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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漢代)의 글, 당대(唐代)의 시, 진대(晉代)의 글씨, 송대(宋代)의 학(學)들 또한 한결같이 천지의 기수(氣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한 문제(漢文帝) 초년에 승상이 태자를 세울 것을 아뢰자, 문제가 거부하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널리 천하의 현성(賢聖)으로 덕이 있는 인물을 구해 천하를 선양(禪讓)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미리 태자를 세운다면 이는 내가 거듭 부덕(不德)한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심지어는 제왕(諸王)에게 물려주려고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후세에서 들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한 문제는 참으로 탁월하기도 하였다. 저 부자간에 서로 의심하고 형제간에 서로 시기하는 자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의 소유자들이란 말인가.
한 고조(漢高祖)ㆍ한 문제(漢文帝)ㆍ광무제(光武帝)의 밝게 드러난 점은 모두 당(唐) 나라나 송(宋) 나라의 여러 임금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만약 문제와 같은 자질에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 같은 인물을 얻어 보좌하게 했더라면 어찌 성강(成康 주(周) 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시대에 미치지 못했겠는가. 상산(象山 송(宋) 육구연(陸九淵))이 무제(武帝)를 문제보다 높이 평가한 것은 잘못이다.
상고(上古) 시대의 군신(君臣) 관계는 어쩌면 그렇게도 간이(簡易)했던가. 도유우불(都兪吁咈)뿐이었다. 요(堯)와 순(舜)이 서로 전한 백여 년 동안 정령(政令)으로 드러난 것은 단지 양전(兩典 요전(堯典)과 순전(舜典))뿐이었는데, 후세의 군신을 보면 예우는 매우 성대하면서도 정의(情意)는 갈수록 막혀만 갔고, 정령은 점점 번잡해진 반면 정치의 공효(功效)는 날로 낮아져 갔으며, 사적(史籍)은 엄청나게 많아졌어도 볼 만한 것은 얼마 없게 되었다. 아, 이 세상에 나와 요순의 시대를 만나지 못한 데 대해 후세의 충현(忠賢)이 슬퍼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우(禹)의 뒤로는 계(啓 우(禹)의 아들)를 거쳐 이미 태강(太康 계(啓)의 아들)이 있었고 몇 대가 채 못 되어 예(羿 유궁후예(有窮后羿))와 한착(寒浞 예(羿)를 죽이고 지위를 탈취했음)이 일어났으며, 탕(湯)의 뒤로는 겨우 3대를 거쳐 태갑(太甲)이 동(桐 탕(湯)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쫓겨났고, 무왕(武王)의 뒤로는 양 대를 전하고 소왕(昭王)이 돌아오지 못했으니, “황(皇)에서 내려와 제(帝)가 되고 제에서 내려와 왕(王)이 되었는데, 쫓아내고 시해하는 일이 일어난 이상 거짓과 폭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정말 그렇다 하겠다.
아!
주(周) 나라는 소왕(昭王) 이후로 시해된 자가 4인이니 유왕(幽王)ㆍ도왕(悼王)ㆍ애왕(哀王)ㆍ사왕(思王)이요, 국외로 망명한 자가 4인이니 여왕(厲王)ㆍ혜왕(惠王)ㆍ양왕(襄王)ㆍ경왕(敬王)이요, 화살을 맞은 자가 1인이니 환왕(桓王 평왕(平王)의 손자로 정(鄭) 나라를 칠 때 어깨에 화살을 맞았음)이다. 그리고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멸망시킨 뒤로 겨우 2백 57년 만에 평왕(平王)이 동천(東遷)했는데, 비록 주 나라의 역사가 8백 년이라고는 하나 어느 해이고 편안한 때가 없었다.
춘추(春秋) 시대 2백여 년의 사적(事迹)을 보면 단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의 상도(常道)가 변한 것으로서 기록할 만한 선(善)이 하나도 없으니 천지에 일대 액운이 돌아온 시기였다고 하겠다.
