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임금의 내심이 담긴 단종과 영월에 대한 헤아림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조대 端宗 사적의 정비와 『莊陵史補』의 편찬
목차
1. 개 관
2. 서지사항
3. 편찬배경
1) 숙종~영조대 단종 추복과 諡爵 表裝
2) 정조의 子規樓 重建과 配食壇 건립
4. 편찬 경위와 서지
1) 『莊陵誌』 개찬과 『莊陵史補』 편찬
2) 정조의 계술 이념과 『莊陵史補』 편찬의 의미
1. 개 관
숙종대 250여년이 지난 死六臣과 端宗을 전격적으로 追復한 것은 換局이라는 정치 변동 속에서 신료들에게 ‘君臣의 分義’를 표상함으로써 국왕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하고 世子의 정치적 입지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정, 2004 「숙종대 端宗 追復의 정치사적 의미」, 『韓國思想史硏究』 22) 이것은 先王의 사업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繼述’ 이념을 매개로 영조에게로 계승되었다.
영조는 숙종이 세조의 癸酉靖難 공훈에 관계된다는 이유로 끝내 거부하였던 三相(皇甫仁·金宗瑞·鄭苯)의 추복을 전격 단행하였고, 安平大君 등 단종과 관련하여 화를 입은 왕실 자제들을 추복하였다. (윤정, 2004 「英祖의 三相 追復과 ‘善述’이념」, 『韓國學報』 116)
이로써 癸酉靖難과 단종 복위시도 등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던 사람들에 대한 추복은 하나의 당위로 굳어졌다.
또한 生六臣 등 단종에 대해 충의를 지킨 신하들도 국왕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들로 표상되었다.
이로부터 각지에서 단종에게 충절을 지킨 인물들의 사례를 발굴하고 이들의 追復과 旌閭, 贈諡 등을 청원하는 상소가 이어지게 되었고, 국가에서도 검토를 거쳐 이를 수용하여 나갔다.
이러한 추세는 정조대에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조는 선대에 추복이 이루어진 주요 인물 외에 단종에게 충의를 지킨 여러 신하(이하 ‘端宗 諸臣’으로 약칭함)를 발굴하고 표장하는 사업을 이어가는 한편, 子規樓와 配食壇 등 단종의 사적들을 복구하고 설치하여 나갔다.
또한 단종과 관련된 기존의 사적을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해 나갔다.
이 작업은 기존에 私撰으로 단종 사적을 정리한 『莊陵誌』를 改撰하는 작업으로 시작되어 『莊陵史補』(王命編)의 편찬으로 귀결되었다.
이 작업은 1791년(정조 15)에 시작되어 곧바로 완성을 보지 못하고, 1796년(정조 20)에 이르러서 완성되었다.
현재 규장각에는 정조대 단종 사적의 정비와 『莊陵史補』 편찬 과정에서 만들어진 다수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어 그 과정의 전말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⑴ 『莊陵誌』 (奎 3653, 3683, 一簑 古 393.1-B148j)
⑵ 『莊陵配食錄』 (奎 5489, 奎 7878)
⑶ 『(改撰)莊陵誌』 (奎 12873)
⑷ 『莊陵事略』 (奎 7780)
⑸ 『莊陵誌補初稿』 (奎 1944)
⑹ 『莊陵史補』 (奎貴 3684)
⑺ 『莊陵謄錄』 (奎 12974)
이외에 단종 사적을 담은 자료로서 탁본 자료로
『子規樓記』 (奎 10120, 奎 10114, 奎 10130, 奎 10287)와
『子規樓上樑文』 (奎 10235, 奎 10281),
『莊陵靈泉碑』 (奎 10189, 奎 10253) 등이 있다.
이들의 내용은 상기한 자료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는다.
2. 서지사항
1) 『莊陵誌』
尹舜擧가 편찬한 『魯陵誌』를 저본으로 하여 朴慶餘(박경여)와 權和(권화)가 내용을 보충하고 단종 추복 후의 사적을 덧붙여 1711년(숙종 37)에 간행한 책이다.
모두 4권 2책이나 <一簑 古 393.1-B148j>본은 제1책만 남은 零本이다.
『魯陵志』는 寧越郡守로 재임하던 尹舜擧가 郡衙에 소장되어 있던 『魯陵錄』을 보고 이를 저본으로 내용을 보충하여 1663년(현종 4)에 편찬한 책이다.
그의 발문에 따르면 한 부를 정리해서 재실에 비치했을 뿐 따로 간행되지 않았다.
『魯陵錄』과 『魯陵誌』 원본은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편찬자인 박경여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9대손으로, 단종 복위에 따라 莊陵參奉으로 탁용되어 淸河縣監을 지냈다.
권화는 그 사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南鶴鳴의 서문에 따르면 그를 ‘中記 權和’로 지칭하고 있어 박경여가 재임하던 청안현의 향리로 추정된다.
崔錫鼎의 後序에서 박경여가 녹봉을 털어 간행했다고 하였으나 『莊陵史補』의 凡例에서는 ‘勸化의 莊陵誌’로 언급하고 있다.
권두에는 1709년(숙종 35) 南鶴鳴이 쓴 서문과 목록 및 凡例가 있다.
범례는 모두 4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綱目體의 형식에 따라 정리한다는 것, 자료의 출처를 그대로 표기하되 서로 어긋나는 것은 註로 설명해 두었다는 것, 각 說에는 그 출처가 되는 이름을 적되 알 수 없는 경우는 비워 두어 후일에 添錄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 舊誌(윤순거의 노릉지)에서 빠진 것은 연조에 따라 추록하였으니 이후에 같은 방식으로 추가할 것을 바란다는 것 등이다.
