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있어서 민족이라는 단어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단어는 가족일 것이다. 수십년 동안 헤어져 있는 남북 이산 가족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루는 장면을 보며 우린 가슴 뭉클해지고,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또 어릴 때 외국으로 입양되어 부모, 형제들의 얼굴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인(?)이 혈육을 찾는 방송을 보면서 우린 또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가족이란 단어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책을 쓴 이득재 교수는 그 책을 통해 가족이라는 말처럼 너무나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상적인 세계를 한번쯤 뒤집어 보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이득재 교수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말에 숨어 있는 다른 뜻은 없는가 의심해보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눈물을 뿌리게 만드는 것이 혹여 가족이라는 단어의 마력 때문 은 아닐까? 가족은 당연히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 '주의' 가 탄생하고, 가족주의의 마법에 걸려 가족을 위해 애국애족하려고 온 몸을 바치다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유기당한 것이 결국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인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이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국가 또는 사회에서 해야할 너무나도 많은 역할들을 가족들에게 떠맡겨 버린다. 그리고 가족 사랑, 가족의 정, 눈물 과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모두 막아버린다.
수십년동안 못만나던 가족들이 만나서 눈물바다를 이루는 걸 봐라, 니가 그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 이런 메마른 인간들 같으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득재 교수의 말대로 가족의 정은 그런 문제제기 조차 못하게 만들 정도로 우리의 의식에 마법의 성을 구축하고 있고, 이 마법을 풀지 않으면 헤어진 가족은 서로 만들 수 있더라도 한국 '사회'는 영영 '사회' '민주주의'와 만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득재 교수는 호주제폐지운동은 단순히 가부장권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성사 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왜 호주제폐지를 국가 권력과 연결을 시킬까?
국가권력 자체가 남성적이며, 가부장권이란 국가 권력을 대리하여 가족을 통치하는데 사용되는 국가권력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즉 국가가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에게 가부장권을 부여해주고, 그 대신 국가가 할 일 즉 가족의 통치를 아버지에게 위임시켰다는 뜻이며, 가부장권 뒤에는 국가 권력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신성시하고 가족을 떠받들면서 정작에는 국가가 수행해야 할 책임을 가족에게,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에게 온전히 전가시키는 체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득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국가 권력의 희생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 내의 사랑과 애정이 워낙 원초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즉 가정이 가장을 잃어도 가족끼리 보듬어 넘어가야 하는 문제로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경우 국가 권력이 가부장제 뒤에서 하는 일이다. 이것은 국가가 수행해야할 공적인 책임을 가족에게 완전히 전가시키는 국가 체제다. 이것을 우리는 家國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제기를 비약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IMF 이후 꽤 많이 신문지상을 장식했던 '가족동반자살' 사건들은 우리 사회 가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을 덮어두었는지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부모 없이 아이 혼자 살아가기엔 대한민국의 복지상황이 너무 후진적이고, 부모없이 자랄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 잘 알고 있 는 부모들은 대체로 '오죽하면'이라는 동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자식이라도 맘대로 생명을 뺏을 권한은 없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있는 탓에 그 부모들을 일방적으로 탓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야할 필요는 있다.
가족동반자살에 대해 진중권씨는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기서 다시 한번 그 잔인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가장이 자기의 식솔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발상이다. 그 어떤 이유에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생명에 손을 댈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며칠 전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이라는 라디오 프로에 몸이 아파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모를 간병하던 한 소녀가 "정말 짜증날 때 아버지 얼굴에 물을 끼얹은 적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사연을 보냈다.
여기에 대한 반응은 가족동반자살의 경우와 달리 '저런 죽일' 또는 '오죽하면' 이라는 극단적인 두가지의 감상적인 반응이 동시에 나올 것이다. 나이든 분 들에겐 전자의 경우가 많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겐 후자의 비율 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서 신해철씨가 비교적 명쾌한 대답을 했다.
"긴병에 효자 없다. 오죽하면 벽에 똥칠할때까지 살라는 욕이 있겠느냐? 자신이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이타적인 성격이 못된다면 차라리 돈을 벌어 전문간병인에게 맡기는 방법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아버지를 버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면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일을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장애아를 복지시설에 맡기거나, 병든 노인 들을 양로원에 맡기는 일'을 부당하게 비난한다. 집에다 두고 신경질을 내거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시설과 전문인들의 간병을 받게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주위의 시선 탓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우리는 '민족'이나 '가족'이라는 단어를 국가를 위해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의 도피처다'
'알몸 대한민국'의 저자 최상천 교수는 "대한민국의 애국주의는 뒤틀리고 일그러져 있다. 이런 형편인데도 애국주의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별로 없다. 그것이 '미친 애국심'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라면서 핏줄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한국의 밝은 미래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최 교수는 사랑의 리퀘스트, 수재민 돕기 운동, TV의 이웃돕기 프로그램을 '감성시대 고급사기'로 규정한다.
