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뿔
눅1:67-79
사가랴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성전에서 분향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말을 한 수 없게 되는 기이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말은 外人들의 시각에는 심히도 이상하고 무언가 문제가 있는 일로 생각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은 별별 저주스럽고 부정한 말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돌리며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졌습니다.
왜 사가랴는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되었다가 또 갑자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성령 충만 가운데 입을 열어 다시 말할 수 있게 된 사가랴는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예언의 말을 하게 되는데 사가랴의 예언은 예언만이 아니라 찬양의 성격에 가까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가랴는 예수님의 탄생과 자신의 아들 세례요한의 출생에 대하여 지켜보던 중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주님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사가랴는 먼저 메시야를 보내 주심에 대하여 감사하였고(68∼71절) 구원의 언약을 찬양하였으며(72∼75절) 세례 요한의 사명을 언급하였고(76∼77절) 마지막으로 메시야의 구원을 찬양하였습니다.(78∼79절)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구원의 찬양에서 사가랴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켜서 그분이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평강(ειρήνη, 에이레네)은 메시야의 도래와 연결된 모든 축복을 뜻하는 말로서 ①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회복, ②죄 사함을 통한 심령의 온전한 평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눅1:5~8)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사가랴는 유대왕 헤롯 때에 제사장이었고 규례대로 흠이 없었으나 한 가지 아쉬움은 사가랴의 부인 엘리사벳이 불임으로 인해 무자하였고 나이는 많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인 세례 요한을 낳게 되었고 난지 팔일만에 입을 열어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그 예언의 내용 가운데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 하나님은 백성을 돌보시고 속량해 주신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68,69절)
사가랴는 자기의 아들이 구속사적인 인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아들이 바로 고대하던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예비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구속사를 깨달을 때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제일 먼저 찬양을 드립니다. 이러한 찬양은 마음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돌아보아 속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속량하신다는 것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타인의 소유로 있는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드디어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됩니다! 메시아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유인으로 만드십니다!
노예에게는 속량이라는 말보다도 더 좋은 것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
노예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속량입니다. 일생동안 주인의 소모품으로 사용되면서 고생하며 살다가 죽는 것이 노예의 신분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의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까? 대국 로마에 예속되어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로 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고대하고 있는 대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로마의 지배를 벋어나기 위해 메시아를 고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의 찬송시를 끝까지 들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망할 것입니다. 메시아가 가져다 줄 해방은 정치적 해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이 죄악 가운데서 고통과 신음 중에 있으므로 그 환난을 대신하여 받으시고 구제해 주시기 위해 해방시키시기 위해 다윗의 집에서 구원의 뿔(‘힘’과 ‘능력’을 은유화 한 표현)을 일으키셨으니 바로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눅1:32)로 고지된 천사의 고지와는 달리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눅1:76)로 자신의 아들 요한을 지칭하면서,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리니”(77절)라는 사명자의 역할을 자신의 어린 아기에게 언급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 하나님은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신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71,72절)
메시아의 역할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원수와 미워하는 자들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원수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히 로마의 지배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같은 법치국가에서는 원수가 없습니다.
로마 제국처럼 그들 스스로가 약소국의 원수가 될 수 있을 지언정 그들의 원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원수의 개념이 정치적인 의미라면 그들에게는 그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아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원수의 개념은 제국주의 혹은 자본주의 독재자 대 자본가 잘못된 사회체제 혹은 정치 제도 가난 공해 등으로 바뀝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아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일부 흑인들은 그를 그들의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유럽 사람들까지도 그에게 메시아적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원수를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인간의 가장 큰 원수는 죽음입니다. 인간에게 죽음만큼 큰 원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바로 영원한 고통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은 후에 받는 고통은 상상을 할 수도 없습니다.
(고전15:55,56)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셋째 :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77~79절)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과 권세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긍휼'을 베풀지 않으신다면 천하 인간 중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위로부터 옵니다. 마치 돋는 해가 우리에게 임하듯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합니다. 메시아는 하늘에서 내려오십니다.
영원하신 분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다가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결코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분이 인간이 되셔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희생을 무릅쓰고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는 세상을 규정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실재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어두움은 낭만적인 어두움이 아니라 죽음을 연상케하는 어두움 입니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어두움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의 모든 영광 뒤에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누리고 사람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밝고 화통한 웃음 이면에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밝은 웃음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이 양심의 소리와 이웃이 외치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면서 자신의 불의를 잊기 위해 얼마나 많이 자신을 세뇌시켜야 했는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진정한 평강은 어디에서 옵니까? 죽음과 죽음에서 오는 불안을 이기는 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어두움을 벗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79절, 후)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평강(평화)은 전쟁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를 개발해서 다른 나라를 제압함으로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이시다”(엡2:14; 요14:27; 16:33)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인간이 진정한 평화를 얻으려면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합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평화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원수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으나 이제 화평 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현실에 눈을 감고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으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