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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 |
러시아 정교회(러시아어: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는 기독교 교파이다.
러시아 정교회도 여러 종파가 있으며 대표적인 종파가 시노드파, 몰로칸교이다.
전설에 따르면,
러시아에 최초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한 사람은
성 안드레아였다고 한다.
케사리아의 주교 에프세비오(또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성 안드레아는
기원 후 1세기 경
예루살렘에서 북동쪽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
흑해 주변의 시노페와 코르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 안드레아가 방문하여 선교한 지역은
훗날 키예프와 노브그라드라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나온 성직자들의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초기 러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대공은 어느 종교를 믿을지를 자국의 신하들와 논의한 끝에
러시아인들의 기질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동방정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훗날 교회로부터 시성되어
최초의 러시아인 성인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뛰어난 고도의 문명을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예식서, 교부들의 저작 등을 슬라브어로 읽을 수 있었으며,
이것들을 토대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들이 사용한 슬라브어는
모라비아 지역에 파견되었던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 형제의
키릴문자 발명으로 고안되었던 것으로
러시아의 기독교 개종은 이 키릴 문자로 된 슬라브어로 보다 확고하고 영구하게 확립시켰다.
따라서 교회예전들은 민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슬라브어로 진행되었다.
1015년 블라디미르의 죽음은 곧 내란으로 이어졌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중 스비야토폴크는
자신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대공국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 와중에 동생들인 보리스와 글레브가 희생되었다.
그들은 충분히 형에 맞서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에 대해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목숨을 희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형제들을 죽이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고자 했던
스비야토폴크 역시
1019년에 또다른 형제인 야로슬라브 공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야로슬라브 공은 현자로 불리었으며
블라디미르에 이어 러시아를 기독교화 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1037년 야로슬라브 공은
키예프에 성 소피아 대성당 건립 공사를 명령하였고,
그리스인 대주교 테오펨프스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임명받아
키예프에 착좌하게 됨으로써
교회 행정적으로 키예프의 성 소피아 대성당은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1세기 말 경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되어
1051년에는 러시아인 주교 일라리온이 키예프의 관구장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주교들은 그리스인이었으며
모든 주교직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임명되었다.
따라서 키예프의 관구장주교는
러시아의 다른 교구의 주교들을 승인할 권리를 갖고 있기는 했으나,
모든 교구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하였으며
관구장주교로서의 실제적인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이 동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이므로
모스크바 대공 역시 동로마 황제의 후계자를 자처하여
동방정교회의 유일한 지배자로 등극하였다.
이어 1472년
이반 3세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소피아 팔라이올로기아와 결혼하고,
쌍두 독수리를 문장으로 삼아
동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황제(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구심점을 잃은 동방정교회를 사수하라는 하느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어
제3의 로마라는 믿음의 기원이 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모스크바 관구장주교의 지위를 총대주교로 격상시켰다.
자신들의 총대주교에 의해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기를 염원했던 러시아인들은
이에 모두들 환호를 하였다.
158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예레미아스 2세의 동의 아래
러시아에 총대주교좌가 신설되어
모스크바의 관구장주교는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로 승격되었다.
1593년에는 4명의 고대교회 총대주교들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회합하여
모스크바 교구에게 교회 서열상 5번째의 총대주교좌를 부여함으로써
승인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17세기 중반 알렉세이 로마노프가
아버지 미하일 로마노프를 이어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스테판 보니파티예프 대주교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의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개혁파의 운동에 전적으로 동의하였고,
러시아 전역은 일대 정신적 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나 1653년
황제가 비호한 니콘이 총대주교로 선출되자 분란이 일어났다.
신임 총대주교는 1653년 십자성호를 긋는 방식
(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 것)을 포함한
교회 예전(Ritual)을 그리스교회식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수적인 러시아 그리스도인들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많은 이들이 그리스식의 예전을 거부하며 그와 논쟁을 벌였다.
그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예전을 점차 변화시켜 왔으나
러시아 정교회는 아직도 10세기 개종 당시의 전수받았던 예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이같은 정책에 반대,
러시아 교회의 전통은 동방교회의 다른 교파들의 전통보다 훨씬 우월하므로
절대 바뀌어선 안된다고 하였다.
이로써 1656년
러시아 정교회는 두 종파로 분열되었으며
전통을 고수하는 구파 정교회신도들이 박해받기 시작했다.
이때 분열된 구파 신도들은 다시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재성직자파(在聖職者派=Поповцы)로
이들은 성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1846년부터 자신들의 주교도 갖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부재성직자파(不在聖職者派=Безпоповцы)로
이들은 성직자를 가지지 않은 상태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외 정교회 분파로는
두호보르파가 있는데,
이들은 폭력에 반대하는 기독교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고,
하느님 외에 누구에게도 복종할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인간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캐나다로 집단이민을 가야만 했다.
