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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0회 2015.5.19.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5년 5월 19일(화,오후 3시~6시)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4.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心念處]
1) 마음이란 무엇인가
(1) 마음은 비물질이다
마음에 대한 분석은 우리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대한 분석은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진실을 알아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얻어야 모든 번뇌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마음이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현상을 바르게 보는 지혜가 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삽니다. 정신과 물질을 사념처 수행에서는 몸과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물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음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정신과 물질은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같지 않고 각각의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은 정신의 영역이 있고 물질은 물질의 영역이 있어서 상호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정신은 물질이 아니고 물질은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내 몸과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순한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일 뿐입니다. 몸과 마음을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라고 알 때 자아가 없는 하나의 개체로서 이해합니다. 이처럼 정신과 물질이 각각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분리해서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 몸과 마음에 대한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비물질이기 때문에 물질처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물질과 함께 있으면서 물질을 이끕니다. 비물질인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합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추론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한 진실은 지혜가 있는 자에 의해서만 그 모습이 밝혀질 수 있습니다. 만약 지혜가 없다면 마음에 대한 잘못된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한 진실이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음이 항상 하다는 것과 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많은 고통 속에서 나고 죽는 것을 거듭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마음이 항상 하다면 죽어서 몸만 바꾼다는 환생이 되기 때문에 무상의 진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하면 자아가 있다는 것으로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라는 견해로 인해 집착을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음이란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공기가 있어서 살지만 공기가 있는지 알기 어려운 것처럼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물질을 이끄는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잘못된 견해가 생겨서 어리석게 살아야 합니다. 모든 생명의 윤회가 바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괴로움이 바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몸과 마음을 장님과 앉은뱅이로 비유합니다. 몸은 저 스스로 볼 수 없어서 장님이라고 하며, 마음은 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몸이라는 장님과 마음이라는 앉은뱅이가 서로 동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몸이라는 감각기관은 물질로서 아는 마음이 없으면 대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가고자 하는 의도만 있지 실제로 움직여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몸과 마음을 하나의 동일체로 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기능을 하면서 함께 있습니다.
(2)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한다
마음을 세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행위를 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합니다. 둘째는 도구의 측면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이것으로 인해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셋째는 행위 그 자체 입장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이다’라고 합니다. 이상 세 가지 측면에서 보는 마음들의 공통점은 모두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알아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조건에 의해 나타난 모든 것을 아는 기능을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마음이 하는 가장 순수한 기능입니다. 마음이 그 자체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능에 기인한 것입니다.
마음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구분합니다. 마음은 오온의 식(識)이며, 마음의 작용은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입니다. 이때 오온의 식은 단지 아는 마음일 뿐이며 정작 앞에서 모든 일을 꾸미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의 기능입니다. 수(受)는 느낌이며 상(想)은 인식, 지각, 표상, 기억을 뜻하며, 행(行)은 마음의 형성력, 의도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한 일을 단지 마음이 받아들여서 아는 기능을 할 뿐입니다.
대상과 접촉했을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압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표상이 일어났을 때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압니다. 또 대상에 대한 의도가 일어났을 때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처럼 마음은 수, 상, 행이 일으킨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아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서 아는 마음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대상을 안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행위에 속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단순한 기능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대상을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괴로워한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일으킨 여러 가지 일들을 마음이 단지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그 순간 다시 마음이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어떤 상상을 했을 때도 마음이 단지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했을 때도 마음이 단지 이것을 압니다.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아는 단순한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그 자체는 청정하지만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좋아하는 마음이 되고, 나쁜 느낌이 일어나면 싫어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과 같아집니다.
마음은 대상을 알기만 하지, 알아서 어떻게 반응하거나 무엇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 뒤에 괴로워하는 것은 수(受)라고 하는 느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상상하는 것은 상(想)이라고 하는 지각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어떤 의도를 내는 것은 행(行)이라고 하는 마음의 의도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이러한 수, 상, 행의 작용이 일어나면 그것을 다시 마음이 압니다. 이것이 마음의 실제입니다.
