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기철
우리, 풍남동 뒷골목쯤에서나
약속없이 만나면 좋으리
경기전 돌아
전동성당지나 어느 간장게장집에 들러
모주 잔이나 두어순배 돌리고
실타래 같은 세상얘기
안주 삼으면 지고온 시름 몇 올
잠시 내려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서울 이야기 정치 이야기는
자물쇠를 채우고
아이들 혼사나 집안의 길흉사 얘기는
도드리로 삼아도 좋으리
남고산 아래 버려진
배추밭 이야기와 한벽당 뒤 걸에
아낙들 빨래하던 시절 애기쯤은 모주 잔 안주로
곁들여도 되리
그 자리 거나하니 취기 돌면 뉘 먼저랄 것도 없이
뽑는 판소리 한가락은
수양버들 가지처럼 우릴 휘감으니 나는 그만
대구로 차 시간을 놓치고 말리라
아니 짐짓 놓쳐 버리리라
어느새 널부러진
모주병 여남은개 상 옆에 뒹굴어도 그만
일어 서자는 사람 아무도 없어
모악산 넘는 달을 소나무 둥치에 메어놓고 주인에 미안하여
꼬막무침 한접시
술상에 곁들이면 오목대 내리다가
대님이 풀려 하루 더
머무는 달이 한옥마을 골목 끝에
방한칸 잡아 놓았다고 그제야
등 두드려 채근하는 소리 들리리
완산 전동 문닫는
야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고 채근하면
신었던 신발짝도 자주 벗겨지리
오늘 밤은 별빛아래, 늙은 대목장 손재간 빌려
어제 없던 한옥 한 채 더 늘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