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섭리로 다스리라
효종 1년(1650년) 7월 3일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상차문(上箚文)에서 발췌함.
하늘을 공경하되 혹시라도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하는 마음에 틈이 있게 되면 덕이 순수하게 되지 못하고 백성을 보살피되 혹시라도 다친 사람 보듯이 하는 마음에 부족함이 있으면 인(仁)이 확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예우하되 처음처럼 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利害)에 마음이 흔들리고 세속의 의론에 본심을 빼앗겨서 그런 것이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직언을 용납하되 시원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도리에 부끄러운 점이 있는 것은 성상(聖上)의 도량이 확충되지 않고 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천명(天命)은 믿기 어려운 것이며 인심(人心)은 떠나기 쉬운 것입니다. 하늘은 높이 위에 있으나 매우 분명하게 관찰하고 있으며 백성은 아래에 있으나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임금의 한 마음은 그 기미(幾微)가 매우 은미하지만 선악(善惡)의 효력은 그림자와 메아리보다도 빠르며, 일상 행동이 지극히 비근한 것이라 하더라도 추기(樞機)의 발동은 천지(天地)를 감동시키기까지 하니, 감응(感應)의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하는 말이 있거든 비도(非道)가 아닌지 돌아보고 감정이 상하는 말이 있거든 도(道)가 아닌지 살펴보라.’는 말이야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제일의 묘방(妙方)이고, ‘임금된 것이 즐거운 게 아니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즐겁다.’고 한 것이야말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친 변함없는 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병통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다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역상(易象)의 ‘분함을 경계하라.’고 한 말과 정자(程子)의 ‘노여운 일을 당했을 때에 노여움을 잊고 시비(是非)를 관찰하여 다스리라.’는 교훈이야말로 유부(兪跗)와 편작(扁鵲)의 절묘한 비결인데, 어찌하여 고황(膏肓)의 병에 시험해 보지 않으십니까.
명철한 임금이라고 불리어지던 자들도 옛 성인의 글을 배우고 터득하여 이치로써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화(禍)를 면하는 경우가 드물어 똑같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화(重華, 순임금)가 자기의 사욕을 버리고 남의 선을 취하고, 대우(大禹)가 훌륭한 말에 절을 하고, 성탕(成湯)이 간언(諫言)을 어기지 않은 것을 가지고 후세에서 법으로 삼고 백왕(百王)의 준칙(準則)으로 삼는 이유인 것입니다.
천하의 일이란 모두 은미한 데를 따라 나타나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인 만큼 은미할 적에 막고 조짐이 있을 때 끊어야 하니, 반드시 그 시초를 삼가야 하는데,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엄하게 하고 신중히 하여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각이 혹 해이해져 문호(門戶)의 빗장이 열리게 될 경우 신과 같은 사람이 1백 명이 있어 아무리 힘을 다해 두루 방어하고자 하더라도 모든 물줄기가 바다를 쏟아져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어찌할 수 없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을 평지를 달리는 데 쓰면 마소에도 못 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태산(泰山)과 교악(喬嶽)은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어도 저절로 공리(功利)의 효과를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진 사람을 쓰면 그 효과의 면에서 어찌 보탬이 작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붕당(朋黨)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다 드릴까 합니다. 붕당의 화(禍)에 대한 처방은 투기하는 아내가 있는 집안을 바르게 해 나가는 방법과 같습니다. 