공자(孔子)가 무왕(武王)의 공에 대해서 말하기를 “한번 융의(戎衣)를 입고 천하를 소유하였는데 몸은 천하의 훌륭한 이름[顯名]을 잃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단지 현명(顯名)이란 표현을 써서 평가했던 것일까. 요(堯)에 대해서는 ‘탕탕(蕩蕩)’이라 하고 순(舜)에 대해서는 ‘외외(巍巍)’라 하고 문왕(文王)에 대해서는 ‘진선(盡善)’ 이라고 한 반면, 무왕에 대해서는 ‘현명을 잃지 않았다.’고 한 것은 성인의 미의(微意)라 할 것인데, 동파(東坡 송(宋) 소식(蘇軾))의 논은 이 점에 대해 안목을 갖고 있다 하겠다.
동한(東漢)의 인재가 한번 변화하면 도(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동한의 인물은 쇄락하여 지금까지도 생기(生氣)가 있다.
윤기(倫紀)는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바꿀 수 없는 데 반해 관작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서 꼭 항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주(周) 나라에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도록 한 것[貴貴]이 상(商) 나라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고[長長]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게끔 한 것[親親]에 조금 뒤떨어지는 점이 없을 수 있겠는가.
무비(武備)를 갖추고 오래도록 경계한 것은 무리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긴 것이다. 하늘이 응하고 사람이 따랐다면 무슨 얻지 못하는 병통이 있었겠는가. 무왕(武王)은 이런 면에 있어서 진선(盡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했다면 어떻게 기약하지 않고도 제후들이 집결하는 일이 있었을까. 나는 이 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왕이 은(殷) 나라에 승리를 거두고 멸망시킨 나라가 50이고 보면 은 나라의 제후가 모두 복종한 것은 아니었고, 도망친 백성들은 성왕(成王) 때까지도 평정시키지 못했고 보면 은 나라의 유민(遺民)들이 모두 복종한 것도 아니었다. 어째서 복종하지 않았던 것일까. 무왕의 덕이 낮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세상 인심이 변해서 그랬던 것일까.
하(夏) 나라에서는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완전함을 구하지도 않았고 크게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제(帝)가 끼친 인(仁)이 있었다. 한 사람에게 완전함을 구하는 것은 인에서 멀어지는 일이고 백성을 강압하는 것은 인과 배치되는 일인데, 이는 왕(王)의 도가 낮아져서 그런 것이다.
정 장공(鄭莊公)은 숙단(叔段)을 죽이지 않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그는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는 홀돌(忽突)의 난(亂)을 장공이 숙단을 꺾은 응보로 귀결시키고 있다.
정 장공이 영고숙(頴考叔)의 말을 받아들인 것은 모자(母子)간의 윤기(倫紀)를 잃지 않은 것이요, 숙단의 후손을 세워 준 것은 형제간의 윤기가 있음을 안 것이다. 따라서 금수(禽獸)와 같은 지경은 면했다고 할 것이니, 끝내 돌이킬 줄 모르는 자보다는 조금 낫다고 하겠다.
진(晉) 나라의 내란은 사위(士蔿)로부터 발단된 것이었다. 헌공(獻公)이 이미 제강(齊姜)을 간음한데다 또 동기(同氣)마저 죽여 없앴으니, 어떻게 해제(奚齊)의 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중이(重耳 진 문공(晉文公)의 이름)와 같이 훌륭한 사람도 회영(懷嬴)을 총애한 일이 있었으니, 가법(家法)이 그러했던 것이었다.
우공(禹貢《서경(書經)》의 편명)에 전지(田地)가 하등(下等)으로 매겨졌으면서도 상등(上等)에 해당하는 부세(賦稅)를 낸 것은 그만큼 사람이 노력했기 때문이요, 전지가 상등으로 매겨졌는데도 하등의 부세를 낸 것은 사람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주(周) 나라는 사마법(司馬法)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척(尺)이 1보(步)이고, 1백 보가 1묘(畝)이고, 1백 묘가 1부(夫)이고, 3부가 1옥(屋)이고, 3옥이 1정(井)이고, 10정이 1통(通)이고, 10통이 1성(成)이고, 10성이 1종(終)이고, 10종이 1동(同)이니 1동은 사방 1백 리이고, 10동이 1봉(封)이고, 10봉이 기(畿)이니 1기는 사방 1천 리이다. 그러므로 구(丘)에는 융마(戎馬) 1필(匹)ㆍ소 3두(頭)가 있게 되고 전(甸)에는 융마 4필ㆍ병거(兵車) 1승(乘)ㆍ소 12두ㆍ갑사(甲士) 3인ㆍ보졸(步卒) 72인이 있게 된다. 따라서 1동(同)은 사방 1백 리로서 합계 1만 정(井)이 되니 융마 4백 필ㆍ병거 1백 승이 있게 되는데,
이는 경대부(卿大夫)의 채지(采地)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컬어 ‘백승지가(百乘之家)’라고 한다. 1봉(封)은 사방 3백 66리로서 합계 10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兵賦)로 6만 4천 정ㆍ융마 4천 필ㆍ병거 1천 승을 낼 수 있는데, 이는 제후의 봉토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컬어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고 한다. 천자의 기내(畿內)는 사방 1천 리로서 합계 1백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로 64만 정ㆍ융마 4만 필ㆍ병거 1만 승ㆍ융졸(戎卒) 70만 인을 낼 수 있는데, 이런 까닭에 천자를 ‘만승지주(萬乘之主)’라고 하는 것이다.