이어 記事의 出處를 정리한 목록이 있는데 金石文 외에 李墍의 『松窩雜說』을 비롯한 35건의 書目을 적었다.
권1과 권2는 ‘舊誌’로서 권1에는 事實·墳墓(昭陵·貞洞附)·祠廟·祭祝,
권2에는 祭祝·題記·附錄의 항목이 실려 있다.
『노릉지』의 내용을 전재한 것이나 보충한 부분은 ‘보유’로 표시하여 삽입하고 있다.
「事實」은 단종의 출생 이후 단종과 관련된 제반 사적을 정리한 것이고,
「墳墓」는 단종의 묘에 대한 사항을 정리한 것이다.
부록된 「昭陵」은 단종의 모후인 顯德王后 權氏의 묘로서 세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중종 때 복위되는 시말 등을 정리하였다.
「貞洞」은 단종비 定順王后 宋氏에 관련된 사적을 정리한 것이다.
祠廟는 단종의 사당에 대한 내용이고,
祭祝은 단종에 대한 제사와 관련된 儀節과 物目, 祝式 등을 정리한 것이다.
권2의 祭祝은 단종에 대한 제사를 정리한 것이고,
題記는 단종을 추념한 시문을 모은 것이다.
附錄의 사육신의 전기인 「六臣傳」과
남효온이 피화된 사적을 정리한 「戊午士禍」, 그리고 단종과 남효온을 소재로 한 소설인 「元生夢遊錄」이 수록되어 있다.
「六臣傳」에는 사육신 외에 허후 및 남효온을 비롯한 8명의 전기가 함께 수록되었다.
권말에는 尹舞擧의 발문이 있다.
권3은 ‘續誌’로서 『노릉지』 편찬 이후 단종이 복위된 전말을 정리한 것이다.
「복위」의 계기가 된 1698년(숙종 24) 申奎의 上疏와 諸臣의 收議, 국왕의 傳敎와 備忘記를 정리하였고, 아울러 복위에 따른 謚冊文과 장릉·사릉의 丁字閣上樑文, 祔廟祝, 頒敎文 御製詩와 祔廟都監과 象設都監 관원들의 題名序 등을 수록하였다.
이어 복위를 기린 「莊陵感詩」 8수가 있다.
권4는 附錄으로 사육신의 복관 전말을 정리한 「六臣復官」과 六臣祠, 愍節書院, 綠雲書院, 洛濱書院 등 이들을 제향하는 사우에 대한 事略이 수록되어 있다.
말미에는 책의 편찬 및 간행 경위를 정리한 崔錫鼎의 後序가 있다.
2) 『莊陵配食錄』
莊陵에 配食된 신하들의 명단과 略傳을 정리한 책으로 1791년(정조 15) 왕명으로 편찬되었다.
당시 정조는 莊陵 곁에 壇을 만들어 단종에게 忠節을 지켰던 諸臣들을 제향하면서 그에 수반하여 正壇과 別壇에 祭享된 諸臣들의 간략한 전기와 致祭禮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正壇에 배식된 인원은 32인, 別壇에 배식된 인원은 236인이다.
卷上은 서두에 제단을 만들게 된 의미를 정리한 정조의 글이 있고,
이어 正壇 32인의 명단과 略傳이 수록되어 있으며,
卷下는 別壇에 제향되는 사람들을 정리하였다.
고증이 이루어진 부분은 약전 뒤에 ‘按’이라 하여 고증 내용을 정리하였다.
卷末에는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식하도록 한 정조의 명령을 수록한 「莊陵朝盡節諸臣配食傳敎」와 배식에 포함될 대상자를 선정하는 대 대한 신하들의 의견에 대한 정조의 비답을 수록한 「配食諸臣取舍收議批答」이 있는데, 여기에는 李福源·蔡濟恭의 收議가 부록되어 있다.
3) 『(改撰)莊陵誌』
단종에 관련된 사적을 정리한 책이나 박경여와 권화가 편찬한 『장릉지』와는 내용이 다르다.
玉堂本이라는 藏書記가 있으나 1책만 남아 있는 영본으로서 서발이 없어 편찬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수록 내용이 정조 연간을 포함하고 있으나 『莊陵史補』에 비해 소략하다.
이로 보아 『莊陵史補』 편찬에 앞서 정조가 『장릉지』를 개찬하도록 명한 데 따라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莊陵謄錄』의 編書始末에 따르면 鄭景祚의 上疏로 『莊陵誌』의 改撰이 결정되고,
1791년 5월에 尹光普·鄭厚祚·朴奎淳 등과 李義鳳이 각기 『莊陵誌』를 찬진했으며,
李書九와 朴基正이 이를 校正 검토하였다고 한다.
이 때 윤광보 등이 찬진한 책은 지체를 따른 것으로서 권수에 圖說이 있고 이어 事實·復位·壇壝·遺蹟·題記와 附錄(2編)의 6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이의봉은 편년체로 찬술한 것으로서 端廟始末을 기록한 紀年 2편(1421~1469)과 장사양릉숭봉사실, 제신포증은교 및 배식단 건립을 정리한 續編 3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목을 나누어 고열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이 중 윤광보가 편서한 것의 체재가 본서와 일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본서는 당시 윤광보가 개찬한 장릉지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서의 서두에는 14개 조로 된 凡例가 있다.
