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 외 9편 / 민구식
메뚜기
천 원 내고 모닥불에 언 날개 말리는 새벽 여섯 시
봉고차 한 대 바삐 선다
“도비 다섯! “
우르르 몰려간 무리
나이 많은 두 명은 못 타고 돌아선다
더블 캡 한 대 급정거 한다
“비닐하우스 정구지 일곱! “
앞자리 둘, 뒷자리 여섯 억지로 구겨 타니
차 주인 껄껄 웃더니 여덟이 타고 쌩~
그렇게 도배 조공 둘
모델 하우스 청소 다섯이 또 떠나고
모닥불도 꺼져 가는데
남은 열다섯, 아줌마 셋이
동지 해 뜨는 것을 힘없이 바라본다
가방 메고 돌아 서려는 데
“야~! 이 뉘고, 덕만이 아닝겨? “
승합차에서 내린 동창 친구
힘주어 악수하고 부둥켜안고 ~
“웬일이고?”
“ 내사, 공사 하나 안 땄나 “
승합차 앞자리에 앉은 김씨에게
“덕만아, 인자 내 따라 댕기자 잉? 메뚜기도 한 철 아이가”
오늘이 마누라 생일인데 ··· 눈물이 글썽인다
효자 시장*에서
약국 앞 모퉁이를 도는 바람 세차다
시래기 말린 것 같은 물기라곤 없는 할머니가
물미역을 건져 놓다 말고
긴 털 부츠를 신고 서성이는 여자 올려다보며
“아가씨 내가 직접 만든거여~!”
촌 두부가 맛있다고
청국장 이천 원에 지고추(고추 장아찌)를 덤으로 준다고,
시린 양손으로 자신의 무게를 흔든다
아가씨 아닌 여자는 할 줄 아는 반찬이 아닌지 설레설레 외면한다
덕장 과메기에 달려드는 찬바람처럼
벗겨지고 마른 육체에 남은 통증
속곳 펄럭이는 허리춤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내
진통제와 파스를 사는 손이 뻣뻣하다
어두워지는 골목시장
무말랭이 같은 인생이
낡은 목판木板 검은 무장아찌 위로
혼자 있을 나 어린 손녀가 어린다
작업복
남루함에 걸치는 또 하나의 남루
새벽을 여는 동행
게으르기도 막막하기도 한 또 하나의 나
무릎이 닳아간다
꿇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는
낮은 자세에 익숙한 바지는
주인을 외면한 채 꿇어 있다
작은 못 하나에 휘어진 육체 매달린 채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측은한 쓴 내음을 맡는다
날마다 내 시간만큼 낡아가는
쇠잔한 고픔이
오늘은 내 곁에 누워 함께 잠들어 있다
영일만의 아침이
날개를 단다
거대한 대장간
쇠의 무게는 천만년 시간의 무게
번민이 성분 미달의 철광석으로 남아있어
천만번의 풀무질로도
타지도, 철들지도 못하고
석재(石災)로 굳는가?
불덩이와 화합하지 않으려는 보속(補贖) 40년
용광로는 나보다 시원한 것이었습니다
저 뜨거움 속으로 뛰어 들어 태워버리지 못한
지독한 에고가 되어가는 그 잘난 깃발에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소금기만 남아 찌든 낡음
구멍 뚫리고 해진 작업복을 어르며 보낸 인고
이 길이 아니면 길이 없는 것처럼
쇳물 흐르는 탕도(湯道)를 넘나들 듯이
이 길 저 길 더듬지 못한 어리석은 화상火傷
내 몸의 흉터는 모두 타협을 거부한 흔적
뒤 돌아 볼 새 없었던
속도의 현장을 인화印畵시켜 본다
남은 구간 천천히
침 묻힌 몽당연필에서 철을 찾는다.
