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전우를 만나다 3(完)
간이역인 쌍용 역은 여느 날에는 한적한 편이지만 휴일이나 주말에는 꽤 붐볐다. 상행선 전동차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역사로 집중하였다. 역 주변에 있는 N대학 학생들의 하교 시간대와 전동차의 출발시간이 맞물려 좁아터진 역사는 금세 사람들로 붐볐다.
소대장님을 기다리는 조급함은 분 단위에서 초 단위로 up grade 되었다. 초 단위로 엄습해 오는, 조바심을 동반한 조급함으로 등짝에 밴 땀이 흘러내렸고 양발이 번갈아가며 지면과 공중을 오르내렸다. 뒷목이 경직되어 마른 장작개비처럼 뻣뻣해졌고 갈증으로 목이 탔는데 목이 탈 때 속까지 탔다. 조바심을 진정시키려고 마른 침을 꿀꺽꿀꺽 삼켰지만 벌렁거리는 목울대를 따라 넘어가는 것은 헛바람뿐이었다.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였다.
살구색 점퍼 속에 감은색 바탕에 井자 무늬가 잘게 그려진 깃 달린 셔츠를 받쳐 입고 곁눈질을 하며 서로 스쳐 지난, 나잇살이나 먹어 보이는 그가 저쪽 출입구에서 나와 등진 채로 서성거리는 모습이 벽거울에 반사되어 비쳤다. 그러다가 그는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이쪽으로 몸을 돌린 것과 내가 그쪽으로 돌린 때 간발의 시차時差는 있었겠지만 이 마당에 그것을 가지고 따따부따 옴니암니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향해 몸을 돌린 것은 자동모드 동작이어서 내 의지와는 무관할 터였다. 서로 몸을 돌릴 때 몸이 돌아가는 속도는 티브이 화면 속의 slow motion처럼 느려터졌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상대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은 발뒤꿈치에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 조신操身해 보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의 얼굴과 몸태의 윤곽선輪郭線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그의 몸태의 윤곽선은 흐리멍덩한데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왕년의 소대장님의 얼굴이나 몸태와는 십만 팔 천리여서 그를 누구라고 특정하여 인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의 입장에서도 나를 왕년의 월남전선 부하로 인식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저 사람이 소대장님일 것이라는 나의 기대가 어그러진 것처럼 저 사람이 나에게 기댄 기대도 어그러지기는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고개를 바짝 쳐들어 역사驛舍 천장을 쳐다보았고 나도 그를 따라 천장 쪽으로 고개를 쳐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내리면 나도 따라 내리고 그가 고개를 쳐들면 나 또한 쳐들었다. 그때 그의 목 울대뼈가 유난히 툭 튀어나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툭 튀어나온 울대뼈가 낯설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와 나의 얼굴 사이에 가까워졌다. 그가 도수 높은 돋보기안경이 벗겨진 것처럼 양미간兩眉間을 잔뜩 찌푸리며 내 얼굴을 훑었고 나도 그를 따라 양미간을 잔뜩 찌푸려 그의 얼굴을 훑었다. 그가 내 얼굴을 훑다가 눈을 깜박거리면 나도 그를 따라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만큼은 나는 그의 흉내쟁이였다.
그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훑는 동작은 흡사 경계근무중인 초병이 경계지역을 훑는 것 같았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수상쩍은 곳은 집중해서….
그가 나에게 집중하는 눈초리는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송골매 수지니처럼 매서웠으며 시선은 날카로웠다. 그의 매서운 눈초리와 날카로운 시선이 섬광閃光처럼 날아와 내 몸에 비수처럼 꽂힐 때 부르르 떨렸다. 그러면서 그의 그런 눈초리와 시선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여 낯이 익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를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만한 대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여 몸을 돌리려고 할 때 나 또한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몸을 틀려고 하였다. 그러다 그가 자기력磁氣力에 끌린 듯 내 쪽으로 몸을 돌렸고 나는 그의 자기력에 끌린 듯 그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와 내가 서로 바라보는 막간幕間 동안의 표정은 멍 때리는 것처럼 ‘벌쭘’했다. 그리고 침묵이었고, 그 침묵을 지키는 입은 진중鎭重하여 중력重力보다 무거워 보였다. 그가 진중하던 입을 열었다.
“혹시‥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순간 나는 5파운드 곡괭이 자루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띵~했다. 띵~ 할 때 의식이 아득했다. 아득한 곳에서 아련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한 의식 속에 타임머신은 46년 전 투이호아 혼바산 기슭으로 가는 도중의 광활한 개활지開豁地로 나를 데리고 갔다.
갈매기에 장착된 ANGRC-78 통신은 차내망에서 소대망으로 전환되었다.
“여기는 갈매기 하나, 지금부터 제압사격과 동시에 적의 대전차포 공격 회피기동을 실시한다. 갈매기들은 각 방면으로 산개하라. 각 갈매기는 측면을 적에게 노출시키지 말라. 전차장은 전방 10시와 2시 방향이고 갈매기 단위 전투를 지휘하라. 조종수는 순간순간의 상황을 파악하여 갈지자로 뛴다. 좌우 사수는 9시와 3시 방향이고 별도의 명이 없는 한 공방攻防사격은 사수의 판단이다.” 소대장의 긴장한 전투지휘 목소리는 ANGRC-78 통신 스피커의 철망을 진동시켰다.
적의 대전차 제압사격과 적의 대전차포 공격 회피기동을 지휘하는 소대장의 목소리가 ‘혹시‥ 누구를‥ 기다리십니까?’소리와 맞물리고 겹쳐졌다. 맞물리고 겹쳐진 목소리는 포개어졌다. 맞물리고 겹쳐지고 포개어진 목소리는 어우러졌다.
“저~저는 하아~그러니까~ 46년 전~ 하아~월남전 때~ 소대장님을~기다리고 있습니다만~ 하아~”
“내가 46년 전 백마 28연대 APC장갑전투지원소대장 김O찬이요.”
두개골이 금이 간 것처럼 쑤셨다. 목울대가 울렁거리고 북받쳤다. 마른기침이 나오고 숨이 가빴다. 월야月夜 설원雪原의 굶주린 짐승처럼 목을 길게 빼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둘은 얼싸안았다.
“아~~소대장님~”
“아~~박 병장~”
세월의 강 건너, 반세기 그 너머, 피안彼岸의 언덕이 손에 잡혔다. 나는 그 언덕을 당겼다.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간다한들, 천지가 개벽하여 하늘이 내려앉고 땅거죽이 뒤집힌다 한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전우는 영원함이었다.