범례의 주요 내용은 1539년(중종 34) 李若氷이 魯山君의 立後를 상소한 일까지 수록했다는 것과 『國朝寶鑑』과 實錄에 의거하여 방증하였다는 것, 製進文은 반드시 글 쓴 사람의 성명을 기입하였다는 것, 褒贈 인사는 부록에 소재하고 諸臣의 사적은 중복을 피했다는 것 등을 밝혔다.
범례에 이어 인용 書目과 목록이 있다.
목록에는 圖說이 있으나 본문에는 실려 있지 않다.
권1의 「事實」은 단종 및 단종비에 직접 관련된 사적을 정리한 것이다.
부록된 「立後議」는 중종대 노산군의 立後 논의를 정리한 것이고,
「修墓」는 역대 국왕이 단종의 묘를 수리한 사적을 기록한 것이며,
「建祠」는 역대 국왕이 단종의 사당을 건립한 사적을 정리한 것이다.
권2의 「復位」는 노산군을 다시 왕으로 추복할 것을 요청한 상소와 그것이 실현되기까지의 사적을 정리한 것이다.
부록한 「祔廟」는 端宗의 복위를 宗廟에 고하고 永寧殿에 봉안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며,
「封陵」은 추복 후 단종과 비의 묘를 莊陵과 思陵으로 봉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결본인 권3 이하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권3 : 壇壝, 遺蹟(昭陵遺事, 子規樓, 淸泠捕, 淨業院), 題記(肅宗大王御製, 英宗大王御製, 當宁御製, 諸臣詩文),
권4(附錄) : 褒贈, 祠院(彰節祠, 附 愍忠祠, 愍節祠, 綠雲書院, 洛濱書院, 錦城壇, 各邑鄕賢祠)
권5(附錄) : 諸臣錄(癸酉諸人, 丙子諸人, 丁丑諸人, 隱遁及不仕諸人)
4) 『莊陵事略』
端宗과 관련된 사적을 실록 등에서 추출하여 정리한 책이다.
표제는 ‘實謄出別單’이라고 되어 있으며, 그 오른쪽에 붉은 글씨로 ‘莊陵事略’이라고 後寫되어 있다.
필사본으로 서발이나 범례가 전혀 없어 그 성격이나 편찬 시기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데 『莊陵史補』의 ‘編書始末’에 따르면 장릉지 개찬 때 尹光普 등이 찬진한 것과 李義鳳이 찬진한 것의 두 초고본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정조실록에 따르면 각기 志體와 編年體를 채택하고 있었다.
이 중 윤광보가 찬진한 것이 바로 『(改撰)莊陵誌』(奎 12873)로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이의봉이 찬진한 것도 그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본서의 내용은 英祖 甲寅年, 곧 1734년(영조 10)부터 정리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정조 연간까지 시간 순서로 기술되어 있고, 「자규루기」를 비롯한 記文이나 祭文 등 관련된 글들이 각각에 부록되어 있다.
이것은 『장릉사보』의 편서시말에서 이의봉이 찬진한 것에 대해 언급한 것과 부합한다.
이로 미루어 본서가 바로 이의봉이 찬진한 또 하나의 개찬 장릉지일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영조 10년 이전의 사적도 있었을 것이므로 본서는 당초에 찬진된 것 중 후반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의 1~2책 정도가 결본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표지 서명은 본래의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윤광보와 이의봉이 찬진한 것은 일종의 시안으로서 정식 장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장릉지’ 외에 별도의 서명이 부여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實謄出別單’이라는 서명은 본서 말미에 숙종 때의 실록 고출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며,
‘莊陵事略’이라는 서명은 실제 책의 내용이 실록 고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수정된 것이라 짐작된다.
5) 『莊陵誌補初稿』
기존 목록과 해제에서는 『장릉사보』에 포함되어 있다.
표지서명이 ‘莊陵誌補初稿’로 『장릉사보』 완성에 앞서 작성된 초고로 판단된다는 점에서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릉사보』의 「編書始末」에 따르면 윤광보 등과 이의봉이 각기 찬진한 『장릉지』를 이서구로 하여금 교정케 하고 영월부사 박기정도 참여케 하였다.
이어 다음 기사인 1796년(정조 20) 5월 11일의 傳敎에 따르면, 장릉지를 편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지 이미 오래되어 李義駿과 尹光普 등의 編役이 거의 탈고되었으나 李書九가 감사로 나간 탓에 교정만 마무리되지 못하였는데, 編置한 본을 보니 하루 이틀이면 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李書九와 李義駿, 朴基正 등으로 하여금 함께 교정하게 하였다.
이튿날 이서구 등이 노릉지 중에 의심되는 곳이 있다고 하자 정조는 鼎足山의 실록을 고출하도록 하였고, 이에 同春秋 金魯永이 고출 내용을 정리한 別單을 올렸다.
그리고 24일에 이서구가 『장릉지』 9권을 완성하여 바쳤는데, 이것이 곧 『장릉사보』이다.
이러한 시말에 따르면 당초에 개찬한 것을 토대로 재정리한 초고본, 곧 정조가 열람하고 금방 교정할 수 있다고 한 ‘編置한 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본서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 이를 토대로 실록 고출 내용을 반영하여 『장릉지』 개찬 최종본, 곧 『장릉사보』가 완성되었는데,
이에 조응하여 본서는 ‘莊陵誌補初稿’로 지칭한 것이라 생각된다.
본서는 紀年(1·2책)·列傳(3책)·續編(4·5·6책)의 순서로 된 6책으로서 『장릉사보』의 上編, 下編, 續編의 체재에 조응하고 있다.