정전(井田)은 공적(公的)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고 팔 수가 없었는데, 진(秦) 나라에서 천맥법(阡陌法)을 실시하면서부터 백성들이 마침내 토지를 사유화하고 서로들 매매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여 갑사(甲士)의 머리를 얻은 자는 또 전택(田宅)이 늘어났는데, 갑사의 머리 다섯 개를 얻으면 다섯 집을 예속시켜 부릴 수가 있었다. 한데 합쳐 소유하는 병폐가 이로부터 시작되면서 제한이 없게 되었다.
한지(漢志)에 “진(秦) 나라는 정전법을 폐지하고 천맥법을 시행[開阡陌]했다.”고 한 데 대해 해설자들 모두가 개(開) 자를 ‘열어 놓는다[開置].’의 개 자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수(遂)ㆍ구(溝)ㆍ혁(洫)ㆍ회(澮 이상 정전(井田)들 사이의 도랑과 두둑을 말함)가 사방을 에워싸고 있어 전지(田地)의 활용면에서 볼 때 유실되는 것이 있는 점을 병통으로 여겨 도랑을 사방으로 터 버리고 두둑을 무너뜨려 평탄하게 함으로써 이 공간도 모조리 전토(田土)로 조성해 세금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돈을 사용한 것은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임)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고양씨(高陽氏)는 금(金)이라 했고, 유웅씨(有熊氏)ㆍ고신씨(高辛氏)는 화(貨)라고 했고, 도당씨(陶唐氏)는 천(泉)이라 했고, 상(商) 나라 사람과 제(齊) 나라 사람들은 포(布)라 했고, 거(莒) 땅의 사람들은 도(刀)라고 했다.
《주례(周禮)》를 보면 수대부(遂大夫)는 수(遂 행정 구역 단위)의 백성을 금지하고 경계시켰으며,사민(司民)은 만백성의 인구 수를 등록해 올리는 일을 맡았는데 처음 치아가 나오기 시작하는 유아 이상부터 모두 판(版 지금의 호적)에 쓰되 남녀의 성별을 구분하면서 출생자는 장부에 올리고 사망자는 삭제하였다.
그리고 3년마다 크게 비교하여[大比] 만백성의 인구 수를 사구(司寇)에게 보고하였는데, 그러면 사구는 그 인구 수를 왕에게 바쳤고 왕은 절하고 받은 뒤 이를 천부(天府)에 보관하였다.이른바 사민(司民)은 아비가 없는 자와 사망한 자를 돌보는 일을 담당하였고[協孤終], 사상(司商)은 족성(族姓)을 수여하는 일을 담당하였고[協名姓], 사도(司徒)는 군대 병력을 동원하는 일을 담당하였고[協旅], 사구(司寇)는 죄인을 다스리는 일을 담당하였고[協姦], 목인(牧人)은 희생(犧牲)을 길러 물색(物色)을 맞추는 일을 담당하였고[協職], 공인(工人 백공(百工))은 기물(器物)의 제도를 개혁하여 도수에 맞게 하는 일을 담당하였고[協革], 장인(場人)은 작물의 수확고를 계산하는 일을 담당하였고[協入], 늠인(廩人)은 곡물 출납의 수를 계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協出].