러시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려던 전제군주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를 지향하고 황제권을 나라 곳곳에 미치게 하여
강대국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이에 그는 국가권력에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인 세력을 구축하던 교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교회를 국가권력에 두게 하였다.
이에 따라 1721년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모스크바의 수도대주교로 격하되었고
전 러시아의 교회에 대한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당하였다.
이 재치권은 국가기관으로
새로이 설립된 신성종무회의에서 관할 하였고,
표트르는 이 신성종무회의의 구성원들을 자신들의 신하로 채움으로써
러시아 정교회를 자신과 국가의 발밑아래에 확고히 내려놓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전제황권이 무너지자 정교회를 종속시키던 요소가 사라졌고,
이에 따라 주교들은
새로이 11대 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로 티콘(티혼)을 세워
끊어진 총대주교좌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선 후로 공산주의 정부는 정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주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순교, 설교 엄금, 교회 파괴, 교회 재산 몰수,
이전 제정 러시아시절 교회가 누리던 특권박탈 등으로 수난을 겪었다.
교회의 생존을 위해
소비에트 연방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러시아 정교회는
소비에트 연방군을 열렬히 지원하였다.
당시 총대주교 세르게이는
러시아 정교회를 존속시킨다는 명목으로
소련 정부에 대한 충성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며,
이후 정부 비판을 일체 중단했다.
이러한 교회의 애국심을 높이 산 스탈린에 의해
외형적인 박해는 완화되었으며
신학교 설립도 허용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강조하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회원교단으로 가입할 정도로 다른 교회들과도 교류를 하였지만,
신부들은 여전히 목회를 할 수 없었고,
학교에서도 기독교 교육은 여전히 엄금되어 있었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순종적인 태도는
국내의 많은 신도들의 반발을 샀으며,
해외에 망명해 활동하던 미국과 서유럽 등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에 남아있던 정교회와 관계를 단절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공산주의 시절 박해를 받던 러시아 정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1990년 10월의 소련 최고회의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이후부터 이다.
소련 정권이 붕괴한 후,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교세를 다시 늘리고 있는 중이다.
폭파된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의 복구를 기점으로
러시아 각지에서 소련 시대에 파괴된 성당이나 교회조직의 재건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어서,
출근길에 기도할 수 있는 장소에서 기도를 드리고
직장에 가는 시민들도 있다고 한다.
소련 정권의 종교 박해로 인해 분열됐던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80년 만에 재통합했다.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The 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에서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 알렉세이 2세
모스크바 총대주교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 라우루스 관구장주교가
교회 재통합 협정에 서명했다.
현재 러시아 정교회는
소련 붕괴 뒤 과거 소비에트 체제에서 자신들이 관할하던 중앙유럽 국가 정교회들에서
비잔틴 전례 가톨릭교회 교구들이 독립해 로마 가톨릭교회로 복귀하고,
교황청이 이들 교구들의 위상을 러시아 정교회와 동격인 ‘총대주교구’로 승격하려 하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또한 교황청이 중앙유럽과 러시아에서 선교활동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매 교회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런 문제들을 거론하며 교황의 러시아 방문을 매번 거부해오고 있다.
바티칸 추기경단 부단장인 로저 에체가라이 추기경은
모스크바의 한 텔레비전과 가진 인터뷰에서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만남에 대해
“모든 사람이 질문한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교황과 총대주교도 만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만남이 쇼가 돼서는 안 된다.
만남을 위한 환경이 무르익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지하고 깊이 있는 만남이 될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나 취하기 위한 만남이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추기경은 그 만남이 정확하게 언제, 어디에서 이뤄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 만남의 중요성을 반영할 수 있는 특별하고 영적인 장소에서 만나야 할 것이다.
러시아와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축복이 될 만남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1월 27일
러시아 정교회의 신임 총대주교가 선출되었고,
2월 1일 총대주교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정교회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메트로폴리탄 키릴 총대주교 직무대행이 신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 700표 가운데 508표를 얻어
상대편 보수파 후보를 물리쳤다.
키릴 총대주교는
지난 달 타계한 알렉세이 2세 총대주교의 뒤를 잇게 되었다.
키릴 총대주교는 교황청과의 역사적인 화해를 도모할 수 있을 만한
개혁 성향의 성직자로 평가 받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구 소련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캐나다 등 기타 일부 지역에 전파되어 있다.
한국 정교회(정교회 한국대교구)도
1905년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의 전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