내용은 『장릉사보』의 참조하도록 한다.
6) 『莊陵史補』
1796년(정조 20) 왕명으로 단종에 관한 사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앞서 1791년 5월 왕명으로 李義鳳과 尹光普 등이 편집한 것을 李書九와 朴基正 등의 교정 및 검토를 거쳐 탈고까지 했으나 미처 교정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796년 5월 왕명에 따라 李書九·李義駿·尹光普 등이 다시 교정하고, 鼎足山史庫(정족산사고)의 實錄을 考出하여 보고된 別單을 참조하여 李書九가 최종적으로 『莊陵誌』 9권 3책을 완성하여 바쳤다.
『莊陵謄錄 장릉등록』의 「編書始末 편서시말」에 언급된 책의 체재는 본서와 동일하여 본서가 당시에 완성되어 정조에게 올린 책임을 알 수 있다.
찬진 당시에는 서명을 ‘莊陵誌’라 했으나 ‘莊陵史補’로 바뀐 것은 기존 『莊陵誌』와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본서는 정조대 진행된 단종 사적 정리 사업의 최종 결과물이다.
본서의 서두에는 편찬에 대한 왕명 부분을 모아 정리하였고, 編校 李書九와 參敎 李義駿·朴基正·成大中의 직함이 있다.
이어 전체 목차를 정리한 總目과 凡例, 引用書目 및 圖說이 있다.
凡例는 모두 7개조로서 편찬 체재와 정리 원칙을 밝혔는데 여기에는 上編, 下編, 類編, 別編의 체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사찬인 기존의 『노릉지』와 『장릉지』와 달리 실록을 위주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다는 것과 관련 제신들은 辛亥年(1791, 정조 15)에 내각과 옥당에서 추출하였다는 것, 자료 사이에 착오가 있는 것은 ‘謹按’으로 표시하여 辨正을 더하였다는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어 引用書目에서는 『魯陵志』·『莊陵志』와 함께 政院日記·實錄·列聖誌狀과 文集 등 74종의 전거 자료를 열거하였다.
圖說에서는 莊陵圖, 思陵圖, 子規樓圖, 觀風軒圖, 淸冷浦圖, 淨業院圖, 彰節祠圖, 愍忠祠圖 등 8개 사적의 모습을 도면으로 그리고 해설을 附記하였다.
본문의 권1은 上篇으로 탄생에서 追復과 封陵에 이르기까지 단종의 사적을 편년체로 정리하였다.
권2와 권3은 下篇으로 諸臣의 사적을 列傳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권2에는 配食忠臣을,
권3에는 死事忠臣과 靖義諸臣(정의제신)을 각각 수록하였다.
권4에서 권6은 類編이다.
권4는 「兩陵崇奉事實 양릉숭봉사실」로, 장릉과 사릉이 崇奉되는 전말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
권5는 「諸臣褒贈始末 제신포증시말」로, 단종에 관련된 신하들을 列傳의 형식에 따라 정리한 것으로서 旌閭·贈職·配食 등의 사실을 수록하였다.
권6은 「雜綴 잡철」로, 단종 및 사육신 등에 관련된 각종 설화와 전승을 채록하였다.
권7에서 권9까지는 別編이다.
권7은 肅宗과 英祖 및 當宁(正祖)의 御製를 수록하고, 신하가 대신 찬술한 치제문 등은 「諸臣代撰」이라 하여 附錄으로 정리하였다.
권8과 권9는 「諸臣撰述」로서 신하들이 단종 및 그 사적과 관련하여 지은 각종 序跋(서발)과 詩文 등을 모아 놓았다.
7) 『莊陵謄錄 장릉등록』
1796년(정조 20) 기존의 『정릉지』를 개찬하여 『장릉사보』를 완성한 뒤 정조 연간에 진행된 사적 정비와 책의 편찬 과정을 정리한 謄錄이다. 정조의 왕명으로 진행된 단종 사적 정리 사업의 총 결산에 해당한다.
제1책의 권1은 陵寢崇奉, 권2는 諸臣褒贈 上,
제2책의 권3은 諸臣褒贈 下, 권4는 配食事實 上,
제3책의 권5는 配食事實 中, 권6은 配食事實 下, 권7은 編書始末로 구성되어 있다.
「陵寢崇奉」은 莊陵의 修改, 莊陵·思陵의 祭祀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子規樓·觀風軒·淸泠浦·靈泉 등 관계 사적의 重建 기록이 덧붙여 있으며,
「子規樓記」, 「子規樓上樑文」, 「觀風軒重修記」, 「靈泉記」 등도 실려 있다.
「諸臣褒贈」은 정조 연간에 이루어진 단종 제신에 대한 贈職과 贈諡(諡狀을 부록), 致祭, 旌閭에 관한 내용과 彰節祠의 免稅·확장 및 愍忠祠의 修改 등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配食事實」은 莊陵에 配食壇을 건립한 경위, 正壇·別壇에 제행된 인물의 명단, 御製祝文과 儀式, 執事의 명단, 設壇할 때의 別單과 節目, 追正節目 등이 실려 있다.
「編書始末」은 『莊陵誌』 改撰 과정을 정리한 것으로 교정 과정에서 史庫의 실록을 考出하여 보고한 別單이 함께 실려 있다.
이로 보아 본서는 『莊陵史補』가 완성 뒤 멀지 않은 시점에 사업의 결산 의미에서 정리된 것으로 이해된다.