마음은 하늘과 같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구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아무 조건 없이 이것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기능을 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땅과 같고 나무와 같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땅과 나무도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마치 마음처럼 그냥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아는 기능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마음만을 제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함께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효과입니다. 마음이 단지 대상을 알기만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성자의 마음입니다. 아라한과 붓다의 마음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인데 이때의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알기만 하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3) 마음은 매순간 변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합니다. 변한다는 것은 항상(恒常) 하지 않은 것으로 무상(無常)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질도 매순간 변하고 마음도 매순간 변합니다.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은 반드시 조건에 의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몸이 한 순간에 한 번 변할 때 마음은 열일곱 번 변합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을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일어난 순간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면서 연속적으로 흐릅니다. 이러한 의식흐름을 의식의 연속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혜로 보지 않으면 모두 하나의 같은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미들이 떼를 지어 가는 것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직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모여서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매순간 먼저 있던 마음이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마음도 즉시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생명이 있는 한 연속적인 현상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마음은 있지만 매순간 변하는 마음이라서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마음은 없고 매순간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만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은 변하지 않고 항상 하다고 하면 그것을 지배하는 자아가 있다고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아가 생기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견해가 생깁니다. 이러한 견해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런 견해는 언제부터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 말이 옳은 말인 줄 알고 그냥 전해진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것을 말해도 진실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그것을 믿고 잘못을 진실처럼 알고 삽니다.
마음은 전기불이 들어오는 원리와도 같습니다. 전기불이 켜질 때 전류가 빠르게 끊어지면서 에너지를 보냅니다. 이것을 잘 모르면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선을 통해서 들어오는 불도 최소의 미립자들로 구성된 에너지가 전송되면서 불이 켜집니다. 실제로는 작은 미립자들로 구성된 에너지가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전해지는 것이지 이것들이 모두 붙어서 계속 전류를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현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인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에서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을 새로 만들어서 생명이 계속됩니다. 이때 죽을 때의 마음과 새로 태어난 재생연결식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순간마다 조건에 의해 생긴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우리가 평생을 하고 사는 호흡이 같은 호흡이 아니듯이, 마음도 같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입니다.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쉬지 않고 흐릅니다. 먼저 마음이 다음 마음을 조건지우고 사라지지만 먼저 마음에 있는 정보는 다음 마음에 고스란히 옮겨갑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이 다음 마음과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전혀 다른 마음일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원인과 결과라는 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이때 이전 마음의 과보가 전해져서 다음 마음이 지속됩니다. 이때 이 과보는 내가 아닙니다. 이 과보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한 순간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음 순간에 마음이 즉시 일어나는 것처럼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순간적입니다. 마음은 잠시도 어느 곳에서 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생명의 끝은 순식간에 다음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시간이 어느 곳에서 잠시 쉬다가 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시간처럼 쉬지 않고 흐릅니다.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라지면서 다음 마음을 조건지우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다고 알면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그 무상은 어떤 누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무아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 일어난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집착이 끊어져서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항상 하는 마음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압니다. 그러나 지혜로 보았을 때의 마음은 매순간 변합니다. 조금 전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지금 이후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에는 자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분석은 수행을 해서 최고의 지혜가 났을 때라야 비로소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여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 보면 마음은 있지만 이 마음을 내가 소유하거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는 무아를 압니다. 바로 이러한 견해의 차이로 집착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느냐 아니면 얻지 못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4)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순간의 마음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집니다. 이때의 조건이란 눈이 빛에 의해서 형상이라는 대상과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눈이 없어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빛이 없어도 형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며, 이러한 조건은 바로 대상과 접촉을 통해 일어납니다.