옛날의 왕자(王者)는 백성에 대한 정사를 이처럼 치밀하게 하였기 때문에 창졸간에 쓸 일이 생겨도 이루어 낼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후대의 임금들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쥐어 짜내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백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인구가 줄었는지 늘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하고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진(秦) 나라 사람의 십오법(什伍法)이 주(周) 나라 제도와 크게 어긋나는 점은 없지만, 그 본래의 의도를 살펴보면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다. 주 나라의 제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출입할 때 서로 정답게 지내도록 하고 외부의 도적을 막을 때 서로 돕게 하고 질병에 걸렸을 때 서로 보호해 주도록 하였으니 그 목적이 인후하고 화목한 풍속을 이루게 하려는 데에 있었던 반면, 진 나라의 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동태를 감시하고 적발하게 하려 했던 것으로서 각박하고 포학한 정치를 시행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순하게 하면 오래 가고 사납게 하면 바로 거꾸러진다는 것이 여기에서 판명된다 하겠다.
왕제(王制 《예기(禮記)》의 편명)에 나오는 인재 선발 제도나 제 환공(齊桓公)의 내정(內政)을 살펴보면 덕 있는 자를 높이고 간악한 자를 축출하는 면에서 완벽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 어떻게 왕자(王者)가 되고 어떻게 패자(霸者)가 되었겠는가.
한(漢) 효소제(孝昭帝)가 처음 즉위하여 유사(有司)에게 현량 방정(賢良方正)으로 등용된 사람들과 함께 염철(鹽鐵)ㆍ균수(均輸)ㆍ각고(榷酤)의 제도에 대한 득실을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끝내는 현량의 의논을 따랐으니, 한 나라 정치에는 그래도 바탕을 이루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후대에 책문(策問 시무책(時務策)에 관한 문제)으로 시험하여 선비를 뽑고서도 그들의 말을 채택해 시행했다는 말을 언제 들어 본 적이나 있었던가.
임금된 자가 일에 대해서는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법에 부치고 사람에 대해서는 현(賢) 불초(不肖)를 막론하고 공의(公議)에 내맡긴 채 중립을 지키면서 팔짱을 끼고 서 있으면 하는 일 없는 가운데 다스려지는 정사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
동경(東京 낙양(洛陽)에 도읍한 후한(後漢)을 말함)의 태학(太學)에 몸 담은 제생(諸生)으로서 준엄한 말로 격론을 벌이며 악인을 치고 선인을 높이 들어올린 자들이 거의 3만여 인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모두 법망에 걸려든 반면, 홍도(鴻都)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그만 거꾸로 뜻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영제(靈帝)는 마음속으로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배양(培養)하는 절차로 삼았으니, 정말 눈을 뜨고도 흑과 백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이런데도 나라가 어떻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후한의 여러 명사(名士) 가운데 황헌(黃憲)ㆍ순숙(荀淑)ㆍ곽태(郭泰)ㆍ서치(徐穉) 같은 이들은 기품이 지극히 고매하였다. 그 중에서도 황헌은 더욱 한 점의 티도 없이 순박하고 옛스러워 사람들로 하여금 성학(聖學)의 문호(門戶)를 알게 하였고 보면송대(宋代)의 제자(諸子)에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염락(濂洛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 형제)이 아직 나오기 전에 재주가 높고 자질이 아름다운 사부(士夫)로서 순전히 노학(老學 도가(道家))을 쓰면서도 크게 일컬을 만한 업적을 세운 자들이 있었는데, 한(漢) 나라의 소하(蕭何)ㆍ조참(曹參)ㆍ유후(留侯 장량(張良))와 진(晉) 나라의 왕도(王導)ㆍ사안(謝安)과 송(宋) 나라의 이항(李沆)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정성서(定性書)는 간이(簡易)하고 명백하게 이전의 현인이 아직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확충해 주고 있는데, 후대에 학을 논하는 자들 가운데에서 이에 미치는 자가 있음을 나는 보지 못했으니, 이로써 명도가 제자(諸子)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것을 알겠다.
상산(象山 송(宋) 육구연(陸九淵))의 글을 보면 문세(文勢)가 평이하고 양명(陽明 명(明) 왕수인(王守仁))의 글을 보면 문세가 방자하다. 상산은 자품이 고매한 관계로 혈기가 적고 양명은 자품이 호탕한 관계로 혈기가 많다.
