 애매하다. 탑을 세우는
데 앞장섰던 우치다의 것이라는 설과 원 주인이 나타나 토지 소유권 주장을 주장해 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외 도시개발 계획에 맞물려 헐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기록에는 물론 일본 정부가 개인으로부터 산 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를 잠시 철거한 이유는 골치
아프다는 것이 주 이유였다. 언젠가는 다시 세우겠다는 뜻도 있었다.
탑은 1975년 경 일단 헐어 내린 후 각각 오메 시(靑梅市)에 있는
일본 우익단체의 신사인 대동신사(大東神社)와 이바라키현 진벽정(眞壁町)에 있는 사노이에(자야가, 滋野家)로 옮겨졌다.
대동신사는 대동농장 경내에 있다. 대동신사에는 탑
중의 `일한합방기념탑'이라고 쓴 탑신(塔身) 일부와 돌사자 2점이 있다. 몸체 외에 친일파 명단이 새겨진 동판도 그곳에 있다.
탑
상륜(相輪)과 탑신 상부는 이바라키현에 있는 사노이에(자야가, 滋野家) 석재사에 잘 보관되어 있다. 이 사노이에 석재사는 바로 당시에 탑을
제작했던 석승사 후신으로 지금은 당시 제작자의 후손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대동신사에 대한 의문이
있다.
한입합방을 앞장서 획책한 일진회의 이용구는 우치다와 한 패거리였다. 이용구는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으로 갔다. 그러나 1년을 더
못살고 1911년 도쿄에서 죽었다. 이용구는 아들을 둘 두었는데 이현규(李顯奎)와 이석규(李碩奎)가 그들이다.
둘째 아들 이석규가 대동국남(大東國男)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창씨개명했다. `오오 히가시 구니 오'라고 읽는다. 강제적 창씨개명 이전에 지은 것이었다. 대동국남은 `대동아 나라의 남자'라는
뜻이다. 친일파의 이름답다. 대동국남은 1986년에 죽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 이용구의 전기인 `이용구의 생애'라는 책을 펴낸 적도 있다.
도쿄의 지지 통신(時事通信社)의 `시사신서(時事新書)'로 1970년 출판됐다.
그런데 지금 비의 일부가 대동신사에 있는 것이다.
대동신사와 이용구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궁금증이 더해 간다.
어쨌든 이 탑의 세워지고 뜯김이 한 . 일의 한 시대사를 말해 주고 있다.
이제 분명히 각각의 돌로 분해되어 남아 있지만 그것은 그대로 역사를 후세에 전해 주어야 하는 현장실물인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