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은 우선 호구(湖口)에 진을 치고, 그보다 후방인 경강구(涇江口) 및 남호자(南湖觜)에 복병을 배치하여, 진우량의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렸다.
한편 주원장이 당도하기도 하였고, 자신에 대한 포위망을 펼치는 모습이 보이자, 진우량은 남창에 대한 포위를 풀고 파양호로 나와 주원장과 결전을 벌이려는 모습을 취하였다. 어차피 주원장의 주력군만 무찌르면 남창 정도는 언제든지 함락이 가능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7월 20일, 양군은 강랑산(康郎山)이라는 곳에서 처음 조우하였다. 주원장은 부대를 11부대로 나누어 적을 막아내었다.
본격적인 교전은 다음날 부터 이루어졌다. 7월 21일, 상류의 흐름을 타고 있는 진우량의 군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듯 하는데, 서달은 몸소 다른 장수들보다 앞장 서서 싸워 적의 선봉을 깨고 1,500명의 적을 무찌르고, 적의 큰 배를 한척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상우춘 역시 장수들을 이끌고 싸웠고,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조용하던 파양호는 수십만 대군이 외치는 함성 소리로 가득찼다.
유통해(兪通海) 역시 군대를 지휘하며 화포를 사용해 진우량 군의 함선 수십여척을 박살내었다.
이때, 진우량군의 효장(驍將) 장정변(張定邊)이 주원장이 타고 있는 함선을 발견하고, 바로 이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얕은곳에서 배가 서로 뒤엉켜서 주원장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는데, 곁이 있던 상우춘이 화살을 쏘아 장정변을 물러나게 하고 벗어날 수 있게 했지만, 다시 얕은 곳에 걸려 들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때마침, 운 좋게도 패주하던 아군의 배를 발견하여 여기에 탑승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날 밤, 주원장은 진우량과 싸우고 있는동안 장사성이 움직일 것을 염려, 가장 믿을 수 있는 서달을 남경인 응천부로 귀환시켜 장사성에 대비하게 하고, 나머지 장수들과는 진우량과 결전을 낼 준비를 하였다.
7월 22일, 아침 진시(辰) 시 무렵, 진우량은 가지고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거함(巨艦)들의 엄청난 위용에 주원장 군단의 모든 장수와 병졸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사기가 꺾이는 가운데, 주원장은 직접 전선에서 지휘하면서 퇴각하거나 움찔하며 나아가지 않는 자들은 죽이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모든 병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서 결전하였고, 엄청난 대혈전이 벌어졌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하는 입장이던 진우량군이 우세하였다.
또 주원장은 호상(胡牀)에 앉아 지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곁에 있던 유기가 펄쩍 뛰며 주원장에게 이동할것을 재촉했고, 주원장은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다른 배로 이동하였다. 아직 주원장이 경황을 챙기지 못했을때, 석포(石砲)가 날아와 주원장이 타고 있던 이전 배를 박살내었다.
그런데, 오시(午)를 넘기는 즈음이 되자 갑자기 동북풍이 불기 시작했다. 게다가, 진우량은 거함들을 쇠사슬로 연결하여(連鎖)하여 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에 주원장은 7척의 결사대를 뽑아, 화약과 갈대를 실어바람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자 진우량의 함선은 삽시간에 불에 타버리게 되었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바람이 맹렬하고, 불길은 거세었고,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니, 호수가 모두 붉은 빛이었다. 진우량의 군대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고, 주원장 군단의 장수들은 모두 신이 나서 북을 치며 가공할 공세를 가하였다. 이미 지휘계통이 마비된 진우량 군단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해 주원장 군단은 수급을 잘라 확인한 숫자만 2천여명이었으며,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진우량군의 병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진우량은 기세를 완전히 빼앗겼다. 이 싸움에서 진우량의 동생인
진우인(陳友仁)도 죽었는데, 진우인은
애꾸였지만 용맹하고 지략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진우량은 더 이상의 싸움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혜산(鞵山)으로 물러나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주원장이 미리 군대를 움직여 좌려(左蠡)등을 장악하고 파양호의 퇴로를 막아버려 도주조차 불가능해졌다. 이에 진우량 군의 우금오장군(右金吾將軍)이 건의를 올렸다.
""호수를 탈출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배를 불태우고 뭍으로 올라, 바로 호남으로 가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러자 진우량 군의 좌금오장군(左金吾將軍)이 반론하였다.
""이러면 우리가 약하다고 보이는 것이며, 저들이 보병과 기병으로 우리를 뒤쫓으면, 진격하거나 퇴각해도 의지할 바를 잃게 되어, 대사를 잃게 됩니다."
진우량은 한참을 갈팡질팡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우금오장군이 말한 대로 행하려고 했지만, 그러자 좌금오장군이 주원장에게 항복해버렸고, 그 모습을 본 우금오장군마저 항복해버렸다.
어쩌라고 형편없어진 진우량에게, 주원장은 자신의 서신을 보내왔다.
"나는 공과의 약속을 따르고자 하여 각자 일방(一方)을 편안케 하며 천명을 기다렸소. 공이 실계(失計)하고 방자하여 그 독이 나에게까지 미쳤소. 나는 군대를 가벼이 해 그 틈을 빠져나왔으나, 문득 공은 용흥(龍興) 11군을 차지하였으면서도, 오히여 스스로 후회하여 뉘우치지 않고, 또다시 병화(兵禍)의 단서를 만들었소. 한번에 홍도(洪都)에서 곤궁해졌고, 두번째는 강랑산에서 패하였으니, 골육과 장사(將士)들은 거듭 도탄에 빠졌소. 공은 다행히 살아 돌아갔으니, 또한 의당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진정한 주인을 앉아 기다려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가속을 잃고 일족이 멸할 것이니, (그때는) 후회해도 늦소."
이 편지를 본 진우량은
멘붕 하여 잡아놓았던
포로들 까지 모조리 학살하며 발광하였다. 이에 비해 여유가 넘치게 된 주원장은 오히려 잡은 포로들을 놓아주고 잘 대해주고, 죽은 사람들의 친척들에게 조문을 하면서 대조를 이루었다.
대치가 이어지던 8월 26일, 마침내 진우량 군대의 식량이 바닥이 났다. 진우량은 최후의 발악으로 백척의 전함으로 호수 입구로 돌진하여 포위를 뚫으려고 하였고,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 장수들은 진우량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진우량 부대는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오히려 해가 저물때까지 마치 늪에 잠식당하듯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전투의 와중에, 군대를 지휘하던 진우량은 유시(流矢)에 맞아 눈과 머리를 관통당하고 즉사했다. 진우량 군은 모조리 괴멸당하고, 태자였던
진선아(陳善兒)는 사로잡혔으며, 이 싸움에서 주원장을 위협했던 장수인 장정변만이 진우량의 둘째 아들
진리(陳理)와 진우량의 시신을 가지고 무창으로 탈주하는데 성공했다.
첫댓글 야네들은 호수에서 대해전을 ㅎㄷㄷ
즐겁게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 정말 어마어마한 대전투네요. 도대체 호수가 얼마나 크길래......
잘 보고 갑니다.. 정보 감사드려요
확실히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에 대한 묘사는 이 파양호 대전을 배낀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