자호(慈湖) 양간(楊簡)이 비록 육상산의 문하라고는 하나 스스로 터득한 것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주자(朱子)가 죽고 난 뒤에도 탁월한 문인들이 많았으니, 가령 황면재(黃勉齋 황간(黃幹))ㆍ이과재(李果齋 이방자(李方子))ㆍ채구봉(蔡九峯 채침(蔡沈)) 같은 이들은 몸 마칠 때까지 자신의 행동을 도에 입각해서 했다고 자임(自任)하였고, 그 뒤 서산 진씨(西山眞氏 진덕수(眞德秀))가 또한 잇달아 일어나 주자의 문에 사숙(私淑)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정자(程子)나 주자에 비교하면 근소한 차이가 없지 않을 뿐만이 아니니, 도를 성취하기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김이상(金履祥)ㆍ허겸(許謙)ㆍ허형(許衡)ㆍ오징(吳澄) 모두가 유선(儒先)이지만, 노재(魯齋 허형)와 초려(草廬 오징)가 원(元) 나라에 벼슬한 것은 과대하게 자임(自任)한 잘못을 면할 수 없다.
유정수(劉靜修 유인(劉因))는 인품이 지극히 고매한데, 원(元) 나라에 벼슬하지 않은 절개 하나만 보아도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하다.
명(明) 나라의 운세가 열리면서 거유(巨儒)가 배출되었는데, 설문청(薛文淸 설선(薛瑄))이 한결같이 주자학을 따르며 도(道)를 보위했던 일은 옳았다고 하겠다.
중국의 근세 학술을 보건대, 이름은 염락(濂洛 성리학(性理學))을 조술(祖述)했다고 하나, 그 언론을 고찰해 보면 태반이 선가(仙家)와 불가(佛家)의 교리가 뒤섞인 것들이다. 이는 어쩌면 양명(陽明 명(明) 왕수인(王守仁))과 백사(白沙 명 진헌장(陳獻章))의 유폐(流弊)가 아니겠는가.
진백사의 학문은 심오함과 치밀함을 보여 주는데 고요함[靜] 가운데 터득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의 학설에 역시 볼 만한 것이 있다.
사안석(謝安石 진(晉) 사안(謝安))은 노학(老學 도가(道家))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일을 해도 자취를 남기지 않았으니.
동한(東漢) 사람들의 인품이 강개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한 것을 볼 만하다고 말할지라도 종내 서한(西漢) 사람들이 질박하여 옛 시대에 가까웠던 것보다는 못하다.
노자(老子)는 깊이 생각하면서 세밀하게 따지고 장자(莊子)는 크게 생각하되 빠뜨린 점이 많으며, 노자는 마음씀이 정밀하고 장자는 마음씀이 너른데, 아무래도 노자가 낫다고 하겠다.
천지의 지극히 묘한 용(用)을 도둑질하여 자기 개인의 도구로 삼은 자가 바로 노자(老子)이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1086~1093) 초년에 명도 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이 종정시 승(宗正寺丞)으로 부름을 받고 가던 도중에 죽었는데, 명도가 ‘기월 삼년(朞月三年)’의 경륜으로 크고 작은 일을 직접 시행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명도가 갑자기 죽고 난 뒤에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과 여공(呂公 여공저(呂公著))마저 서로 잇달아 죽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송사(宋史)》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한없이 탄식하게 된다.
우리 나라 사람은 기품이 좁고 얕아서 조금 잘하는 것이 있으면 곧장 스스로 만족해 버리기 때문에 덕업(德業)과 문장을 성취한 자가 적은데 간혹 그런 자가 나와도 모두 크지가 못하다. 강절(康節 송(宋) 소옹(邵雍))이 “중국에 태어난 것을 낙으로 여긴다.”고 한 말이 또한 맞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맹자(孟子)가, 제(齊) 나라 왕의 “여자를 좋아하고 돈을 좋아한다.”는 질문에 대답해 준 것이 바로 역(易)에서 말하는 바 “단순하게 창문을 통해 건네준다[納約自牖].”고 하는 격이라 할 것이다.
위징(魏徵)이 소릉(昭陵)의 물음에 대답한 것 역시 이런 유에 속한다고 하겠다.
