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 나무
신유박해, 또는 신유사옥은 1801년 2월의 조선왕조 최초 대규모 천주교 박해이다.
1775년이다. 황사영은 한성 마포 아현에서 정8품 휘릉별검을 지낸 황석범의 유복자이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790년 열여섯에 증광시의 진사시, 다음 해에 복시에 급제하여 주위의 칭송과 부러움을 받았다. 또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장남 정약현의 딸 정명련(1773~1838)과 결혼하였다. 정약현의 동생들이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정약횡이니 당시 명문가의 사위가 된 셈이다. 그리고 처숙부 정약종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알렉산드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러다 신유박해에 정약종이 순교하고, 정약전은 2월 27일 완도 신지를 거쳐 신안 우이도로, 정약용은 경북 포항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다시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바로 조카사위 황사영 백서사건 때문이었다.
한성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지도자 역할을 하던 황사영은 신유박해에 충북 제천의 토기 굽는 배론 마을로 숨었다. 그리고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편지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그러나 들통이 났다. 청나라 황제 가경제에게 쓴 길이 62㎝, 넓이 38㎝ 흰 비단의 1만 3,311자 내용은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게 강요하고, 또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키라는 요청이었다. 또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6만 명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조선조정을 협박하라고 했다. 이는 정권 유지에 형제 자식도 죽이는 왕조국가에 대한 반란이었으니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1801년 11월 5일 거열형에 처해졌다.
이 신유박해에 시어머니, 지난해에 태어난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부감옥에 갇혔던 정명련은 황사영이 형장의 이슬이 된 뒤, 9개월여 옥살이를 끝내고 11월 21일 유배길에 올랐다. 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자신은 제주도의 노비였다. 그런데 아들 황경한이 추자도 관노였기에 추자도에서 헤어져야 했다. 이때 정명련은 뱃사공과 나졸에게 ‘아기가 뱃멀미로 죽어 바다에 던졌다’라고 보고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렇게 아들을 추자도 예초마을 ‘물생이 끝’ 갯바위에 두었고 마침 어부 오상선이 발견했다. 아이 저고리 동정에 묶인 헝겊에서 이름과 생년월일을 알고 황경한으로 부르며 잘 키웠다. 황경한은 건섭과 태섭, 두 아들을 두었고 그 후손이 추자도에서 내리 살았다. 또 어머니가 묻힌 제주섬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묻혔다. 어머니와 헤어진 갯바위에는 ‘눈물의 십자가’가 세워져 그날의 피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황사영의 처 정명련은 유배 뒤 정난주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대정현의 관노가 되었다. 이때 대정현 현령의 자문 격인 김석구가 어머니를 잃은 자기 아들 김상집을 정난주에게 맡겼다. 정난주를 눈여겨 살펴보던 김석구는 예사 사람과 다른 정난주의 학식과 인품에 믿음과 공경심이 생겼던 것이다. 기대한 대로 정난주는 김상집을 친아들처럼 돌봤고, 김상집도 정난주를 어머니로 따르며 공경했다.
노비인 정난주는 ‘한양 아줌마’로, 또 ‘한양 할머니’라 바뀌었으며 훗날 김상집이 추자도 황경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대부인 정씨(丁氏)가 되었다. 그렇게 관노비 38년 세월을 보내고 1838년 2월 1일 병환으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김상집은 추자도의 황경한에게 서한으로 정난주의 부고를 보냈다. 또 살던 집 가까이 모슬봉이 펼쳐놓은 햇볕 따사로운 밭에 잘 모셨다.
그리고 오늘 제주시 외도일동에 정난주성당이 있고, 대정성지 묘역에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품에 안은 정난주 마리아를 만날 수 있다. 묘역의 큰 키 워싱턴야자나무에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은 우뚝 솟아야 아들 황경한이 묻힌 저 멀리 추자도까지 보이려니 하는 애절함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