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2. 성령, 오늘도 내게 오소서
04 성령의 축복(4) - 인간관계 회복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주교님의 눈에는
피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1970년대 초, 주교님과의 마지막 대면에서 내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한국을 떠났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낯
선 외국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나 경갑용 신부
님(현재 대전 교구 은퇴 주교)이 이런 식으로 유행처럼 고국을 떠나
던 무렵이었습니다.
독일에서 근 1년을 체류하다가 미국 워싱턴 D.C.로 자리를 옮겼습
니다. 길어야 2년 정도 체류하다가 귀국하려고 생각했는데 초대 한인
성당을 설립하고 무려 5년 반 동안 그곳에서 사목생활을 하게 되었습
니다.
어느 날 오후 2시께에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기에 응접실에 가보니
주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외국에서 지내기가 무척 힘들지요?"
"정들면 고향 아닙니까?"
일부러 나를 찾아주신 윗분에게 해선 안 될 버릇없는 대답이었습니
다. 그리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가시겠다는 주교님께 잘 가시라
고 인사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방으로 갔습니다.
그동안 가슴에 사무쳤던 주교님에 대한 감정의 응어리가 더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 맺힌 상처와 고통 때문에 내 결례는 벌써 잊고 있
었습니다.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고 만나서 대화를 한다는 것
이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후 5년이 지나서 주교님이 신시내티를 방문했고 나흘 동안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미사와 만찬, 저녁 기도회와 운동을 같이하면서 매
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상한 것은 예전의 아주 좋았던 관계
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교님은 한국에 가서도 신자들이나 봉사자의 특별 강론 때도 왕
신부와 신시내티 공동체의 좋은 점과 아름다운 면을 자주 소개해주셨
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과 화해하고 죄를 용서받고 주님 사랑 가운데 머물러 있
게 되니까 성령께서는 주위의 사람들과 원수까지도, 심지어 동식물
과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물에 이르기까지 은혜로운 관계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그때 나는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면 내 삶
의 횡적인 대인관계도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
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면 주님과의 관계도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원리가 순환되면서 더
욱 더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
들을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로마 8,30)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