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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10 - 시후(서호) 를 걸으면서 고려에 대한 소동파의 생각을 회상하다!
2023년 11월 1일 항저우 딩안루역에 내려 고풍스러운 난쑹위제(南宋御街) 에서 河坊街(허팡제)
또는 淸河坊 칭허판) 이라고 부르는 거리를 구경하고는..... 휴대폰에 구글에
西湖天地(서호천지) 가 영어로 Xihu Tiandi 라고 나와 있으니 영어로 입력해 앱을 실행시킵니다.
시후에 도착하니 막 해가 지는데.... 수많은 관광객객들로 인산인해이니 보트를 타는 사람들도 많지만
우리 부부는 호수 동남쪽 모서리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서...... 서호 10경 (西湖10景) 을 생각합니다.
서호 10경(西湖10景) 은 곡원풍하(曲院風荷) 단교잔설(斷僑殘雪) 소제춘효
(蘇堤春曉) 뇌봉석조(雷峰夕照) 남병만종(南屛晩鐘) 평호추월(平湖秋月) 화항관어
(花港觀魚) 유랑문앵(柳浪聞鶯) 쌍봉삽운(雙峰揷云) 삼단인월(三潭印月) 입니다.
서호는 쑤티(蘇堤 소제) 방파제에 5개의 호수로 나누어 지는데..... 백낙천이나 소동파는
물론이고.... 오래 된 한자성어인 ‘와신상담(臥薪嘗膽)’ 의 주인공인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 중국 4대 미인의 하나인 서시(西施) 의 추억이 서린 호수 입니다.
소동파는 북송(北宋) 의 시인이자, 학자, 정치가로 쓰촨성 미산 출신이니 호가 동파 (東坡)
인데..... 소식 이라는 이름 보다는 성씨에 호를 붙여서 부르는 방식인 소동파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 소순, 동생 소철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의 한 사람 입니다.
그는 서호에 쑤티(蘇堤 소제) 를 쌓았으니.... 폭우에도 호수의 범람 우려없이 무사히
살게 되자 백성들은 소식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는데, 때마침 전에 서주에서
살았던 사람이 예전에 소식이 백성들과 함께 홍소육을 만들어 먹었다고 말해줍니다.
백성들이 소식에게 돼지고기를 선물하자.... 늘 먹던 홍소육에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던
소식은 돼지고기 덩어리를 네모나게 잘라서 찜통에 넣고 간장 양념을 해서 삶아
보니 맛이 괜찮은지라 이 요리를 동파육이라고 부르니 항주의 대표요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파육을 본 세력들이 동파가 백성들에게 강제로 고기를 팔아 이득을
챙긴다고 탄핵하는 바람에 그는 해남(海南, 하이난) 으로 유배를 떠났으니.....
백성들은 큰 덕을 입었는데 갚지도 못했다며 미안해 했고.... 대신에 소식이
가르쳐준 요리법을 지켜 동파육을 항주의 명물로 대대손손 전수했습니다.
그런데 고려에 대한 소동파의 생각을 보면..... 貊賊 入貢 無絲髮利 而 有五害
今請 諸書 與 收買 金箔 皆 宜勿許。라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
맥적(고려인) 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여러 서책과 더불어 거두어 사가는
금박 모두 마땅히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고려가 조공을 바치면서 사신이 폐백을 관리에게 보냈는데, 글에서 갑자를 칭하였다. 소식은 물리치며
“고려가 우리 조정에 칭신하면서 우리의 책력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이걸 받겠는가!”
라고 말하였고, 사신이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이라고 칭하자, 그러한 뒤에 받았다. - 《송사》, 소식전
중국에서 위인이자 시인으로 알아주는 인물이지만 고려를 천한 나라라고 하는가 하면 고려에 대한 서책
수출을 금지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연호도 송나라와 다른 연호를 쓰며 멋대로 고려
황제를 칭한다고 말이다. 한편, 서책 수출을 반대한 데에는 송의 대외 관계 탓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사방에서 틈만 나면 송을 뜯어먹으니, 그런 나라 사정 속에선 고려도 위험한 예비 적성국가로 보였을 법
하다는 것. 실제로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 왔을 때 엄청나게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요나라에 하도 치인 탓에 고려를 홀대할수 없었던 송나라 사정상, 의천의 개인 가이드 노릇까지 해야했다.
다만 당시 송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소동파의 주장도 아예 일리가 없진 않았다. 실제 당시 송은 요와
중원을 두고 다투고 있었고 문종 ~ 숙종에 이르기 까지의 고려는 이런 요와 송 사이에서 간을
보며 이익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고려가 수십만 대군을 확보하고 있다는 표현 까지 있다.
