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차 포이히트방엔 (Feuchtwangen: 뉘른베르크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합창박물관"을 처음으로 찾았다.
거기서 200년 독일 민간합창운동 (처음에 남성합창으로 시작)의 역사가 한 눈에 파악된다.
같은 말을 쓰고, "독일"이라는 공통된 이름을 쓰면서도 정치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었고,
서로 싸우기도 했던 긴긴 세월 동안 "도이취" (그 이전엔 "토이취")라는 이름 하에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은 "노래", 즉 "더불어 노래하는 남자들의 집단"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통일조국과 맘껏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결국 이념화 되었던, 노래하는 독일 남자들은 쉽게 이데올로기들의 이용물이 되기도 했으나,
고향을 사랑하고, 우정을 중시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찬양했던 정서적, 민속적 노래들이 깃발, 기념물, 가수증명서,
우승배 등과 함께 유물로 전시장과 서고에 조용히 쌓여있다.
아직도 전 독일 합창연맹이 존재하기는 하나, 민간 합창운동은 점점 사라져 가는 가운데
그 가시적인 유산은 각 마을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백발의 가수들이다.
젊은 세대는 합창에 관심이 없다.
한 때를 풍미한 힘차고 늠름한 남자들의 세계가 - 나중에 여성도 가세 - 눈앞에 그려진다.
정신적, 정서적, 삶을 향한 정체성과 진정한 우정을 향한 동경이 200년 동안 그 힘을 뻗쳤다.
계곡과 숲과 들판을 향해 조용히 메아리치는 그들의 합창엔 진짜 독일인들의 정서가 자물쇠로 꼭꼭 채워져 있다.
이 200년간의 역사를 쓴 사람은 없다 - 그래서 내가 시도한다 ㅎㅎㅎ - 아니, 꼭 한 사람 있는데,
그는 150년간의 역사를 10년간 연구하여 썼으나 (1961-1969), 그 작업한 것이 필사본으로 문서고에 보존되어 있을 뿐,
출판이 되지 못한 가운데 저자는 세상을 떠났고, 아직도 40년 이상 잠자고 있다.
합창박물관!
여기서 여름 합창음악회를 추진해야겠다: 한국의 모 합창단의 의뢰를 받아 장소를 찾던 중이었다.
버스정류장. 인구 12,000. 철도가 있긴 하나, 승객이 적어 폐쇠되었다.
도시 입구의 하천 (우편:남쪽)
하천 (좌편: 북쪽)
마르크트 (시내 중앙)
시내 중앙의 교회 - 아마도 슈피탈교회 (옛날 빈민숙박소)
2개의 박물관 입구
이 동상은 무슨 연유로 여기에? 안내하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모르겠음!
아모르 회원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엑스트라로 ㅎㅎ...
미련이 남아서 뒤돌아 서서 다시...
프랑켄 박물관 (프랑켄지방의 생활 유물들 전시) - 다음에 와 볼 곳!
프랑켄박물관 (왼쪽에 건물 연장)
처음엔 여긴가 하여 닫힌 문앞에서 서성이다 옆의 식육점에 들어 가 물었다.
그 때 마침 여 박물관장이 건물로 들어 간다고 식육점 주인이 알려 주었다.
그 분(클램부인)이 길을 안내해주었다.
여기가 바로 합창박물관 (쟁어무제움: 원래 가수박물관; 쟁어: 싱어)
원래 박물관의 진열품, 소장품들은 사진촬영 금지이지만
내가 연구차 방문했으니까, 친절한 책임자가 예외로 해주었다.
합창운동의 창시자 두 사람: 왼쪽이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 (베를린), 오른쪽은 한스 게오르크 내겔리 (취리히)
첼터가 1809년에 창시한 "원탁의 노래단"의 의미를 가진 "베를린 리더타펠" (타펠: 테이블)의
모임을 묘사한 그림
카이저 (황제)가 내린 합창경연 우승배
1903년 바이쎈펠스 (문학가 노발리스의 출생지)에서 열린 합창경연대회의 2등 상 (맥주잔, 약 2리터?)
1864년 (?)쯤 비인에서 열린 합창축제: 쟁어할레 (싱어홀: 가건물)
위의 사진과 동일 - 전체장면
뭔지 알아맞춰 보세요! - 보는 사람 과제
슈팀가벨 (소리굽쇠)과 타쉔클라비어 (주머니 피아노)
모노코드 (외줄악기)
뉘른베르크 합창협회의 휘장
1871년 당시의 독일영토. 지금은 우편 아래위로 오목한 부분 (Brandenburg의 Bran에서)에서 수직으로, 그리고 왼편 아래
엘자스지방이 잘려나간 상태 히틀러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대로 일텐데...
"사진 한장 찍어 줄래요?" (부탁하면 되는 일) - 여름에 다시!
글,사진/초가집, 편집/발그미*당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