정조 연간에 이루어진 제반 표장 사업의 전말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3. 편찬배경
1) 숙종~영조대 단종 추복과 諡爵 表裝
정조의 『莊陵史補』 편찬은 단종 사적을 재정리하는 작업의 최종 결과물이며, 이는 정조가 추진한 사적 정비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숙종대 단종이 추복된 이래 영조대를 거치며 진행된 단종 사적 표장 사업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정조의 사적 정비와 정리 사업이 진행되는 배경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숙종~영조대에 진행된 단종 추복과 사적 표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종 추복은 사육신 추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육신은 南孝溫의 「六臣傳」 이래 節義의 표상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나 추복 문제가 정계의 논의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이 문제가 세조의 즉위와 연관된 것으로서 그의 혈통을 이은 후대 국왕의 입장에서 논의하기 어려운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노산군의 경우, 중종대 이래 官의 致祭가 간헐적으로 행해졌으나, 상시적인 것은 아니었다.
1680년(숙종 6) 李選이 상소하여 사육신의 復官을 건의했으나 숙종은 列聖朝에서도 죄를 용서한 적이 없음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노산군이 正妃의 소생이라 하여 ‘大君’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사육신을 전격적으로 추복하였다. 숙종은 노량을 건너며 사육신의 묘를 보고 절의에 감동하여 치제하도록 한 데 이어 전격적으로 복관을 명하였다. 사육신 추복은 그 군주인 노산군의 추복을 유발하여 1698년(숙종 24)에 이르러 실현을 보았다. 申奎의 복위 요청 상소를 계기로 숙종은 정계의 폭넓은 의견을 거쳐 추복을 실행하였다.
이어 三相에 대한 복관도 논의되었으나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세조의 靖難勳에 관계된 것이라는 점과 삼상과 사육신을 동일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 등의 후손이 조상의 신원을 요청했을 때, 영조는 처음에 난색을 표하였으나 곧이어 世祖의 『訓辭』의 내용을 근거로 전격적으로 추복하였다. 그리고 『訓辭』의 本文과 序跋에 자신의 발문을 덧붙여 『光廟御製訓辭』를 간행하여 그 의미를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安平大君과 漢南君 등 종실들을 차례로 추복하였다.
단종과 제신에 대한 추복이 단계적으로 실현됨에 따라 그와 관련된 사적에 대한 정비도 함께 이루어졌다. 1698년(숙종 24) 단종의 묘를 封하여 莊陵이라 한 뒤, 莊陵改修都監을 설치하여 능에 대한 개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1733년(영조 9)에는 尹陽來의 건의에 따라 장릉에 비석이 건립되었다. 이 작업은 이 해 초에 입비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1758년(영조 34)에는 영월의 장릉 및 육신 관련 사적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있었다. 이 때 장릉을 봉심하고 돌아온 洪象漢이 장릉 영내에 있던 死六臣의 彰節祠를 이전할 것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사당을 옮기지 말도록 조치하고 사육신과 삼상에게 충자의 시호를 내렸다. 1763년(영조 39)에는 李溵의 건의에 따라 淸泠浦에 비를 세웠다.
단종 사적과 함께 부인 송씨의 사적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졌다. 1770년(영조 46)에는 雲南君 李榗의 상소에 따라 장릉에 준하여 思陵에도 비를 세웠고, 이듬해에 영조는 송씨가 거처하던 淨業院의 옛터에 樓閣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淨業院舊基’ 다섯 글자를 써서 내렸다.
2) 정조의 子規樓 重建과 配食壇 건립
단종 사적의 정비 작업은 정조대 들어 더욱 활성화되었다.
1777년(정조 1) 河緯地의 閭門에 旌表한 데 이어
1779년(정조 3)에는 사육신과 함께 죽은 趙哲山을 정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781년(정조 5)에는 趙重晦(조중회)의 상소에 따라 그의 선조 趙旅(조려)를 贈諡(증시)하도록 하였다.
1787년(정조 11에는 成熺(성희)를 忠賢書院에 추배하도록 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權山海(권산해)의 관작을 복구시키는 등 단종 제신에 대한 褒贈(포증)을 확대해 나갔다.
이와 더불어 영월의 단종 사적에 대한 정비 작업이 이어졌다.
정조는 1788년(정조 12)에 莊陵 洞口의 六臣祠 건물이 퇴락한 것을 수리하고 致祭(치제)하도록 하였다.
이어 1790년(정조 14)에는 포증이 실행되지 않고 있던 永豊君의 묘를 수리하고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정조의 사적 정비 사업은 1791년(정조 15)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해 정월 정조는 鷺梁을 지나면서 사육신의 묘와 四忠祠 및 朴泰輔의 서원에 대해 직접 글을 지어 近臣을 보내 제사를 지냈고, 단종 복위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申奎의 후손을 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이어 錦城大君과 和義君, 漢南君 등의 후손을 불러 접견하고 그 奉祀孫을 등용토록 하였다.
이어 2월에는 徐榮輔와 趙鼎鎭 등을 강화도에 보내 『世祖實錄』을 상고하여 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館閣으로 하여금 단종 제신의 사적을 상고하도록 명하였다가 실록에서 상고하는 것이 보다 구체적일 것이라는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뒤이어 강원도관찰사 尹師國이 子規樓를 중건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윤사국이 영월에 이르러 중건할 계획으로 그 터를 찾았으나 이미 매몰되어 알 수 없었는데, 마침 화재가 발생하여 객사 남쪽에 있던 민가 5채가 소실되면서 누각의 터와 계단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자규루가 중건되었는데, 경연관 李晩秀(이만수)가 이를 아뢰자 정조가 윤사국에게 下諭(하유))하여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정조는 이것이 실록을 상고하게 한 자신의 조치와 우연치 않게 부합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누각 중건을 국고에서 지원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李福遠에게는 그 일을 기록하도록 하고 蔡濟恭과 洪良浩에게는 상량문을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 글이 「子規樓記」와 「子規樓上樑文」이다. 또 감사에게 자규루의 모양을 그려 올릴 것을 명하였다.