수신(修身)·제가(齊家)의 근본 원리를 극진히 실천해 나가면 관저(關雎,《시경》 주남(周南) 편명) 와 교목(喬木,《시경》 주남(周南) 편명) 과 같은 교화를 앉아서 오게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하를 부리는 도에 있어서도 모범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도를 극진히 하면 서로들 귀감이 되어 공경하고 사양하는 풍조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것인데, 따라서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기며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 이를 악하게 여기게 되어 성(誠)과 명(明) 양쪽이 모두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진 이를 올려 주고 악한 이를 내쫓음에 있어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주고 빼앗음에 있어 자기의 사심을 참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당을 만들고 붕을 만드는 일을 다 잊어버리는 것 만한 것이 없는데, 양쪽을 다 잊으면 마음에 누(累)되는 바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노여워할 때 거울에 비치는 물건처럼 대상에 따라 발하는 것이 최상이니, 그렇게 하면 나의 선입관이 개입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어진 이를 천거하면 당(黨)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고, 악한 이를 탄핵하면 자기와 당을 달리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속이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미리부터 성상의 마음을 얽매어 놓게 되는데, 마음속의 본체(本體)가 일단 가려지게 되면 어떻게 툭 터진 마음으로 재결하고 처리하여 과(過)와 불급(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있겠으며 거조마다 마땅함을 얻어 사방 백성의 마음을 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틈을 엿보는 자들이 기교를 부리고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는 자들이 자기의 편리를 도모하려고 하여 조용히 하려고 해도 더욱 시끄럽고 제거하려 해도 더욱 치성하게 되는 것이 요즘에 이미 나타난 현상이니, 뱃머리를 돌리고 수레바퀴를 돌리는 일이 있지 않으면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것 역시 전하께서 삼무사(三無私, 천무사복(天無私覆)·지무사재(地無私載)·일월무사조(日月無私照)로서, 바로 임금의 마음은 백성에 대해 차별이 없어야 함을 말함)의 공심(公心)을 받들어 궁궐에서부터 먼저 시행하여 친소(親疏)에게 한결같이 베풀어 안과 밖의 차이가 없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외정(外庭)을 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천도(天道)가 지극히 참되기 때문에 만물이 모두 번성하고, 인주가 지극히 공평하게 하기 때문에 만민이 법으로 삼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서민(庶民)들이 사당(邪黨)을 두지 않고 관원들이 빌붙지 않는 것은 오직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그 감정이 나타나되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고 하였고,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발육된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남모르는 깊고 은미한 곳에서의 행동을 두렵게 여기고 경계하여 천리(天理)를 확충하고 덕성(德性)을 함양해 가는 이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중[未發之中]이요,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보내는 것도 없고 맞아들이는 것도 없이 확연 대공(廓然大公)하여 사물(事物)이 닥쳐오면 순리대로 응하는 이것이 이미 나타난 화[已發之和]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가지 이치로서 위와 아래가 간격이 없는 것이므로 나의 마음이 올바르면 천지(天地)의 마음도 올바른 것이며,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을 바루지도 못하고 또 기운을 순히 하지도 못하고서 천지의 마음을 돌려 중화(中和)의 복(福)을 이르게 하고자 한다면 이미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비가 내리려면 반드시 음양(陰陽)이 서로 조화되고 천택(川澤)의 수증기가 올라가서 더운 기운과 찬 기운이 서로 잘 화합하여야 단비가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가 장차 다스려지게 하려면 반드시 군신(君臣)의 뜻이 서로 합치되어 태평하고 융화하며 큰 공도(公道)를 넓히고 지극한 이치를 잘 형성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쪽 교외 하늘의 얇은 구름이 흡족한 비를 내린 적이 있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임금이 치도(治道)를 달성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형세는 바로 추위에 엉겨 얼음이 얼고 바람이 차고 매서워서, 풀을 말리고 뿌리를 썩혀 살리려는 뜻을 볼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 대해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에게서 본받는 것인데, 항역(恒暘)의 허물이 어찌 그 조짐 없이 있게 된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지의 상도(常道)는 그 마음으로 운용되지만 만물(萬物)에 두루 미치는 데는 사심이 없으며, 성인의 상도도 그 정으로 이루어내지만 만사(萬事)에 순응하는 데는 사정(私情)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하에서 한 나라에 이르고 한 집에서 만사에 이르기까지 화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틈이 있기 때문이니, 틈이 없으면 