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진 목사 - 한국 성결 교회 최초의 순교자|
고결한 피를 흘린 박봉진 목사는(1890-1943년) 한국 성결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는 동시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죽음 앞에서도 바른 신앙고백을 한 '위대한 믿음의 선배'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박봉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부지다는 주위의 평을 들으며 서당 교육을 마쳤다. 17세 때인 1907년 우연히 수원에서 노방 전도를 받고 교회에 등록,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맞는다.
금은방에 취직했다가 이 계통의 사업가로 변신, 결혼을 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는 교회 개척과 전도를 직, 간접으로 도왔고, 3.1만세 운동 당시에는 운동적극가담자로 평택 경찰서에 수감돼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금은방을 7개나 차렸던 사업가 박봉진이 목회자가 되고 순교자가 되기까지는 한국의 유명한 성결교회 부흥사 이성봉 목사의 영향이 컸다. 당시 성결 교단에서는 성서학원을 갓 졸업한 이성봉 전도사를 수원에 보내 교회를 개척케 했는데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열정적인 설교로 인해 금방 4백 여명이 모이는 대교회를 이뤘다.
당시 평택 성결 교회 신자였지만 사업상 수원에 오가며 이목사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박봉진은 드디어 자신의 남은 삶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성결 교회 교역자 양성기관인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 전신)의 문을 두드린다. 1932, 43세 때였다.
성결교의 핵심 교리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신학을 배우며 졸업반 때까지 장호원교회 전도사로 목회하던 그는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여주교회로 파송 받는다. 당시는 전국 교회와 학교가 모두 신사참배를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38년 목사 안수를 받고 여주, 이천 교회를 담임하며 성공적인 목회를 하던 그를 교단본부에서는 41년 5월, 다시 철원 교회로 파송한다.
당시는 목회임지가 파송제였다. 철원은 기독교회를 특히 핍박하는 지역으로 모 감리교회 목사는 고문을 당해 순교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곳이었다.
"아버님은 안정된 교회를 뒤로 하고 고통이 예비된 임지로 간다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철저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새롭게 시작하셨지요. 흩어졌던 양떼들이 모이듯 침체됐던 철원 교회가 다시 활기를 띠었습니다."
당시 10살이던 기목사의 삼남 박해원 장로는 이때를 회상하며 "설교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복을 즐겨 입고 강대상을 쳐가며 강하게 설교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치욕스럽게도 제도권의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인정했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를 유지하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일본 내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시키는 동시에 기독교 34개 교파를 모두 강제합병 시켰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도 이 일본 통합교단에 들어가도록 강요했다.
한국에서의 교파 합동에 따른 성결교 대표이던 이명직 목사는 "일제가 성경에서 구약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력히 맞섰고 결국 성결교단은 당시 기관잡지인 '활천'의 폐간되는 동시에 43년 5월, 전국 성결교회 일제검속령이 내렸다. 바로 이때 박봉진 목사도 철원 경찰서에 구속, 수감된다.
유치장으로 들어가기 전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게하고 좁쌀과 콩밥을 주는 색다른 환경 속에서 박목사는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그러나 박목사에게는 더 큰 고통과 형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사 앞에 불려간 박목사는 신사참배를 거절한 이유를 하나님 이외에 참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하나님이 천황보다 더 높다고 여기느냐고 묻는 질문에도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다. 강직한 신앙은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
"목사님은 때리는 소리가 마치 장작 패는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 기절하면 다시 물을 끼얹어 깨우고 갖가지 방법으로 3개월간을 주야로 고문했지요.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마른 볏짚처럼 말랐지만 그들은 항복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일본 천황에 충성하겠다고 자술서 한 장만 쓰면 풀려나올 수 있는 것을 아버님은 끝까지 신앙 지조를 지키신 것이지요."
박목사의 오남 박한섭 장로는 "당시 상황을 많은 분들로부터 전해들었다."며 "부친의 생명이 고문으로 인해 위태로워지자 그때서야 석방을 했고 불과 일주일 후에 소천하셨다."고 말했다. 박목사가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남긴 유언은 "부인과 아이들이 불쌍하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조금도 염려마시오."였다.
박목사의 유언은 그대로 실천됐다. 모두 5남 3년을 둔 박목사는 자녀들 모두가 훌륭한 신앙인으로 또 사회의 빛된 일꾼으로 성장하는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차남 박한기 장로는 화가로 사회 사업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봉진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부산신학교 1회 졸업생인 3남 박해원 장로도 교계와 사회에서 많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4남 박영섭 장로는 재미음악가로 성장, 대학교수로 재임하다 퍼파크웨이 음학학교를 창설하고 한인회장을 지내는 등 선교와 봉사에 적극 나서고 있다. 5남 박한섭 장로도 유명제약회사의 간부로 정년퇴직을 한 뒤 교회 일에 진력하고 있다. 박봉진 목사의 사모 신인숙 전도사는 후일 혜화동교회를 개척하고 이를 순교기념예배당으로 삼았으며 자녀들이 주로 출석하는 부상동광교회에서는 매년 순교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43년 박목사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분이 두터웠던 이성봉 목사는 크게 애통해 하며 박목사를 가시밭의 백합화로 비유하며 이런 가사를 지어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성결교의 작은 거인 박봉진 목사. 그의 순교 신앙은 오늘도 수많은 성결교회와 성도들의 마음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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