이로부터 보름 후 정조는 莊陵에 配食壇을 건립하였다.
앞서 경기도 유생 黃黙 등이 和義君 李瓔을 彰節祠에 追享할 것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정조는 추배를 허락하면서 이외에도 사육신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므로 이들을 이번에 함께 추배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에 따라 내각과 홍문관에 상고를 위한 자료 수집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온 사관의 보고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정조는 『御定配食錄』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곧 『莊陵配食錄』으로 『弘齋全書』 권60 雜著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정조는 단종 제신을 하나의 祠版으로 만들고 莊陵 홍살문 밖에 터를 잡아 매년 寒食에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함으로써 똑같이 제사지낸다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莊陵에 配食壇이 설립되었는데, 그 의절은 內閣에 비치된 配食錄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고, 그 동안 贈職에서 누락된 사람들에게 증직을 시행하였다.
이어 단종 제신이 절개를 지킨 것은 다 같지만 성과와 귀천의 차이가 있다고 하며 別壇을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忠愍壇(충민단) 등에서 담장은 함께 하면서 祭地는 달리 한 전례에 따라 사적이 자세치 않은 趙遂良 등 8인과 연좌되어 죽은 金承珪 등 190인은 별단에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또한 엄흥도는 31인의 다음 순서에 두도록 하고, 김시습과 남효온은 彰節祠에 추가로 제향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사판의 명칭을 ‘忠臣之位’로 하는 등 세부적인 지침까지 내림으로써 배식단 건립이 마무리되었다.
한편 자규루의 중건이 마무리되자 정조는 자규루 옛터가 나타난 것과 配食을 정한 일이 일치하는 것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박팽년의 후손 朴基正을 영월부사로 제수하였다.
박기정은 『장릉지』 개찬 작업에서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자규루 중건과 배식단 건립은 단종 제신들의 충절을 표장하는 사업의 종합으로서 이에 맞추어 정조는 그동안 수집된 자료를 재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莊陵誌』를 개찬하는 작업이며, 그 결과물이 정조 20년의 『莊陵史補』 편찬이었다.
4. 편찬 경위와 서지
1) 『莊陵誌』 개찬과 『莊陵史補』 편찬
단종 사적의 자료로서 『장릉지』가 처음 주목된 것은 1758년(영조 34)의 일이었다.
당시 장릉을 봉심하고 돌아온 홍상한은 영월에서 『장릉지』를 읽고 이에 대해 언급하였다.
며칠 뒤 영조는 승지에게 『莊陵誌』를 읽게 하고, 숙종의 御製詩에 감흥하여 사육신과 삼상에게 ‘忠’자의 시호를 내렸다.
정조대에 이르러 단종 사적의 정비와 포증 작업이 확대됨에 따라 『장릉지』가 보다 주목되었다.
1780년(정조 14) 許慥를 復官 追贈할 때, 이조는 幼學 許黙의 上言에 따라 覆奏하면서 윤순거의 『장릉지』와 남효온의 「육신전」에 그에 대한 사적이 있음을 근거로 관작을 회복시켜 달라는 청원을 수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곧 『장릉지』가 단종 제신의 사적을 확인하는 핵심 자료로 인정된 것으로, 포증이 확대되는 추세에 맞추어 내용을 증보하고 고증을 더하는 개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1791년(정조 15)의 子規樓 중건이었다.
당시 정조는 단종 제신의 사적을 실록에서 상고하던 중 윤사국이 자규루를 중건하는 일을 듣고 이를 지원하면서 아울러 "고을 안에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있으면 간행본이나 필사본이나 혹은 조각나서 불완전한 글이라도 관계치 말고 陵誌에 실리지 않은 것이 있으면 거두어 모아서 올려 보내라.(『正祖實錄』 권32, 정조 15년 2월 辛亥)"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단종 사적을 문헌으로 재정리하는 작업의 출발이 되었다.
이것이 실상 『장릉지』를 개찬하라는 명령이었음은 같은 해 4월 장령 鄭景祚가 "『莊陵誌』를 개찬하라는 명은 실로 그 사실이 실려 있는 책을 널리 취해서 빠뜨리는 것이 없도록 하자는 거룩하신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正祖實錄』 권32, 정조 15년 4월 癸亥)" 라고 하면서 사릉(정순왕후)의 사적도 함께 정리할 것을 청한 것에서 확인된다.
다만 이 때는 개찬의 필요성을 피력한 단계이며, 실제 공식 명령은 이보다 10일 뒤에 나왔다.
정조는 『장릉지』가 소략하다고 지적하며 玉堂 李義鳳·朴奎淳·尹光普에게 수정 윤색하게 하고, 寧陽尉 鄭悰의 후손인 鄭厚祚가 典故에 익숙하다 하여 함께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이의봉은 編年體를, 윤광보는 志體를 각각 주장하여 각기 책을 찬진하였다.