대덕(戴德)은 예(禮)로 이름이 난 사람인데, 《한서(漢書)》 하무(何武)의 전(傳)에 그의 행동이 유자(儒者)답지 못한 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동파(東坡 송(宋) 소식(蘇軾))는 호걸의 선비이다.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한 패거리가 되려 하지 않은 것은 평소의 행동을 고수함이요, 속수(涑水 사마광(司馬光))가 들어가 정승이 되었을 때에도 부화뇌동하지 않았으니, 이만하면 ‘화이부동(和而不同)’ 한 자가 아니겠는가. 단지 정문(程門)에 죄를 얻은 까닭에 회암(晦庵)이 힘을 남기지 않고 공격했던 것인데, 세상의 유자(儒者)들이 마침내 남에게 뒤질세라 배척들을 하고 나섰으니, 이는 지나쳤다고 할 것이다. 나는 “주공과 관숙(管叔)ㆍ채숙(蔡叔)이 삼간 모옥에서 같이 살지 않았던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周公與管蔡 恨不茅三間].”고 한 동파의 시 구절을 읊을 때마다 언제나 멀리 앞서가는 그의 모습을 뒤에 처져 쳐다보는 심정[瞠若乎其後]이 되곤 하였다.
우 기장(牛奇章) 또한 한 시대의 명인(名人)이었는데, 다만 그의 동류들이 대부분 소인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같이하는 사람들을 신중히 가리는 것이다.
우 기장이 유주(維州)의 실달모(悉怛謀)를 돌려보내도록 한 일에 대해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와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이 평가한 것이 서로 차이가 나는데 주자(朱子)는 단안을 내리기를 “일은 바르지만 마음은 사악하다.”고 하였다. 가령 기장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 하더라도 이 말에 대해서는 필시 변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구양수(歐陽修)의 글은 바르고 소식(蘇軾)의 글은 기이하며, 구양수의 글은 상도(常道)에 입각해 있고 소식의 글은 권도(權道)를 위주로 하고 있으니, 두 공의 글을 통해 그들의 취향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자산(子産)과 숙향(叔向)과 안영(晏嬰)은 춘추(春秋) 시대의 걸출한 인물들인데, 자산이 두 사람보다는 우월하다.
자피(子皮)가 인재를 등용하고 선한 일을 한 것은 아무나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오(吳) 나라 계찰(季札)은 노씨(老氏 도가(道家))의 무리였다.
거백옥(蘧伯玉)은 임금이 나라를 떠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듣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신하된 도리에 비추어 볼 때 어떻다 하겠는가.
대신으로 이고(李固)와 두교(杜喬) 같은 사람은 사직을 보위했다 할 것이다.
서경(西京 전한(前漢)) 사람들은 기품이 순후하였다. 가령 동 강도(董江都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 같은 사람이 공자의 문하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70제자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시대를 내려와 조송(趙宋) 때 태어났더라면 필시 제자(諸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가 장사(賈長沙 한(漢)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을 보건대, 여러 종실(宗室)을 검속(檢束)하는 것에 관한 몇 절(節)은 참으로 법률의 느낌을 강하게 갖게 하는데 반해 태자를 보도(輔導)하는 것과 관련된 말들 같은 것은 무척이나 고풍(古風)을 풍긴다. 진(秦) 나라의 분서(焚書) 갱유(坑儒)가 지난 뒤이기 때문에 고제(古制)를 모두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왕의 법도를 정연하게 개진하고 있음을 볼 때 그 영특한 자질을 상상할 수가 있으니, 그 또한 강도(江都)와 짝하는 인물이라 하겠다.
당(唐) 나라 사람들은 오로지 문사(文詞)를 숭상했는데,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광범(光範)에 관한 상소나 조주 자사(潮州刺使)를 사직하며 올린 표문 등은 비루하다 하겠다.
소동파(蘇東坡)의 경 해석을 주자(朱子)가 많이 취하였는데, 가령 《서경(書經)》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나오는 “면복(冕服)을 벗었다.[釋冕]”는 구절에 대한 동파의 해석은 주자가 미처 개요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서 후세의 법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그런데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 역시 《춘추전(春秋傳)》에서 강왕(康王)이 면복을 벗은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상복을 일단 벗었으면 길례(吉禮)를 취해야 한다.”고 하는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