마음은 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독립된 개아(個我)가 아닙니다.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입니다. 이때 순간의 마음은 있지만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이기 때문에 자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귀가 공기에 의해 소리와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귀가 없어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공기가 없어도 소리를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코가 바람에 의해 냄새와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혀가 침에 의해 맛과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몸이 외부의 대상과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은 그 자체가 완성된 모습으로 있지 않아서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마음을 갖습니다. 유익한 대상을 만났을 때 유익한 마음이 생깁니다. 해로운 대상을 만났을 때 해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즐거운 대상을 만났을 때 즐거운 마음이 생깁니다. 괴로운 대상을 만났을 때 괴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대상을 만났을 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마음이 생깁니다. 수행은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그것을 알아차린 마음이 일어납니다. 수행은 보통의 대상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5)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다
마음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한 순간에 두 개의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오직 하나의 마음만 일어납니다. 그래서 즐거울 때는 오직 즐거운 마음만 있습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는 오직 괴로운 마음만 있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을 때는 오직 선한 마음만 있습니다. 불선한 마음이 있을 때는 오직 불선한 마음만 있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을 때는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마음일 때는 온전하게 선한 마음만 있으며 불선한 마음일 때는 온전하게 불선한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영화를 볼 때 어떤 장면이 스크린에 비칩니다. 이때 본 한 장면은 무수한 필름들이 돌아가면서 필름의 한 컷, 한 컷이 모여서 장면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때 필름의 한 컷은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에 두 개의 컷이 존재할 수 없듯이 마음도 한 순간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은 조금 전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지금 이후의 마음이 모두 다른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한 순간의 마음을 나라고 하면 사실 나는 매순간 태어나고 죽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찰나 간에 있으며 그 찰나에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현재 한 순간의 마음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한 순간이 두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순간은 현재입니다. 지혜는 오직 현재의 한 순간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한 순간의 진실입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은 선한 행위를 해서 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해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습니다. 인간이 행복할 때는 행복한 과보를 받아서 생기게 되며, 불행할 때는 불행한 과보를 받아서 생기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것은 선심과 불선심이 섞이지 않은 과보의 영향입니다.
괴로움을 겪는 것은 괴로움의 과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때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수행을 한다면 불선 과보가 아닌 선과보가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선한 행위를 해서 선과보를 많이 만들면 불행할 때도 선과보가 일어나 선한 결과를 얻습니다. 가장 선한 과보를 받는 것이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선 과보가 많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6)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마음이 있어서 이끕니다. 몸이 만들어지는 것도 먼저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마음에 의해 생긴 업이 있어야 하고, 온도가 있어야 하고, 자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앞에서 이끌어야 몸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몸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마음, 업, 자양분, 온도라는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서 생깁니다.
앞서서 이끄는 마음이 선한 마음일 때는 선행을 하여 선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마음일 때는 불선행을 하여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무엇이나 지은 대로 받습니다. 이때 누가 있어서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이 결과를 만듭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과거에 지혜로운 마음이 있어서 오계를 지키는 행위를 하여 그 과보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음 생에 또 인간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잘못된 마음으로 잘못된 행위를 하면 지금도 짐승처럼 살며, 다음 생에도 짐승으로 태어나서 짐승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과보가 상속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마음에 의해 순간의 윤회가 흐르면 그 결과로 다음 생의 윤회로 이어집니다. 윤회는 흐름, 지속, 상속인데 계속 흘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는 종자가 있는데 이것이 과보입니다.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지면 지금 이 순간도 윤회를 하고, 죽은 뒤에 다음 생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합니다. 이때 내가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과보가 윤회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과거에 무엇으로 살다가 여기에 인간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이런 나는 없습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현재의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유신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너’, ‘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관념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가 원인이 되어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물론 내가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일으킨 과보가 전해져서 그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서 이끌고, 이끄는 그 마음에 따라 행위를 하고, 그 행위는 반드시 과보를 일으킵니다. 이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그것을 지속시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들을 원인과 결과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살고 있다면 과거에 잘살 만한 원인을 만든 것이고, 현재 우리가 못살고 있다면 과거에 못살 만한 원인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원인이란 이 순간에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원인이 되어서 이 과보가 현재에도 좋은 결과를 만들고 다음 생에도 좋은 결과를 만듭니다.