이에 전 승지 李書九에게 명하여 두 책의 장점을 취해 한 책으로 만들라고 하였으나, 책은 끝내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전술했듯이 『(改撰)莊陵誌』 (奎 12873)는 윤광보가 志體로 개찬한 『장릉지』의 일부로 판단되고, 『莊陵事略』 (奎 7780)은 이의봉이 편년체로 개찬한 것의 일부로 판단된다.
정조는 1796년(정조 20) 다시 『장릉지』 개찬을 명하였다.
앞서 李義駿과 尹光普 등이 명을 받들어 편집하였으나 미처 교정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이들에게 산삭하여 다듬도록 하였다. 『장릉등록』의 ‘編書始末’에 따르면 1791년의 명령에 따라 개찬된 『장릉지』는 이미 탈고되었으나 교정이 마무리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해에 정조가 다시 교정 명령을 내렸고, 실록을 상고하여 보완함으로써 최종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莊陵史補』이다.
2) 정조의 계술 이념과 『莊陵史補』 편찬의 의미
정조가 『장릉지』를 개찬하여 『장릉사보』를 편찬한 것은 자규루 중건과 배식단 건립으로 대표되는 단종 사적 정비 사업과 맞물려 있었으며, 이는 숙종~영조대의 사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숙종대 이래 단종 사적이 유달리 주목되고 정비와 표장이 지속된 것은 그것의 정치적 상징성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당초 숙종이 사육신과 단종을 추복한 것은 ‘君臣의 分義’를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 사육신 추복이 건의되었을 때 숙종은 祖宗의 처분을 유지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반대하였으나 뒤에 世祖의 本意를 계승한다며 실행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 변화의 초점은 ‘사육신의 절의’를 국왕의 정치사상으로 수용하는 데 있었다.
곧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을 통해 거듭 정치세력을 교체한 숙종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세자의 정치적 위상을 확증하기 위해 사육신과 단종을 차례로 추복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추복을 통해 단종과 사육신의 관계는 ‘군신의 분의’를 보여주는 실례가 되었으며, 같은 차원에서 자신과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충의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영조의 삼상 추복은 이러한 숙종의 조치에 대한 繼述이자 궁극적으로 세조에 대한 繼述이라는 이념 속에 추진되었다.
영조는 세조의 『訓辭』를 인용하며 삼상 추복을 전격 실행하였고 이어 『光廟御製訓辭』를 간행하였다.
그것은 조종의 사업에 담긴 뜻을 살릴 수 있도록 국왕이 주도하여 적절히 時宜에 따라 變通해 간다는 이념을 표한 것이었다.
이것은 『續大典』으로 대표되는 영조의 체재정비 사업의 사상적 토대였다.
이처럼 숙종과 영조대에 걸쳐 진행된 단종 추복과 및 제신의 포증은 君臣의 分義를 강조하여 국왕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繼述의 이념을 통해 체재 정비를 국왕이 주도하여 나간다는 이념적 근거를 지닌 것이었다.
정조가 1791년(정조 15)에 집중적으로 단종의 諸臣에 대한 표장 사업을 전개한 것은 상기한 숙종과 영조에 대한 繼述인 동시에 그 자신의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이었다.
정조는 단종 사적 표장을 숙종과 영조에 대한 繼述로 설정하고 있었다.
1789년(정조 13)에 慶州의 유학 權宗洛은 12대조인 權山海의 관직을 회복할 것을 격쟁하면서 "영종 대왕께서 선대왕(숙종)의 성덕을 본받아 生六臣과 死六臣들에게 모두 벼슬을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성상께서는 또 생육신들에게 시호를 주는 은전을 내리셨습니다.(『正祖實錄』 권27, 정조 13년 5월 癸亥)" 라고 하였으며, 이에 따라 권산해의 職을 회복시켰다.
이는 시 정조의 조치가 숙종과 영조에 대한 계술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791년(정조 15) 배식단 건립 과정에서 정조는 장릉 안에 있던 사당이 조정의 의논이 엇갈린 끝에 옮겨진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이어 別壇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한 뒤
"전에 우리 聖祖의 하교에 육신의 사당을 本陵 홍살문 안에 그대로 두라고 하셨으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다.
이번에 배향하는 규례를 거행하자고 논의하는 것을 가지고 삼가 그 뜻을 계승하는 일단을 스스로 구현하고자 한다.
대체로 제단에 제사지내는 것과 사당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지만 함께 제사지내는 뜻은 마찬가지이다. (『正祖實錄』 권32, 정조 15년 2월 丙寅)" 라고 하여 자신의 조치가 숙종대 이래의 조치를 계승하는 것임을 강력히 드러내었다.
성조의 하교란 숙종이 사육신 사당을 옮기는 문제에서 昭烈帝 능의 영내에 武侯(諸葛亮)의 사당이 있는 고사를 두고 “一體君臣祭祀同”이라고 한 杜甫의 시를 인용하며 사당을 옮기지 말라고 명하였으며, 영조가 숙종의 조처를 이어 그대로 두도록 한 전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단종과 諸臣에 대한 표장 작업에서 숙종과 영조에 대한 계승을 표방하고 있었다.
정조의 단종 표장사업은 선대왕대에 제기된 것과 같이 군신관계의 확립과 세자의 위상 강화라는 정치적 의도를 내포한 것이었다.
당초 이 문제는 숙종이 세자(경종)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거니와 정조도 동일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당초 宜嬪 成氏 소생의 文孝世子가 있었으나 1786년(정조 10)에 요절하였다.
그 뒤 1790년(정조 14) 6월에 綏嬪 朴氏가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뒤의 純祖이다.