화합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줌이 없으면서 신하들의 편벽됨이 없기를 바라시고, 큰 도량을 넓히지 못하고 의혹된 부분을 끊어버리지 못하면서 신하들에게 틈이 없기를 바라시니, 이는 선왕(先王)께서 평평탕탕(平平蕩蕩)한 왕도 정치를 펴시어 신민이 표준에 모이고[會極] 표준으로 돌아가게[歸極] 하던 방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절의(節義) 있는 사람을 포상하여 높여 주고 노성(老成)한 선비를 법으로 삼는 것은 나라를 소유한 임금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과 고 참판 정온(鄭蘊)의 높은 풍채와 준엄한 절의는 비록 일월과 빛을 다툰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하늘이 한 늙은이를 남겨 놓아 영광전(靈光殿)처럼 높이 보이게 하였는데, 선조(先朝)에서 발탁하여 정승의 자리에 두었으며 성상께서도 남다른 은수(恩數)로 어진 이를 대우하시어 전대와 후대가 한 법을 쓰고 있으니, 두 사람에게는 서운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 이 낙양(洛陽)에 살면서 대정(大政)을 참여하여 들었던 것은 송(宋)나라 조정이 늙은이에게 정사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 고사를 따르지 않으십니까. 정온에게는 봉작과 증직을 하여 충절을 표창하는 은전을 아직 빠뜨리고 있어서 떳떳한 법에 결함이 있으므로 지사(志士)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악하게 조처하여 풍성(風聲)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로(元老)에게 자문하여 숨은 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어찌 재변을 그치게 하는 데 한 가지의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만번 죽을 뻔한 뒤에 다시 대궐문에 들어왔고 죄수 속에서 일어나 금방 신이 앉을 자리가 아닌 정승 자리에 외람되게 앉아 있게 되었으니, 옛날부터 특이한 은총을 받은 자들을 헤아려 봐도 신에게 비교될 자는 드물 것입니다. 상의 은덕이 하늘과 같은데 보답해 드릴 곳이 없으니 참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구구한 본심으로는 그저 한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동료들과 성심을 다하여 서로 대우하고, 공경하고 협동하여 상호 면려하면서 친함과 소원함에 간격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재능이 있으면 반드시 천거하고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이런 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면 거의 조그만 보탬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지 않고 세상이 날이 갈수록 더욱 어렵고 험해지면서 논의가 가닥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날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걱정스러운 것들이 눈에 가득하여 손을 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옛날의 통달한 재능을 갖춘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하더라도 수많은 어려움을 두루 구제하여 성상의 마음에 맞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신은 재능과 학식이 보잘것없고, 덕망과 실력이 모두 가벼워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료(百僚)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임금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고 사리에 어긋난 일을 바루는 것에 대해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뿐더러 일에 임하여 응당 해야 할 일도 허술하게 될까 걱정뿐입니다. 그리하여 복속(覆餗, 솥 안의 음식을 엎지름)의 재앙이 있을까 스스로 걱정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시대를 구제하는 직책을 어떻게 감히 맡겠습니까 .
아, 궁(宮)·상(商)·각(角)·치(徵)는 똑같이 조율(調律)된 적이 없었고 조(燥)·습(濕)·신(辛)·감(甘)은 각각 다른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사광(師曠)이 거문고 줄받이를 돌면서 당기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여 소리를 조화하고 역아(易牙)가 손을 놀려 고루고루 섞어 맛을 내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음악이 이루어지고 맛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장구를 치고 파잎을 불면서 육률(六律)을 의논할 수 있겠으며 풀뿌리를 씹고 나물을 먹으면서 어떻게 오미(五味)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와 토저(土苴, 흙으로 만든 깔개)처럼 쓸모없는 신이 어찌 임금의 뜻에 만분의 일인들 응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깜박이는 반딧불도 혹 조림(照臨)하는 밝은 빛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말발굽에 고인 얕은 물도 크나큰 하해(河海)를 이루는 하나의 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