법구경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여기서 마음이 그들을 앞서간다고 할 때 그들은 오온(五蘊)의 색(色), 수(受), 상(想), 행(行)을 말합니다. 그리고 식(識)이라는 마음이 그들을 이끕니다. 그리고 괴로움이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라고 할 때 주인은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소에 의해 끌려가는 수레처럼 앞에서 이끄는 것을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들은 앞에서 이끄는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알아차려서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7) 마음은 무아다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알 때 자아가 있으며, 나의 마음이 아니라고 알 때 무아입니다. 마음에 대한 분석은 오직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무아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아를 알지 못하면 결코 집착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더 이상 이를 곳이 없는 궁극의 진리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 중 최고의 지혜가 나야 완전한 무아를 발견합니다. 지혜는 처음에 무상의 지혜로 시작해서 괴로움의 지혜로 성숙한 뒤에 마지막에 무아의 지혜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무아의 지혜는 수행자가 반드시 이르러야 할 최고의 지혜에 속합니다.
‘무아상경(無我相經)’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때 세존께서 바라나시국에 이시빠다나 니가다의 숲에서 머무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빤짜와끼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라고 부르셨습니다. 비구들은 “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은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하여 물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물질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해도 물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느낌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느낌이 나라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하여 느낌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느낌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해도 느낌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지각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지각이 나라면 이 지각은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하여 지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지각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해도 지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의도는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의도가 나라면 이 의도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하여 의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해도 의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의식이 나라면 의식이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하여 의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의식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해도 의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이 항상 하는가? 항상 하지 않는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항상 하지 않는 물질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물질을 ‘이것이 나의 것이다. 이 물질이 나다. 이 물질이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느낌이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느낌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느낌을 ‘이 느낌이 나의 것이다. 이 느낌이 나다. 이 느낌이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각이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지각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지각을 ‘이 지각이 나의 것이다. 이 지각이 나다. 이 지각이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의도는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의도가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의도를 ‘이 의도가 나의 것이다. 이 의도가 나다. 이 의도가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의식이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의식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이 의식을 ‘나의 것이다. 이 의식이 나다. 이 의식이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물질을 ‘이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물질은 내가 아니다. 이 물질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느낌을 ‘이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느낌은 내가 아니다. 이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지각을 ‘이 지각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지각은 내가 아니다. 이 지각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의도를 ‘이 의도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의도는 내가 아니다. 이 의도는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의식을 ‘이 의식은 내가 아니다. 이 의식은 나의 의식이 아니다. 이 의식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을 염오(厭惡)한다. 느낌을 염오한다. 지각을 염오한다. 의도를 염오한다. 의식을 염오한다. 염오하기에 갈애가 없다. 갈애가 없기 때문에 번뇌로부터 자유롭다. 번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번뇌에서 해방되었다고 아는 지혜가 생긴다. 다시 태어남이 다했다. 고귀한 수행을 마쳤다.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이제는 도를 깨달아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해야 할 다른 일은 더 이상 없다고 분명하게 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빤짜와끼 비구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에 매우 만족하여 환희에 차서 받아들였습니다. 세존께서 다른 게송과 섞이지 않은 법문을 하셨을 때 빤짜와끼 비구들의 마음은 집착하지 않아 모든 번뇌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상이 무아상경입니다. ‘무아상경’은 무아의 특징을 말하는 것으로 무아경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아를 알아야만 최고의 깨달음인 아라한의 도과(道果)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때 빤짜와끼 비구들은 이 ‘무아상경’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수행을 하면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습니다. 이때 수다원은 무상, 고, 무아를 얕게 보고, 사다함은 조금 깊게 보고, 아나함은 더 깊게 보고, 아라한은 완전하게 보아서 아라한이 됩니다. 수다원의 도과, 사다함의 도과, 아나함의 도과, 아라한의 도과는 똑같이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집착을 끊고 열반을 성취합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빠르게 아라한과를 성취하는데 이는 선업의 공덕과 바른 정진에 의한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아라한도 빠르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도과를 거쳐 아라한에 이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과가 결정되는 것은 무아를 얼마나 완전하게 아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무아를 아는 것에 따라서 집착을 끊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알고, 그 뒤에 무상을 안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찰하고, 그 괴로움이 자기 뜻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아의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무아의 진리를 보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유신견이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업을 생성하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고,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오온을 염오한다는 것입니다. 염오는 싫어서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나면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염오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 염오가 일어나기 때문에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만 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은 온갖 오염들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우리는 자유로운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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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합니다
방일하지 않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