뒤늦게 다시 얻은 탓에 신료들은 그 날로 원자로 정할 것을 청하였고, 정조도 이를 받아들여 종묘에 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세자 책봉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원자가 태어난 이듬해부터 신료들은 원자를 서둘러 세자로 책봉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현종과 숙종께서는 6세에 책봉되셨고 나도 8세에 책봉되었는데, 지금 이 전례를 따르고 싶다. 고 재상 鄭太和가 말하기를 “원자가 탄생하신 날이 곧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날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좋다. 책봉하는 것이 더디고 빠른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正祖實錄』 권32, 정조 15년 2월 戊辰)" 라고 하여 지금은 원자를 정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로 세자 책봉을 요청하는 신료들과 이를 미루는 정조 사이에 매년 줄다리기가 이어졌으나 결국 원자는 1800년(정조 24)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처럼 정조가 의식적으로 세자 책봉을 늦춘 것은 조기 책봉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조의 부담감은 1798년(정조 22) 11월 신료들의 세자 책봉 요청에 대해 "肅廟朝에서는 책봉례를 7세에 치르면서 비로소 冊命을 직접 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50년 가까이 왕위에 있으면서 태평 세월을 누렸으며 끝없는 복을 후손들에게 내려주셨다. 그리고 나는 책봉례를 8세 때 치렀는데, 국운이 영원하기를 비는 근본이 오로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숙묘께서 앞에서 거행하였고 나 자신이 뒤에 그것을 이었는데, 이번의 이 경사스런 예는 나보다도 더 늦으니, 어찌 늦으면 늦을수록 더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正祖實錄』 권50, 정조 22년 11월 丙子)" 라고 한 데서 잘 나타난다.
한 마디로 늦게 책봉할수록 왕위가 탄탄하게 된다는 인식인 것인데, 그 근거는 숙종의 사례로서 정조는 그에 대한 계술의 차원에서 세자 책봉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앞서 조기 책봉된 세자가 한결같이 불운한 상황을 맞은 것과 관련되어 있다.
만 1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던 경종과 사도세자는 물론, 만 2세 때 문효세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보다 본절적인 것은 왕위계승자로서 충분한 준비가 되었을 때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즉위에 대한 위구심을 없앨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기 때문이었다.
연령으로나 학문적으로 성숙하였을 때 세자가 되면 책봉의 실질적인 의미를 살릴 수 있으며, 이때부터 협력한 신료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즉위한 후 국왕이 정국을 이끌어 가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정조가 세자 책봉의 모범적인 사례로 누누이 숙종의 경우를 들고 있는 바, 숙종은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정국을 주도하여 국가의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실제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지 않았을 뿐, 어린 나이에 책봉된 세자에 준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796년(정조 20)에 宋煥箕를 원자 사부로 임명하여 정식 교육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相見禮를 비롯한 의례가 준비되었고, 아울러 진강할 책자에 대해 『小學』으로 정하고 『소학』 1부를 내려주면서 "이것은 내가 春邸에 있을 때에 강독하던 책이니 원자가 강독하는 책은 이것을 사용하게 하고, 사부와 유선이 강독하는 책은 홍문관에 先朝의 經筵에서 사용하던 책이 있으니 가져다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正祖實錄』 권46, 정조 21년 4월 戊子)" 라고 하였다.
세자(세제·세손)에게 『소학』을 내려주는 것은 숙종이 세자(경종)의 입학례 때 『소학』을 인간하여 내려준 이래의 전통이었다.
규장각에 소장된 『소학제가집주』(奎 11680)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그리고 사도세자가 세손(정조)에게 전수한 것으로서 그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윤정, 2004 「肅宗~英祖代의 세자 교육과 ≪小學≫」, 『奎章閣』 27)
정조가 원자에게 『소학』을 내려준 것은 원자의 위상이 사실상 세자로 간주되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정조는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원자에게 『소학』을 읽게 하고 뜻을 논의케 하였는데, 이는 영조 때 세손이던 정조 자신의 영조 앞에서 자주 『소학』을 강론했던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또한 정조 20년에 우의정 尹蓍東이 "옛날에는 8세가 되어야 비로소 소학에 들어갔는데, 7세에 이미 『소학』 2권을 읽었으니 원자의 학문은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준 것입니다. (『正祖實錄』 권44, 정조 20년 2월 乙酉)" 라고 한 것도 사실상 세자에 준해서 원자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단종 사적의 표장은 원자에 대한 신료들의 충의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세자로 책봉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날 수 있는 원자 위상의 약화를 보전하려고 한 것이라 평가된다.
사실 단종과 제신들은 숙종대 이래 ‘君臣의 分義’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리매김되어 강조되고 있었거니와 정조는 이를 더욱 보강하고 정리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원자가 태어난 바로 이듬해 배식단 건립이 이루어지고 사적 정리가 본격화된 것과 정조가 鄭太和의 말을 빌어 元子로 정한 것만으로 나라의 근본이라는 의미가 확인된 것이라는 입장을 보인 것은 이후 전개되는 사적 정비와 원자의 위상 사이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결국 정조는 원자의 세자 책봉을 늦추는 대신 단종 관련 사적의 표장을 통해 군신의 분의를 재확인함으로써 원자의 위상을 확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단종 사적의 정비에 이은 사적 정리 작업의 결과인 『장릉사보』의 편찬은 숙종~영조대 사례를 배경으로 정조가 세자를 매개로 한 군신 관계를 확증하고자 하는 일련의 작업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