"당나라 고종이 평양을 함락시켰을 때 (고구려 당시) 는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
(고려 인종 원년) 은 전대에 비해 또 배가 늘어났다" -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1권 의장과 호위 中>
요든 송이든 중원을 노리는 상황에서 고려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고, 고려를 도모하기엔 송은 황해가,
요는 천리장성 때문에 장기전을 생각할수 밖에 없었다. 당시 상황은 송-요가 단독 1위를 노리는 공동
1위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가진 2위 고려가 양쪽 모두에게 을질을 하고 있었던 천하삼분지계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송이나 요나 고려 사신을 후하게 대접해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송의 재정과 품위에 꽤나
부담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사신들은 돌아가는 길에 송나라인의 물건을 강탈하기도 했다.
고려는 조공품은 제대로 보내지 않으면서 하사품은 10배로 뜯어가거나, 하사품을 개봉과 항주 등에서 바로
금과 은으로 바꿔서 가져가거나, 군사기밀인 지도를 비롯 황실에만 있는 희귀도서들을 달라고 하거나,
황제에게 입시하기 전에 다른 사신들과 먼저 만나서 접대를 받거나 하는 등 안하무인적 행태를 보여줬다.
당시 국제관계상 송은 고려를 어쩌지 못했다. 그러니 열불은 나고 고려가 사실상 주는건 없는데
달라는 것만 많다는 식으로 불평한 것. 위의 의천 사례만 봐도 소동파 입장에선 북송이
고려에 휘둘리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이런 감정을 고려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반대파들에게 자신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했다. 바다를 끼고 멀리있는 고려보다 가까이 있는 서하나
요에게는 맥적은 커녕 찍 소리도 못하지 않느냐며 소식을 공격했다. 고려는 서하나 요처럼 수십만 세폐를
받고 송을 상국으로 모시는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송의 아우를 자처하며 여러차례 도움을 주고 있는데,
고생이 심한 아우가 형에게 하소연을 하고 투정을 부린다고 형이 동생을 멸시한다니 말이 되느냐고 것이다.
오히려 소식의 발언이 고려 사신들의 귀에도 들어가 고려 조정이 불만스러워한다고 따졌다. 소식은 고려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백성들이 힘들뿐더러, 고려가 받아간 문물들을 거란에게 넘기고, 말로는
송을 받든다면서 정작 실리만 챙겨가는데다가 심지어 송의 허점을 탐구하며, 송-고려 관계가
거란이 트집거리가 된다고 주장했는데, 반대파들은 그런 다섯가지는 서하나 요도 모두 한다고 반박하였다.
소식이 주장한 것 처럼 요가 트집 잡을 게 두려워 고려와 관계를 끊었을 때 요가 침공한다면,
우리 손으로 관계를 끝내버린 고려가 과연 우리를 도와줄 것 같느냐고 피반하였다.
고려와 관계가 단절되면 요는 반드시 침공할 터인데, 군사적으로 요의 침공을
막거나 외교적으로 침공을 막는 방안을 제시해보라고 하자 소식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소식의 반대파들은 소식이 고려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고 주장하지만, 고려는 세폐를 받지도 않을
뿐더러 송의 경제적 불안은 서하와 요가 매년 받는 수십만의 세폐 때문인데, 정작 서하와
요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송에 우호적인 고려를 맥적으로 멸시하며 송에
우호적인 나라를 적으로 돌리려고 한다는 이유를 들어 소식을 서하나 요의 첩자로 몰아갔다.
소식 반대파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기에 소식은 자신이 아둔해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다며 황제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고.... 소식으로 인해 감정이 상했을
고려인들의 마음을 다독이라며 의천의 개인 가이드를 하라는 명을 받고 임한 것이다.
반대파들이 소식을 비판한 부분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것이다. 송을 호시탐탐 노리는
서하와 요에게는 찍 소리도 못하면서, 서하와 요가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고려가 송에게 자세를
낮춰 우호적으로 나오니 만만하게 보고 맥적으로 멸시한다며 소식을 글만 잘쓰는 위선자로 공격한 것이다.
소식은 고려를 맥적으로 멸시했는데, 이 때문에 고려와 송의 우애가 균열이
갈 듯한 분위기가 되자 송나라 조정이 소식을 좌천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이후 소식은 지방으로 전전할 뿐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국제정세 상 고려와 협력해야 하는 송나라 입장에서는 소식의 발언은 위험한데 눈치
없이 고려를 만만하게 보고 공격성 발언을 하다가 자기 나라에서 소식을
위험요소로 보고 지방으로 쫒아낸 것이다. 즉, 글 솜씨와 달리 눈치가 영 없었던 것.
한편, 이러거나 말거나 정작 소식은 고려인이나 후세의 조선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 고려에서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시는 모름지기 소식과 황정견을 모범으로 삼았고,
과거에 급제한 33명을 가리켜 삼십동파출 이라고 할 정도로 소식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현대에선 그저 고려를 멸시한 인물 정도로만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시인
이은상도 수필 소동파에서 어느 식당에 가니 적벽부가 적힌 시를 액자로
매달고 있어서 소동파가 고려를 혐오하던 자인데 이게 뭔짓이냐고 호통을 치자......