완행열차를 타고
열차는 나를 이끌고 시간 위를 규칙음(音)으로 달린다
헐떡이며 달려온 궤도
노곤한 전봇대
흐릿한 시선의 먼 산들 빠르게 지나간다
초췌하고 지친 얼굴로
밖에서 창 안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시선
주름 사이로 발자국 짙은 무게를 흔들며
무표정한 밖의 눈과 마주친다
오르막길을 벗어 날 수 없던 숨가쁨
내 밖에서 나를 들여다 본 시간이 얼마나 될까
통과하지 못한 고난의 굴레 속에 머문 꿈이 저물고
아직도 오르막 길 위에서 헐떡거린다
수정할 기회조차 없는 궤도
시간은 바퀴를 정비하지 않는다
길 위의 육체는
관성을 보태기만 했지
충전의 멈춤을 몰랐다
굴 밖으로 나온 붉은 노을이
남자의 퀭한 눈을 짙게 들여다본다
과녁
우산을 쓰고
구름다리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허술한 나를 통과한 화살촉
동심원 가운데 꽂히며
‘명중이요’ 하고는 사라진다
거부를 겹겹이 쌓은 삶이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심장이다
수면이 주름을 펼치면
하늘이 다 들어가고
바람도 깊게 들고
닫은 속 활짝 여는데
수면만 보고 맘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
숱한 중심을 헤며
무너지지 않으려는 고집
저녁이 되니
두꺼운 나이테 얇아져 간다
고집
날 닮은 놈이 걸어간다
머리가 무거워 늘 두통을 앓던
세상을 망치처럼
도끼처럼 부수려고만 했던
미완의 돌이 가고 있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빈손은
허공을 헤매는 날개 짓
무식한 돌이 가고 있다
가끔 두드려 보는 내 상반신에서는
아주 단단하게 화석이 된 울음이 들어있다
유혹 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무거움은
허둥거리는 춤
불균형은 넘어지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아직도 조각되고 있는 자위
구자의 눈
눈이 안 보이는 구자가
저녁 먹고 등불 들고 마실 왔습니다
"구자야! 왜 불을 들고 다니니?"
"내가 어둔 데서 나타나면 사람들이 놀라는 것 같아서요"
문설주에 귀 대고 밖을 듣던 구자
“배태할아버지 오시네요”
그러고 잠시 뒤면 배태할아버지 들어오십니다
“제수리 할머니 도라지 한 바가지 들고 오시네요”
모두들 도라지 까려고 둘러 앉아 기다립니다
낯선 새소리 듣고
산새가 동네로 내려왔으니 곧 눈이 올 거라고 말해줍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보다가 말없이 그림만 보일 때
얼굴이 붉어지기에 넌지시 물어보면
"아마 사랑을 하고 있나 보네요"
사랑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어둠이 없는 조용한 구자
어디쯤에서 내리는 눈雪을 보며
귀를 세우고 있을까요
구두 뒷굽
신기료 할아버지 돋보기가 무겁다
커다란 우산 아래서 하얀 샤시로 바뀐 반 평짜리 하꼬방
발 냄새를 맡으며 구부려 밑창을 뜯어낸다.
슬리퍼 속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흘끔 바라보고
“신발을 보면 주인 성격도 보이지,
성질이 급한 놈 신발은 상처가 많구
무거운 놈 신발은 고달프고, 끌고 다닌 놈은 게으르지”
“그렇겠군요”
문 안으로 들어와 보지 못한 생이
수술대 위에 엎드려 있다
각지게 폼 잡아 주던 날
제 몸을 갈아내면서 주인의 비위 맞추며
보폭을 잃어버린 남루함이
망치질을 당하며
초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겨울밤
설은 눈 위로 차가운 바람 주름잡고
훤한 달이 하얀 색칠을 하는 새벽
아버지 마실에서 돌아오실 때쯤
바둑이는 벌써 그 집 사랑채 앞에 가서
아버지 신발을 깔고 앉는다
느티나무 아래쯤에서
앞서가던 바둑이 뒤 돌아 기다리면
“그려 그려, 술 한잔 했다 이놈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루의 무늬를 닫으며
달도 함께 집으로 간다
사랑채 부뚜막에 자리 잡아주고
토닥토닥 어루다 사랑채로 드시고
코고는 소리에 바둑이도 잠이 든다
세상의 소리도 소리 없이 고요 속으로 들어가면
먼 곳에서 닭이 운다
■ 시작노트 ------------------------------------
지나온 날은 다행이고 살아갈 날은 막막하다
노동은 신성하지만 삶은 고달프다
거대한 대장간에서 보낸 40년
쇠가 녹는 온도보다 더 높은 열정으로 쇠를 녹이며 산 세월 속에 나는 어떤 무늬였을까?
흉터를 훈장처럼, 작업복을 군복처럼,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 마냥 흉터를 어루만지며 회상에 잠긴다. 지저귀는 예비군의 무용담을 누가 들어줄까? 벌레 먹은 잎처럼 살았지만 쇳물 반평생 스스로에게 박수를 친다
고향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힘겨웠던 여름의 노동을 복기復棋하며 휴식은 재 창조였듯이 은퇴 또한 새로운 시작이다.
몽당연필 눌러 쓰면서 철든 삶을 복기復氣하고 싶다
ㅡ『우리詩』 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