모금운동을 보면 대한민국은 분명 이웃사랑의 천국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모금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 지도 묻지 않고, 선행을 했다는 것만 으로 만족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너는 얼마나 착한 일을 하길래 그러냐? 못사는 사람 하나라도 구제해주는게 나쁜 거냐?"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수 수혜자와 이재민의 일시적인 응급처치 외에 살아가기 힘겨운 수백만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최상천 교수의 말대로 이런 것은 모금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시청자 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 아주 딱한 사람들 몇사람을 골라 시청자의 눈물에 호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수의 아픈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 이 모든 고통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방송은 아픈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거다. 대한민국의 구조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년, 소녀 가장, 가난한 난치병 어린이는 그냥 '불쌍한 아이들'이요. '어둠의 자식들'일 뿐이므로, 방송은 이 아이들을 무작정 불러내 멋대로 동정하고, 눈물바다를 연출하면서 정작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한국인의 '정'이 나쁘다는 거냐고 반문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최상천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이라는 감성은 확실히 사람 특히 아픈 사람을 발견하는 힘이다. 나는 따뜻한 가슴이야말로 사람이 사람답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은 문 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이라는 감성은 아픈 사람을 발견하지만, 왜 아픈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 무작정 얼싸안고, 눈물 흘리고, 몸 사리지 않고 보살피는 것이 정이다. 이런 정은 아픈 사람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그러나 정은 병의 진단과 치료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은 아름다운 덕성이지만, 이성을 움직여야 비로소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
감성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도 3분만 지나면 아픈 사람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코미디 프로그램을 찾아헤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으로 상승하지 않는 감성은 변덕스럽고, 감성의 자극을 받지 않은 이성은 차갑다고 최교수는 주장 한다.
웃기고 울리는 것도 좋지만 인권과 정의를 짓밟는 현실을 이성의 눈으로 정확 하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상천 교수는 "모금 운동은 대한 민국 지도층과 언론이 주도하는 감성시대의 고급 기획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획이 무엇을 노리는가? 이성적으로 접근해야할 과제를 감성적 차원에 묶어 두고,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착한 사람들의 선행에만 떠맡기는 신파극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은 공익을 빙자한 고급사기 라고 단정한다.
금모으기 운동만 해도 그렇다. 할머니들이 꼭꼭 숨겨뒀던 개인적으로 소중했던 패물들이며, 운동선수들이 평생을 뼈를 깍는 고통 속에 보내며 얻어낸 기념품들이 금모으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가에 헌납되어야 했다. 그것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 아닌가? 그 사람들의 추억과 인생과 피와 땀이 서린 물건들이 단지 금 몇돈, 얼마로 환산되는 야만적인 상황을 언론들은 부추겨 갔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이렇게 된데는 내 책임도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숨겨둔 금괴를 내놓 는 부자들과 기득권층은 없었다. 그거야말로 단지 돈으로만 환산될 수 있는 건데도 말이다.
이 고급사기가 연출되는 동안 국가와 부자들은 나라사람(국민)들의 생명과 인권 을 보호하기 보다는 살벌한 무한 경쟁 전장으로 몰고 가고, 자신들은 투기와 탈세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최상천 교수는 대한민국은 부자들에게는 환락의 천국,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눈물의 땅이라고 규정한다.
9살 먹은 우리 딸이 수재민 모금을 보면서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지들이 대책을 수립할 생각을 해야지. 맨날 시청자들을 보고 돈을 내래'
저 말이 정답이 아닐까 생각을 해봤다. 물론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우린 언론가 국가가 주도해왔고,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의 댐도 그랬고, 금모으기 운동도 그랬고...
최보은씨도 쾌도난담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사회가 호도하는 방법은 효의 문제를 개인차원 으로 극대화해서 문제를 가려버리는 거야. 개개인의 실천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까지 모든 걸 개인의 미덕 차원으로 환원해 <조선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올린다구. 그러면 우리 모두 너무 흐뭇해서 역시 사회가 잘 굴러가고 있군. 아직 인정이 살아 숨쉬는 사회야. 못 배운 서양놈들이나 부모를 양로원에 갖다버리지, 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거든. 다만 고통스럽게 견디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데 미담은 그 문제를 모두 덮어버려"
우린 사회보장이 절실한 1천만명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 가운데 몇천명을 후원해주고, 동정을 보내면서 인정많은 나라라고 자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 동안 독재권력에 시달린 탓에 우리 국민들은 국민들이 정당하게 누려야 될 권리가 어디까지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최상천 교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말고 현실을 이성의 눈으로 보자. 우리는 당당한 주권자가 아닌가? 진정한 주권을 요구할 때가 되었다. 아픈 사람일수록 더 철저하게 보장받아야 할 권리이며, 건강과 교육과 직업 문제는 반드시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면서 모금운동 같은 고급 사기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것은 모금운동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막혀 있는 돈의 길부터 터야하는 것이고, 건강, 교육, 직업 문제를 해결하는데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기금의 저수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은 반드시 나라(국가)가 나서서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득재 교수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가족은 신성하지만 가족주의는 불온하다. 가족은 사람들의 원초적인 공동체인 신성할 수 있지만, 가족주의는 국가가 가족에 대해 저지르는 무책임한 폭력의 결과 다. 가족의 해체와 붕괴를 한탄하는 것은 가족을 성적으로 독점하려는 도덕주의자 거나 국가의 무책임성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족이라는 원초적인 관 념을 이용하여 가족을 가족 '주의'로 둔갑시켜 버리는 가국 체제다. 우리의 국가체 제는 가족=국가라는 등식의 가면을 뒤집어쓴, 국가 '주의' 체제다. 따라서 가족주의 는 곧 국가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이 점을 깊이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한다"
이제 가족에 모든 책임을 지우는 국가(또는 기득권)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하지 않을까? * 홍세화씨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수>에서 '정의 문화'를 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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