식당 주인이 놀라서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인줄 몰랐다며 액자를 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리도 고려를 혐오했는데 고려나 현대 한국에선
여전히 소동파가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이 무슨 일이냐고 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결론적으로 고려에 대해 반목하는 감정이나 혐오 성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덮어놓고
고려를 싫어한 건 아니다. 고려의 외교 스탠스도 소동파나 송나라의
입장에서 보기에 꽤나 진상 짓을 했다. 실제 소동파가 고려를 마냥 혐오한 사람은 아니었다.
기록을 보면 그의 제자인 장뢰가 당시 송나라에서 인기를 끌던 고려 부채를 구해 주자 고려 부채를
칭찬하는 시를 짓기도 한 걸 보면 '고려' 자체를 싫어했다기보단, 당시 고려 조정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 현대에도 타국 정부는
싫어도 그 나라 문화나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는 것처럼 소동파도 비슷한 스탠스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소동파가 활약하던 시기에는 지금과 같은 종류의 민족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송나라
와 요나라, 고려가 서로를 다른 주체로 인식하는 등 민족 구분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부재했던 것은 아니나, '민족 단위의 국가를 설정하고, 민족의 기준에 맞는
사람들로 국민의 개념을 정의하는' 지금과 같은 의미의 민족주의는 분명한 근대의 산물이다.
즉 소동파가 고려를 욕했다고 하여 그것이 현대의 반한 혹은 혐한 감정과 같은 것은
아니며, 현재의 정치 지형에 입각하여 이를 해석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 사람의 사고를 판단하고 단정짓는 건 함정에 빠지는 길일 수 있다.
물론 그가 근대적 민족의식 대신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화이관 (華夷觀,
중화 대 오랑캐, 문명 대 야만의 관점)을 지녔을 수는 있겠다. 소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범조우 (范祖禹, 1041~98) 의 글과 소식의 글을 비교해 보자.
저들이 비록 이적(夷敵) 이지만 역시 중국의 백성과 같다. 오랑캐는 이익을 좇고 손해를 피하며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니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다. - 범조우의 <당감(唐鑑)> 권3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금수와 같아서 너무 잘 다스려지기 바라면 커다란 혼란에 빠지고 만다. - 소동파 전집
류종목 교수(서울대) 는 이러한 관점차의 이유를 소동파의 열등의식에서 찾는다.
송나라는 다른 이전의 중국 왕조에 견주면 문약(文弱) 하기 짝이 없었다. 늘 요나라(거란) 와 서하
(西夏)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한 애국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소동파는 송나라의
‘대외적 열등감’ 을 해소하고 싶은 복합 심리에서 지나칠 정도의 문화적 우월감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여간 이러한 소동파 본인의 성향과 별개로 그의 한시가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성향을 이유로 그의 업적을 굳이 절하할 필요도 없다. 작가 본인의 행보와
문학적인 성취는 별개로 봐야 한다. 그런 만큼 순수하게 시로서 좋아하는 것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서호에서 저녁놀을 보다가 문득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수’ 컬럼에 나오는
이준식 성균관대학교 교수의 “아내를 달래며”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겨울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정월 또 수도를 떠나야 하는구려.
나도 세상 티끌 잔뜩 묻은 내 눈이 원망스럽소. 매양 먼 외지의 꽃만 봤으니 말이오.
내 수레의 푸른 휘장은 여전히 번쩍이거늘, 꽃처럼 젊은 그대 탄식일랑 하지 마오.
구름처럼 떠도는 남편에게 시집왔으니, 나를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고향이지요.
(窮冬到鄉國, 正歲別京華. 自恨風塵眼, 常看遠地花.
碧幢還照曜, 紅粉莫咨嗟. 嫁得浮雲婿, 相隨即是家.)
―‘아내 유지에게(증유지·贈柔之)’ 원진(元稹·779∼831)
고향 떠나 객지를 떠돌다 보니 눈에 박힌 건 하나같이 외지의 꽃, 타향의 풍광이다. 하여 시인은 자기
눈이 세상 티끌로 오염되었노라 탄식한다. 한데 이번에도 또 사달이 났다. 모처럼
귀향했나 했는데 조정은 금방 다시 외지 부임을 명한다. 아내의 원성을 살까 지레 염려했기 때문일까.
시인은 ‘내 수레의 푸른 휘장은 여전히 번쩍인다’ 는 말로 애써 아내를 위로한다. 푸른 휘장은 황제가
신임하는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이 영광의 표지를 관리들은 자기가 타는 수레나 배에 꼭
내걸었다. 수도를 떠나는 게 결코 좌천이 아니라는 해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향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관리의 숙명으로 감수하자는 시인의 자분자분한 다독임이 인상적이다.
시제에서 시인이 아내를 ‘유지’라는 자(字)로 부른 게 특이하다. 옛날 사대부 집안에서는 남자는 스물, 여자는
열다섯이 되면 자를 부여하여 이름 대신 통용했다. 아내에 대한 시인의 공경심이나 친근감의 표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